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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사서 쿵푸(功夫)를 배운 신라 승려 [제23편]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6.09.08일 09:05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 입구의 거석에 있는 입상(立像)은 검을 추켜든 무승(武僧)이었다. 그래서 사찰이라기보다 홀제 어느 무술 도장에 들어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소림사(少林寺) 하면 너도나도 눈앞에 떠올리는 것은 다름 아닌 쿵푸이다. 쿵푸는 '숙달된 기술'을 이르는 말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무술(武術)을 뜻한다. 소림사는 1982년 무협영화 '소림사'가 상영되면서 더구나 쿵푸와 한데 이어져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때 이름이 났지만 사찰에 들어가는 길은 그냥 먼지가 날리는 흙길이었지요." 왕씨 성의 가이드의 말이다.

  매표구의 근처에는 왕씨 같은 가이드 여럿이 대기하고 있었고, 여기저기에 관광객이 웅기중기 모여서 시끌벅적했다. 아스팔트를 따라 골짜기에 늘어선 호화스런 건물은 그제 날의 기억을 말끔히 지우고 있는 듯 했다. 왕씨는 사찰에 이처럼 늘 관광객이 몰리면서 종종 하루에 안내를 두세 번 맡는다고 말한다.

  보아하니 사찰은 도장이라기보다 관광명소가 되고 있는 것 같았다. 승려들의 선경(禪景)은 여행객들의 선경(仙境)으로 탈바꿈한 것.

매표구 앞에 있는 검을 잡고 자세를 취한 무인 조각물.

  소림사는 하남성(河南省) 등봉(登封)에서 서북쪽으로 10여㎞ 상거한다. 695년, 무측천(武則天)이 신하들을 데리고 등정하여 제천(祭天)의식을 가졌으며, 이에 따라 황제가 숭산(崇山)에 올라 봉선(封禪)을 했다는 의미로 연호를 '만세등봉(萬歲登封)'이라고 했다. 숭산 기슭의 숭산현이 등봉현으로 개명된 것은 이때부터라고 한다.

  갑자기 앞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길가의 넓은 마당에 무술 경기장이 만들어져 있었고, 도복을 입은 수련자들이 경기장 주위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왕씨에 따르면 사찰 주변의 무술학교 수련자들이 이곳에서 자주 무술경합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소림사의 유명세를 타고 부근에는 무술학교가 우후죽순처럼 일떠서고 있었다. 등봉에는 수련자가 만 명 단위인 무술학교만 해도 2개, 기타의 크고 작은 무술학교는 세 자리 수로 헤아린다고 한다.

  실제로 소림사가 세상에 이름을 알린 것은 바로 승복을 입은 무인들 때문이다. 수(隋)나라 말년, 천하가 크게 혼란했다. 당시의 소림사 주지는 대세를 파악하고 이씨(李氏)의 당조(唐朝)가 천하를 통일하게 될 것을 예견했다. 그래서 소림사의 무승(武僧)을 인솔하여 근처의 성을 빼앗아 이씨의 당군(唐軍)에 귀순했다. 이 일화가 '열세 명의 승려가 당왕(唐王)을 구한 이야기'로 후세에 전했으며 한때 대륙에서 흥행한 무협영화 '소림사'를 만들게 된 것이다.

  왕씨는 소림사가 무술과 인연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사찰은 골짜기에 깊숙이 들어와 있어요. 산에 출몰하는 맹수를 대처하려면 자위용으로 쿵푸를 익혀야 하겠죠?"

  소림사는 또 개봉(開封)에서 낙양(洛陽)에 통하는 길목의 산속에 위치한다. 어느 조대든지 눈독을 들이는 군사 요충지였으며 전란을 비켜갈 수 없었다. 이에 따라 현지에서는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무술을 수련하는 게 풍속으로 되고 있었다.

  "난세의 많은 장령들이 패전한 후 출가하여 산에 숨었지요." 왕씨는 소림사의 무술이 남달리 발전할 수 있게 된 원인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었다.

관객으로 붐비는 소림사 사찰입구.

  무술은 고대 전쟁에서 전승된 예술로서 전쟁의 기술이다. 호반(虎班) 무(武) 자체가 바로 창을 들고 달리는 모습을 나타낸 것. 소림사는 종국적으로 이 전쟁의 기술을 선(禪)의 수행으로 개발, 발전시킨 것이다. 선의 수행은 "행(行), 주(住), 좌(坐), 와(臥)" 등 방식으로 나뉘는데, 무술의 수련 즉 무선(武禪)은 그 중의 '행선(行禪)'으로 된다.

  그렇다고 해서 신라의 불자 혜소(慧昭)가 무술에 혹해서 소림사를 찾은 건 아니다. 혜소는 일부러 소림사에 와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고 전한다. 구족계는 출가한 사람이 정식 승려가 될 때 받는 계율이다.

