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옛집을 농촌아이들 독서열람실로 기증
25일, 말기담낭암으로 생이 며칠 남지 않은 80세의 안휘성 태화현 전임 정법위원회 부서기 묘위민은 병실에서 겨우 필을 들어 안휘성적십자회 유체기관기증승락서에 서명했다고 신화넷이 신안매체넷을 인용해 26일 보도했다.
《나는 최후의 ‘특수’당비로 유체기관을 기증해 다른 환자들에게 쓰이도록 한다》.
38년 당령의 로공산당원 묘위민은 생명의 마지막에 실제행동으로 공산당원의 고상한 품격을 보여주었다.
병마와 박투하며 《사망일기》 써
묘위민의 병실 침대머리맡에는 검은색의 필기책이 있는데 병마와 싸우던 전 과정이 기록돼 있다. 그의 《사망일기》에는 그의 견강하고 활달하며 생명에 대한 리해가 깃들어 있다.
지난해 9월, 묘위민은 흉부가 아파 병원에 가 검사를 했는데 의사가 묘위민의 아들에게 아버지가 담낭암에 걸렸다며 수술하지 않으면 십여일밖에 살수 없다고 했다. 아들은 아버지가 절망할가봐 담낭암이라는 소리는 못하고 담낭염이라고 말했다.
일주일전 묘위민이 식사를 전혀 하지 못하며 병이 악화되기 시작하자 보다못해 마누라가 실제병세를 알려주었다.
《암이라는것을 아니 도리여 마음이 평온하다. 사람마다 생사의 규률은 벗어나지 못하니 유쾌하게 죽자…》
3월 17일에 쓴 일기였다. 그날 그는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
이튿날 일어난 그는 후사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 유체기관 기증
일주일전 자기가 말기암이라는 소식을 들은 묘위민은 마누라와 자식들 앞에서 자기의 유체기관을 특수당비로 기증하련다고 밝혔다. 마누라와 자식들은 강경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가족들의 반대는 58년간 당과 국가를 위해 일해왔고 38년의 당령을 갖고있는 로인의 마음을 돌려놓을수 없었다. 로인은 유서를 써 자기가 죽은후 유체기관을 기증한다고 밝힘으로써 자식들이 간섭하지 못하게 했다.
25일 태화현인민병원 간담과 주임의사 장신아가 안휘성적십자사의 유체기관기증승락서를 로인에게 건넸다. 로인은 자세히 열독한수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서명했다.
《어르신의 정신에 감복했다. 어르신은 태화현의 첫 유체기관 기증 신청자이다》고 장신아는 말한다.
검사결과 로인의 눈 각막은 완전하고 량호했는바 앞으로 눈장애환자에게 광명을 줄수 있다.
되돌아보는 인생
림종을 앞두고 병실에 누워 그는 자기의 평생을 되돌아보았다. 1932년 태화현 소채촌에서 태여난 묘위민은 부친이 글방을 한 덕에 글공부를 할수 있었다. 새 중국 설립후 그는 성내 사범학교에 입학, 졸업후 안휘성교육청에 배치됐고 1956년 중국인민대학 법률학부에 입학, 졸업후 인대에 배치돼 법률교원으로 근무했다.
1960년대 엄중한 자연재해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밥을 배불리 먹지 못하고 학교에 갈수 없게 됐다. 이미 한마을 처녀와 결혼했던 묘위민은 북경 인대사업을 포기하고 고향에 돌아와 부모와 안해 자식들을 돌보며 고향의 교육사업을 지지하기로 했다.
태화현에 돌아온 묘위민은 고중교원으로 근무했다. 1982년 안휘성에서 변호사제도가 회복되자 그는 시험을 쳐 안위성 첫 변호사자격증을 탔고 그로부터 선후하여 태화현 사법국과 정법위원회에서 사업하게 됐다. 퇴직할 때 그는 태화현정법위원회 부서기였다.
1994년 퇴직후 묘위민은 변호사로 일했고 지난 18년간 무료로 200여건의 사건을 조해했다.
현정법위원회 부서기 재직시 그는 자식들을 위해 권력을 쓰지 않았는바 자식들은 모두 자체로 직업을 찾았고 작은 딸은 지금까지 실업자로 있다.
고향집을 농촌아이들 독서열람실로 기증
25일 로인은 자식들에게 후사를 교대했다.
《나는 너희들에게 물려줄것이 없다. 고향의 옛집은 촌에 기증해 촌의 아이들이 도서열람실로 쓰게 하고 일부 저금으로 촌의 아이들에게 책을 사주련다.》
일주일전 자기가 말기암이며 며칠 남지 않았다는것을 알게 된 로인은 가족과 의사들 몰래 작은 아들보고 자기를 농촌에 있는 고향 옛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고향의 일초일목과 이웃간의 정을 본 로인을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농촌아이들이 과외로 책읽을 곳이 없는것을 보고 가슴아프게 여긴 로인은 마누라와 의론하고 고향 농촌에 있는 집(정원 포함)을 촌에 기증해 촌아이들의 도서열람실로 쓰게 하고 또 돈을 내여 과외도서들을 구입해 고향 농촌아이들이 열독하게 하기로 했다.
《내 평생 가르친 학생이 7000명이 넘는다. 그들은 지금 모두가 국가의 유용한 재목으로 되였다》. 묘위민은 자기인생의 가장 큰 재부는 문하생이 만천하에 있는것이라며 자기의 념원이 이제 실현되게 됐으니 마음놓고 이 세상을 떠날수 있을것 같다고 말했다.
편집/기자: [ 김정애 ] 원고래원: [ 신화사]
고인의 명복을 빌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