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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노래》50. 한가족의 첫 고향나들이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3.03일 15:24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나들이를 떠나다.


나는 언젠가는 아버지와 무릎을 마주하고 마음속말을 속시원히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아직은 때가 아닌것 같은 감이 들기도 하였다.아버지는 지나간 일을 두고 입도 뻥긋하지 못하게 한다.그러는 아버지를 잘못 건드렸다가 겨우 관계가 완화되여가는판에 잘못 번져나갈가봐 겁부터 났다.


그리하여 먼저 내 할일이나 잘해놓고보자고 생각하였다. 우선은 사업도 잘하고 집안살림도 알뜰하게,딸 교육도 훌륭하게 하는것이 급선무였다. 나는 단 하루라도 생각없이 지낼수가 없었다.그래서 나에게 주어진 24시간을 황금분할하였다.


아침 여덟시부터 저녁 여덟시까지 하루 열두시간은 학생들한테 쓴다.이것은 나의 직업이니깐.하루에 몇십명씩 오는 학생들을 하나하나 열심히 가르쳐야 한다.열두시간 학생들을 가르치고나면 기진맥진하여 침대에 눕자마자 잠에 곯아떨진다.


비과는 새벽 한시나 두시경에 일어나 한다. 그맘때면 주위가 조용하고 또 몇시간을 잤기때문에 정신도 한결 맑아진다.두세시간 도정신하여 비과를 하고 책을 본다. 또다시 잠간 눈을 붙였다가 6시가 되면 급히 일어나서 아이를 챙긴다.


사실 나는 딸한테 무지 미안하다.학전반에 붙여놓고는 그애의 공부에 전혀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자기 공부는 자기절로 해야 된다고, 어머니도 누구의 도움 없이 대학교까지 나왔다고 늘 걔한테 말해주군 하였다.뭘 물어봐도 학생들을 가르치느라고 대답 한번 제대로 해준적이 없다.딸년은 어렸을 때는 자기 어머니를 잡고있는 학생들이 시샘이 났던지 나의 목을 끌어안고 학생들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던것이 점점 헴이 들면서 무슨 일이든지 자기절로 하는데 습관이 되여갔다.


먹고 입는것도 별로 챙겨준적이 없다.아이때는 좀 검소하게 지내야 한다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빈손으로 사업을 시작하다보니 그냥 돈이 딸려 딸애에게 그럴듯하게 차려입히지도 못하였다.소학교 4학년이 될 때까지 새옷 한벌 사주지 못하고 전부 남들이 입던 옷을 얻어 입혔다.


하지만 딸애는 참 착하게 자라줬다.평소에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별로 하지 않아도 제앞의 공부는 절로 하는데 늘 증상등은 가는편이였다. 나는 내가 공부에 너무 집착을 하여 고생했던걸 생각하면 딸애한테는 너무 공부에만 매달리게 하고싶지 않았다.그래서 소학교 5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서법과 쌕스폰도 과외로 배우게 하였다. 그랬더니 어찌나 착실하게 배워냈는지 몇년동안에 최고급까지 따냈다.


인제는 작품까지 선선히 내놓을수 있게 되였다.그러는 딸애가 얼마나 대견스러웠는 모른다.물론 나도 그동안 웬만히 애쓴도 아니다. 음악이라고는 전혀 모르기에 박자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서도 토요일과 일요일이 되면 하루에 여섯시간씩 아이와 함께 훈련하러 다녔던것이다.

나는 하루 일정을 그토록 빡빡하게 보내면서도 적은 돈으로 맛있고도 다양한 음식들을 해먹기 위하여서 각별히 신경을 써왔다. 매일 랭장고문을 최저로 두번쯤 열어보는것은 기본이고 짬짬이 료리책을 보면서 남편과 함께 장보러 가지 않으면 남편한테 부탁하여 신선한 남새를 사다가 중복이 되지 않게 하루 세때 해밥을 해먹군 하였다.

어떤때에는 일주일동안 료리반찬 한번도 중복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우리는 고기보다 제철에 나오는 남새를 많이 먹었다. 이렇게 신경을 써서인지 지금까지 우리 세식구는 별로 탈없이 잘 버티여왔다.


아버지는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지 묻지도 않는 말로 《아마도 둘째가 제일 괜찮아보여. 아무리 큰딸과 아들은 일본에 가 생활한다 해도 걔만치 열심히 잘살고있는지 모르겠어.》라고 하며 어머니한테 속마음을 비쳐보이더란다. 사실 언니와 남동생은 몇해전에 일본에 가 공부도 하고 돈도 벌고 하면서 잘나가고있는데도 아버지는 나를 진정 인정해주고있는것이였다..


