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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출한 초기 공산주의 리더 리동휘

[조글로미디어] | 발행시간: 2013.04.07일 08:45
인물이름 : 리동휘

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 백인》(5)

성재 리동휘선생

리동휘선생은 조선 함경남도 단천(端川)에서 태여났고 호는 성재(誠齋)이다. 선생의 아버지 리승교(李承橋)는 연해주 대한인로인단의 대표로 3•1 만세시위에 참여하는 등 항일민족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인물이다. 선생이 부친의 애국정신을 이어받아 평생을 공산주의운동에 투신할수있었던 것은 이러한 집안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의 소개로 18세 때 단천군수의 통인(通人)이 된 선생은 1895년에 한성무관학교(漢城武官學校)에 입학하여 신식무관교육을 받고 강화진위대장으로 근무하였다. 선생은 1907년 일제의 구한국군 군대 강제해산에 분개하여 강화진위대 동지들과 항일의병봉기에 나섰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여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1905년 을사륵약(乙巳勒約)을 전후하여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는데 그 방편으로 기독교를 수용하고 특히 구국교육활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에 강화와 평양 등지에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세우고 국학 및 근대학문과 군사교육을 병행하여 구국인재양성의 요람으로 활성화시켰다. 또한 1908년에는 서북학회를 창립하는 한편 리동녕(李東寧),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신민회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에 의해 조작된 105인 사건에 련루되여 또다시 투옥되였다.

1911(또는1912) 년 리동휘선생은 가족과 함께 중국 동북지방 북간도로 망명했다. 여기에서 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의 결성(1912), 라자구무관학교(羅子溝武官學校)의 설립(1914)에 참가했다가 일본관헌의 추적을 받고 마침내 1915(또는 1913)년 로씨야의 울라지보스또크로 옮겨갔다. 울라지보스또크에서 권업회(勸業會) 활동에 참가한 그는 일본측 모함으로 제정 로씨야로부터 독일의 간첩으로 몰려 한때 체포되였으나 로씨야 혁명후 석방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의 포화가 세계를 뒤덮고있던 20세기초, 인류사상 가장 큰 획기적인 사변이 일어났다. 1917년 부패한 짜리 로씨야에서 사회주의 10월혁명이 일어나 첫 무산계급 독재정권을 수립하였다. 10월혁명의 승리는 각국 무산계급 투쟁을 고무하여 주었고 세계 피압박 인민과 피압박 민족의 민족해방투쟁을 크게 고무해 주었다.

1919년부터 1922년 사이 제국주의 침략과 수탈에 허덕이던 아시아 민족해방운동도 고조되였다. 조선의 3.1운동, 중국의 5.4운동 그리고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각국의 민족해방운동은 전례없이 고조되였다. 하지만 각국의 비폭력적 해방운동은 세계 렬강의 비정한 외면과 제국주의, 봉건주의의 피비린 탄압을 받아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수많은 선각자들이 새로운 민족해방투쟁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부 의사들은 폭탄 투척을 감행하고 일부 의사들은 일제 괴수와 추종자들에 대한 암살을 목적으로 한 의렬투쟁을 전개하였다. 또 많은 사람들이 강대국에 환상을 품고 외교적인 노력을 하였고 더욱 많은 선각자들은 중국 동북에 군사기지를 세우고 무력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시기 로씨야 10월 혁명의 승리에 고무되여 아시아 각국에 맑스주의 리론이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조선의 진보적 인사들도 공산주의 리론을 접하고 또 이를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로씨야의 10월혁명 성공에 고무된 리동휘선생은 특히 일본의 씨비리아 출병문제와 관련하여 로씨야혁명에 대한 옹호와 협조가 곧 조선독립 달성의 길이라 생각하게 되였고, 1918년 김립(金立)• 류동렬(柳東說) 등 로씨야에 귀화하지 않은 조선인 및 김알렉산드라•오하묵(吳夏默) 등 귀화한 조선인들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조직했다.

1919년 상해에는 688명(조선인 총수) 우리 민족 선각자들이 맹활동하고있었다. 그들은 제각기 철혈단, 구국모험단, 애국부인회 등 수많은 단체들을 결성하여 반일투쟁의 길을 모색하고있었는데 그해 9월 조기 공산주의자 리동휘가 상해에 도착했다.