  혜소는 천 년 전의 금마(金馬,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사람으로 속성이 최씨이다. 그는 31세의 나이에 출가했는데, 당나라에 유학하여 먼저 북쪽의 창주(滄州)에서 남종선(南宗禪)의 유명한 선사(禪師)인 신감(神鑑) 대사를 만나 계를 받았다고 한다. 대륙 오지의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가서 수련을 하기도 했다.

  혜소가 하필이면 소림사를 선택하여 구족계를 받은 이유를 밝히기는 어렵지 않다. 소림사는 당시 대륙에서 불학의 중심으로 되고 있었다.

  북위(北魏) 태화(太和) 19년(495), 효문제가 그의 숭앙하는 인도 고승 발타(跋陀)를 안치하기 위해 낙양에서 마주 보이는 숭산 소실산(少室山)의 북쪽 기슭에 사찰을 세웠다. 소림사는 소실산의 무성한 죽림에 에둘려 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때 인도 고승 달마(達摩)가 중원에 도착, 소림사에서 전법(傳法)하면서 처음 마음으로 마음을 인가하는 '이심인심(以心印心)'의 선종 교법을 창도했다. 달마가 창립한 선종 교파는 중국 불교의 최대 종파로 흥성했다. 이로써 소림사는 선종 조정(祖庭)의 숭고한 지위를 확립했다.

  "소림사는 대륙에서 선종 교파의 메카로 된 겁니다." 왕씨가 자랑스레 하는 말이다.

  정말로 '메카'라는 왕씨의 말이 실감났다. 승복을 입은 길손 가운데는 다른 대륙의 백인과 흑인도 나타나고 있었다. 그보다 방방곡곡의 각양각색 관광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소림사는 2천년 무렵부터 급속하게 세속화되면서 상업적으로 전례 없이 흥성했다. 소림사의 입장권 수입만 해도 3억 위안이나 되는 등 각종 이권의 '삼국' 분쟁은 한때 세간의 열띤 화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일행의 입에 오르내린 이야기는 그게 아니었다. "혜소도 자의든 타의든 무술을 수련했겠죠? 소림사에 여러 해나 머물러 있었는데요."

  소림사에서 여러 해나 머물렀던 혜소가 여느 승려처럼 무선(武禪)을 했을 수 있다. 아쉽게도 혜소의 무술의 '쿵푸'가 어느 경지인지는 알 수 없다. 옛 문헌은 혜소가 배워서 반도에 전한 '쿵푸'를 범패(梵唄)의 음곡(音曲)과 창법(唱法)으로 기록하고 있다. 무림(武林)이 아닌 범패의 종장(宗匠)으로 된 것이다. 참고로 범패는 절에서 재를 올릴 때 부르는 불교음악이다. 인도의 소리라는 뜻으로 범음(梵音) 또는 어산(魚山)이라고 한다.

  "혜소는 소림사와 불연(佛緣)을 맺은 스님인데요, 왜서 무술 이야기는 하나도 없죠?"

소림사 고승들의 안식처인 탑림, 역시 관광객이 수풀을 이룬다.

  미상불 범패의 소리가 하도 높아서 무술의 기예를 가려버렸을까… 어디에 있을지 모를 대답을 얻고자 왕씨를 부지런히 쫓아 다녔다. 소림사의 대웅보전에 들려 향불을 피웠고 또 고승들의 안식처인 탑림(塔林)을 지나 오유봉(五乳峰) 기슭의 초조암(初祖庵)에 이르렀다.

  초조암은 달마가 전법하던 곳에 세운 암자이다. 왕씨의 안내는 거기서 끝났다. 암자의 뒤로 산길이 나타났고, 그 산길의 끝머리에 달마가 면벽, 좌선하던 동굴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동굴은 거리가 너무 멀다고 해서 안내코스에 빠져있었다.

  뒷이야기이지만, 가파른 산길은 왕복 2시간 정도 걸렸다. 길이 멀고 험해서 웬만한 사람은 손을 들고 나앉을 법 했다. 그러나 예전에 선종의 이 '메카'를 일부러 찾았던 허씨 성의 친구가 도중에 발길을 돌린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고 한다.

  "비가 온 뒤였는데요, 흙탕길을 오르다가 신발창이 다 떨어져서 기권을 했지요."

  지난 세기 90년대까지 오유봉의 산길에서 심심찮게 생기던 일이라고 한다. 지금은 산길에 돈으로 돌을 깔아서 그런 일은 옛말로 되고 있었다. 산속에 우거진 숲속으로 길이 숨바꼭질하듯 숨고 있었고,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마치 땅속에서 솟아나듯 문득문득 숲속의 어디선가 샘물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보일듯 말듯한 산길을 내리는 관객, 산길의 끝머리에 달마가 수련하던 동굴이 있다.