2004년 봄, 일본에 갔던 언니가 잠깐 다녀갔다.그 전해에 동생도 일본에서 돌아오다나니 우리 집식구들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이게 되였다.


종래로 나들이를 하지 않는 아버지는 기분이 좋았던지 이참에 고향나들이를 한번 가잔다.나는 처음으로 떠나는 가족행차를 위해 우리 학원의 소형뻐스를 내서 기사까지 동원하여 즐거운 려행을 하기로 하였다.


화창한 봄날, 아침 일찍 우리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여유작작 길을 떠났다.나는 창가에 앉아서 창밖의 경치를 보면서 거의 잊혀져가는 어렸을 때의 기억을 되새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버지는 나의 뒤죄석에 앉아서 잠자코 창밖만 내다보시다가 《후-》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감회깊게 말씀하시는것이였다. 《세월이 정말 빠르기도 빠르다. 어렸을 때 공부하느라고 집 떠난지 벌써 50년,60년이 잘되는구나. 그동안 시간이 없어서 가보지 못했는데 지금쯤 아마 많이 변했을것이다.》


《그야 물론이지요.》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말에 동을 달아보았다.


《이제 좀 지나면 내가 다니던 소학교를 지나게 된다. 옛날 학교가 그자리에 그대로 있을건데.》


《어디인데요?》동생도 호기심이 동해 몸을 일으키며켜 창밖을 내다보았다.


《여기에서 멀지 않다.좀만 지나면 보일것이다.》


이윽하여 아버지는 손으로 앞을 가리키셨다.《바로 저앞에 가로 선 줄집이란다.》 말하는사이에 차는 벌써 그앞을 지나고있었다.


내다 보니 별로 큰 집은 아니였는데 너무 오래된 집이라서 보기에 아주 헐망해보였다.창문은 유리 한장 변변한것이 없었다.집앞에 넓다란 공간이 있어서 그나마 학교흔적을 찾아볼수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어렸을때 가방을 메고 그 학교를 드나드는 모습을 그려보았다.그렇게 볼품 없는 작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대학교까지 나와 고급공정사로 된 아버지, 어머니와 같은 안해를 맞아 행복하게 살아가야 했건만 나같은 딸자식을 보는바람에 마음고생만 무지 하며 살아오지 않으셨던가.


아마, 당시 아버지의 꿈도 푸르렀을것이다.그렇기에 공부를 그렇게 잘할수 있은것이 아닌가.꿈은 바로 동력이다.사람은 누구나 한번쯤은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시간과 정력을 바쳐가면서 분투한다.아버지도 아마 그랬을것이다.물론 꿈은 현실은 차이가 많은 법이지만 근 30년동안 딸과의 무모한 모순갈등으로 인생이 허무하다는 생각도 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번 고향나들이는 나와 아버지로 하여금 많은것을 생각하게 하는것 같았다.


이윽하여 우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산소에 이르렀다.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림종시에 곁에 있지도 못했거니와 세상을 뜬 뒤에도 산소에도 한번도 와본적이 없다.미안한 마음이 갈마들었다.


묘지는 길옆 그리 높지 않은 산언덕을 에돌아 가야 한다.비가 금방 내렸기에 길은 몹시 질척거렸다.내가 가기에는 너무도 힘들것 같아 남편더러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가게 하였다.


차안에 혼자 앉아있는 나는 기분이 착잡하였다.눈앞에는 할아버지의 자애로운 모습이 삼삼히 떠오르고 귀전에는 《원이야 .이리오너라》 하고 부르던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는듯하였다.얼마나 친절한 부름이던가? 익숙한 그 부름소리를 새삼스럽게 떠올리며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그렸다. 내가 걸어다닐수만 있다면 생전에 좀 많이 찾아봤을터인데 그렇게 하지 못한것이 퍽 마음에 걸렸다.


남편이 묘지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더니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무덤을 다른데로 옮겨야 되겠다고 말하는것이였다. 무덤앞이 푹 꺼져내려간것이 너무나 보기 흉하더라고 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차에 오르는 아버지한테 무덤을 옮기시겠는가고 여쭈어보았다.아버지는 최씨가문의 큰아들이니까 의례 돈을 들여서라도 안전하고 깨끗한 곳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셔야 하지 않겠는가?


아버지는 담담한 표정으로 《글쎄다.나중에 다시 보자.》라고 말씀하시는것이였다.썩 후에 남편을 통해 알게 되였는데 아버지는 사람이 죽은 뒤에 무덤을 만드는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셨단다. 아버지께서는 언젠가는 남편 보고 자신이 죽은 뒤에는 회골을 꼭 강물에 뿌리라고 하시더란다.리유라면 자식들의 효성이라는것도 한계가 있는한 손이 닿지 못할 때는 차라리 무덤이 없기보다 못하다는것이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어느 때는 나 보고 죽어도 울지 말고 산소에 와 풀도 뽑지 말라더니 이젠 무덤마저 만들지 말라고 하니 정말 가지가지로 자식들의 가슴을 허빈다고만 생각했었다.