상해에 도착한후 리동휘는 상해림시정부 수립을 준비하는 한편 공산주의활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1920년 5월 그는 상해에 있던 려운형(吕运亨)과 손잡고 공산주의소조를 건립하고 1921년 1월에는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하고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선거된다. 그리고 려운형과 김립(金立), 안병찬(安秉瓒) 등이 중앙위원으로 당선되였다. 그들은 상해에 《유신인쇄공장》을 세우고 맑스주의 저작을 번역, 출판하고 직접 진보적인 잡지도 꾸리면서 맑스-레닌주의를 적극 전파하였다.

한편 리동휘는 김하규 등을 연변에 파견하여 공산주의소조를 조직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 연변에 첫 맑스주의연구소조 광명회가 룡정의 대성중학교, 광흥중학교, 은진중학교 학생들속에 건립되였다. 조기 공산주의자들은 로농혁명의 길, 로씨야 혁명의 길을 선전함으로써 적지 않은 선진인물들이 협애한 민족주의 속박에서 벗어나 사회혁명을 지향하게 되였다.

민족주의사상에 제한되여있던 구춘선을 대표로 한 국민회의 많은 지도자들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지향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연변에는 1300여명 조선족이 조기 공산주의단체들에 가입하였다. 이사이 리동휘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당 제2차대표대회에 출석해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인 레닌을 만나 자금지원을 받기도 했다.

상해 림시정부 수립후 군무총장을 맡았던 리동휘는 1920년 국무총리로 나섰지만 좌우익간의 치렬한 대립에 커다란 실망을 느꼈다. 게다가 쏘련에서 보내온 지원금 40만루블을 둘러싸고 문제가 생겨 리동휘를 위수로 한 고려공산당은 상해림시정부에서 탈퇴하였다.

한편 리동휘를 중심으로 하는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1923년 동북의 녕고탑(寧古塔)에서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하는 적기단(赤旗團)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적기단은 《우리들은 민족혁명과 무산계급 공산혁명의 어느 것도 구애되지 않는다. 조선민족의 혁명이라면 추진하는 것이다, 돕는 것이다》라고 선언한 것과 같이 민족혁명과 공산혁명의 동시 수행을 표방한 무장투쟁단체였다.

이 선언에는 넓게는 상해파 고려공산당, 좁게는 리동휘의 혁명로선이 함축되여 있다고 할수있을 것이다. 적기단은 중국 동북지방의 몇곳에 무장단체를 가지고 있었고 이들 무장단체에는 리동휘의 영향아래 있는 무장군인들이 쏘련령 이만지방으로부터 옮겨와 배치되였다. 안도현 내두산에 있었던 150명과 액목지방에 있었던 200명의 무장부대가 그 대표적인 경우였으며 그중에서도 오성륜(吳成崙)부대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한다.

리동휘는 만년에 울라지보스또크에서 도서관장을 지냈다는 설도 있었으나 아들 리영일이 쓴 《리동휘전기》가 전해짐으로써 1927년 이후 그가 국제혁명자후원회(MOPR)에서 활동했음이 밝혀졌다.

《리동휘전기》에 의하면 1927년에100여명의 공산당원이 검거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울라지보스또크의 교포사회가 개최한 군중대회에서 리동휘는 《이 혁명운동의 전선에서 투쟁하는 전사는 되지 못해도 이 전선에서 용감히 투쟁하다가 희생된 세계 자본국가 감옥에서 고통받는 혁명자들을 위해 MOPR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려고 결심했다》고 연설한 후 울라지보스또크시의 MOPR 시간부 조직지도원이 되여 1929년까지 이 조직에서 활동했다.

이후 1930~35년에 그는 쏘련의 변강(邊疆) MOPR에서 간부로 활동했는데, 그 당시 원동(遠東) 변강의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도시나 농촌은 물론 어장, 탄광, 목재소 등에서까지도 MOPR의 회원이 되여 열성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리동휘선생은 1932년 10월 MOPR에서의 열성적 활동으로 훈장을 받기도 했다.

리동휘선생은 1935년 1월, 사업시찰중 심한 눈보라속에서 독감에 걸렸다. 울라지보스또크 신한촌(新韓村)의 자택으로 옮겨졌다가 1월 31일 세상을 하직하였다, 2월 4일 울라지보스또크 피르바 야레츠카 공동묘지에 안장되였다.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로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열성적이였으며, 뛰여난 풍모와 지도력을 갖춘 리동휘선생은 애국계몽운동과 민족해방운동에서 탁월한 기여를 한 초기 공산주의자였다.

길림신문 안상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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