  달마는 바로 이 산꼭대기의 동굴에서 무려 9년 동안 면벽, 수련을 했다고 전한다. 달마로부터 시작된 중국의 선은 6조(六祖) 혜능(慧能)에 이르러 비로소 '선의 중국화(中國化)' 즉 인도의 것에서 떠나 중국의 성격에 맞는 불교를 이룬다.

  혜능이 단순히 선종의 법통을 이어받는데 그치지 않고 변혁을 시도했다고 한다면 혜소는 귀국한 후 화엄경의 유포를 중심으로 이뤄지던 화엄종의 방식과는 달리 범패를 통해 선(禪)의 사상을 확대한다. 그는 850년 나이 76세에 입적하며 헌강왕(憲康王) 때 그를 진감(眞鑑)이라고 시호하고 비를 세우는데 비문에 이르기를, "(혜소는) 범패를 잘하여 그 소리가 금옥 같았다… (그 소리가) 멀리까지 전해지니 신라에서 어산(魚山)의 묘음을 익히려는 사람들이 다투어 옥천에서 남긴 음향을 본뜨려고 하니, 어찌 소리로써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겠는가?" 혜소를 이어 신라의 선사들이 범패를 수행의 한 방법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백의민족의 정서에 어울리는 이 범패는 훗날 가곡, 판소리와 함께 한국 3대 전통 성악의 하나로 된다.

  혜소가 반도에 가져간 '쿵푸'는 음악의 범패만 아니었다. 그는 대가람(大伽藍)을 중창한 후 중국에서 차나무의 씨앗을 가져다가 사찰의 주위에 심었다. 이 가람은 훗날 쌍계사(雙磎寺)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는데, 바로 의상(義湘) 대사의 제자인 삼법(三法)이 지리산에 창건했다고 하는 옥천사(玉泉寺)이다.

  옥천사는 불교사(佛敎史)의 천년의 미스터리가 깃든 사찰이다. 혜소가 이 사찰을 선택, 중창한 이유가 아닐지 한다. 여기서 이야기는 다시 6조 혜능에게 돌아간다. 삼법은 당나라에서 구법을 하던 도중 "혜능의 머리를 모셔다가 삼신산(三神山)의 눈 쌓인 계곡 위의 꽃이 피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삼법은 홍주(洪州) 즉 지금의 남창(南昌) 개원사(開元寺)에서 남종(南宗) 선법을 배우고 있던 신라승려 김대비(金大悲)와 모의하고 중국인 역사(力士) 장정만(張淨滿)을 시켜 혜능의 머리를 탈취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삼법은 그날 밤으로 김대비와 더불어 낮에는 숨고 밤에는 길을 재촉하여 반도에 도착, 지금의 지리산 쌍계사 금당(金堂) 자리에 이른 후 꿈에 본 자리임을 깨닫고 혜능의 머리를 봉안하며 사찰 이름을 옥천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중국 옛 문헌에 나타나는 '장정만의 난'은 개원(開元) 23년(722)에 일어나며, 옥천사의 창건은 신라 성덕왕(聖德王) 23년(723)년이다. 사찰을 창건하는데 걸리는 시간 등을 고려할 때 '혜능 정상(頂相)의 해동 봉안설'은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 어찌됐거나 혜능의 초상화를 안치한 7층의 육조 정상탑은 쌍계사의 상징물로 되고 있다.

  그런데 혜능의 진신(眞身)은 대륙 남쪽의 광동성(廣東省) 남화사(南華寺)에 공양되고 있는 현 주소이다. 이에 따라 쌍계사에 세워진 혜능 정상탑은 전설과 더불어 지리산에 커다란 물음부호를 만들고 있다.

  산길에 문득 패루가 나타났다. 뒤미처 비탈의 동굴이 보였다. 달마가 면벽, 수련하던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한다. 그가 선정(禪定)에 든 후 새가 어깨에 내려앉아 둥지를 틀려 했다는 일화는 항간에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동굴의 벽에는 사람의 형상이 비껴 있는데, 달마가 오랫동안 면벽하면서 그 형상이 그대로 사진처럼 찍힌 것이라고 전한다.

산정 부분에 있는 달마동, 수련하는 스님은 여기에 더는 없다.

  동굴의 어귀에는 승려 대신 웬 장사꾼이 좌판을 벌이고 물을 팔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한여름의 땡볕에 목구멍이 막 타들어가고 있었다. 물 한 병을 사들고 돌 걸상에 앉는데, 금세 땀이 흥건히 흘러내려 걸상에 지도 한 장을 그린다.

  "거기까지 힘들게 올라가선 뭘 해요?" 하던 왕씨의 방금 전의 물음이 떠올랐다. 허위허위 산을 톺아 오른 이유를 드디어 밝힐 수 있을 것 같다. 찾고자 하던 답은 원래 거기에 있었다. 장장 9년이나 면벽한 '쿵푸'라면 정말로 그림자라도 바위에 그림으로 새겨질 수 있지 않았을까…"거짓을 전설로 만들겠어요?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라면 전설이 아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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