우리 일행은 그 길로 룡정에 있는 고모네 집으로 향했다.


룡정은 아버지에게 있어서 의미가 있는 곳이다.옛날에 아버지는 그 유명한 룡정중학교를 다녔으니깐. 그때의 중학교는 아무리 총명해도 생활이 곤난하면 못다녔고 또 돈이 있어도 공부를 못하면 다닐수 없었던 곳이란다.그렇다보니 그때의 룡정중학교 졸업생이라면 지금의 대학생 못지 않게 사람들이 우러러보군 하였단다.


아버지는 공부는 유별나게 잘했지만 생활은 그렇게 유족하지 못한편이였다.할머니는 큰아들을 출세시키려고 억척스레 베천을 짜서는 몇십리를 왕복하면서 시장에 가져다 팔아 학비를 대주군 하였단다.룡정은 아버지에게 있어서 자못 유서깊은 곳이 아닐수 없었다.


나는 고모네집이 이번에 난생처음으로 가본다. 할머니를 닮아 무섭게 알뜰한 고모는 집 구석구석까지 아주 알른알른하게 닦아놓았다.사실 나는 고모부에 대한 인상이 너무 깊었다.80년대 중반 내가 아버지때문에 가장 힘들어 할 때 고모부는 출장길에 우리 집에 들린적이 있었다.그때 어머니한테 아버지와 나의 관계를 들어 알게 된 고모부는 언제까지나 공부는 꼭 해야 된다며 아버지와 엇서지 말고 많이 리해해드리라고 타이르는것이였다.


그리고 나한테 한조사전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집에 돌아가자마자 한권 구해서 다음에 올 때 나한테 가져다주는것이였다.그렇게 얻어진 사전을 나는 오늘까지 잘 쓰고있다.고모부가 보내준 사전은 그렇게 희귀한 물건은 아니지만 외롭고 쓸쓸하고 힘없는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였는지 모른다.


이윽하여 푸짐한 점심상이 차려졌다.모두들 밥상에 마주앉아 이야기꽃을 피워가기 시작하였다.아주 오랜만에 처음으로 느껴보는 대가족의 따뜻하고 화목한 분위기였다.


나는 어쩌다 떠나온 고향나들이인데 내가 여섯살전에 늘 가있던 할머니네 《옛고향 집》에도 꼭 다녀오자고 졸랐다. 이젠 그곳에 다녀온지 근 40년도 되는것 같았다. 할아버지께서 식사할 때마다 《원이야 이리 오렴》하고 불러주시던 곳, 할머니가 《내 이쁜 손녀야》하며 엉뎅이를 툭툭 쳐주셨던 곳이다.


원래 할머니네는 동성향에 있지 않고 어느 먼 깊은 골안에서 살았단다. 논 한뙈기 없는 고장에서 한전만 다루며 살다보니 일년내내 이밥 한번 먹지 못하였는지라 할머니는 좀 더 나은 생활을 하려고 자식들을 거느리고 수전만 다루는 동성향으로 어렵사리 이사를 오게 되였단다.


내가 그렇게 이사온것이 잘된 일인가고 물었다. 아버지는 대뜸《그럼. 그 골안에서 나오기를 잘했지. 아니면 나는 대학교문앞도 못 가보았을것이다.》라고 하며 아주 감개무량해 하시는것이였다.얼굴은 온통 감격의 빛으로 차넘쳐있었다.


아마도 사람이란 주관적 객관적 조건이 일정하게 구비되여야 인재로 되는법인가 본다. 아버지가 농민의 아들로 태여나 어엿한 나라의 일군으로 될수 있은것도 바로 자식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이든 감수하는 패기를 지니신 할머니를 비릇한 집식구들의 헌신적인 지지가 있었기때문이였을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내가 아무리 총명하고 의력이 있다 한들 부모형제 그리고 가족친지들 모두의 사심없는 지지가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내가 있을수 있었을가? 비록 아버지때문에 마음고생은 저그만치 20년동안 했지만 결과적으로 잘되여가니 옛날의 그 불유괘한 기억들은 저도 모르게 봄눈 녹듯 녹아가는것이다.아마도 친혈륙간은 이렇듯 마음의 응어리도 자연스럽게 풀어질수 있는가 본다.


그날 우리는 옛 고향마을에 살고있는 막내삼촌집에도 들려 뒤늦게야 귀로에 올랐다.

편집/기자: [ 감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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