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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백인25]중국조선족 걸출한 교육가-림민호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3.06.25일 16:05

항일구국운동의 선구자

림민호는 1904년 1월 3일 조선 함경북도 회령의 한 빈농가정에서 태여났다. 그 이듬해에 일가는 두만강을 건너 룡정에 이주, 후에 화룡현 동성촌 고성툰으로 옮겨갔다. 1919년 룡정의 3.13반일시위 운동에서 그는 비록 열다섯살에 나는 소년이였지만 친구와 둘이서 천주교 례배당 종루에 올라갔다가 우연히 3.13반일운동시작의 종소리를 울리게 되면서 민족독립운동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1928년 9월 중순, 림민호는 조직의 추천으로 모스크바동방대학에 가서 공부하였으며 1932년 5월 동방대학교에서의 4년간 학습생활을 끝마치고 9월 조선 함흥, 흥남 지역으로 파견되여 지하사업을 하다가 3월 28일 흥남에서 일본 헌병에 체포되여 6년 판결을 받고 서울 서대문감옥에 압송되였으며 감옥에서 감옥당국과 맞서 싸웠기에 1년 연기되여 7년 옥고를 치르게 되였다.

1940년 출옥한 림민호는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짓다가 1942년초, 돈화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1945년 일제가 무조건투항을 선포하여 광복을 맞이한 후 림민호는 돈화현 부현장으로 사업하였으며 1946년 10월 《연변일보》전신인 《길림일보》조선문판의 총편집으로 임명되였다.

조선족의 걸출한 교육가

림민호는 영용한 항일투사였을뿐만아니라 연변대학창립에도 탁월한 기여를 했다. 1948년초, 당시 연변전원공서 전원으로 있던 림춘추와 함께 길림성민족사업좌담회에 참석하여 연변에 민족대학을 꾸릴것을 제기, 그해 12월에 연변대학주비위원회가 성립되였는데 주비위원회 주임으로는 림춘추, 부주임으로는 림민호가 임명되였다. 구체사업은 림민호가 맡아했다. 그가 학교의 성질을 문과, 리공과, 의과, 농과를 망라한 민족대학으로 가꿔가면서 연변대학은 차차 종합성민족대학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림민호는 전국 각지에서 조선족 지식인들을 물색하여 손수 초빙장을 써서 그들에게 보내여 교원문제를 해결하였는데 가장 큰 곤난은 경비문제였다. 그때는 국내전쟁이 한창인 때여서 동북인민정부거나 길림성 정부에 손을 내밀 형편이 못되여 조선족 유지인사들과 함께 《연변대학리사회》를 건립하여 상점, 약방, 공장을 꾸려 갓 창설된 학교경비를 보탰으며 유지인사들을 동북 각지에 파견하여 조선족들에게서 의연금과 물자를 지원 받기로 하였다. 결과 동북 각지 조선족들이 쌀과 돈, 그리고 학교에 수요되는 많은 물품들을 무상으로 지원하였다.

당시 교실이 없어 공업학교를 빌어 쓰다가 1950년대초 지금의 연변대학 자리로 옮겨 올 때 그곳은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였으며 불에 타버린 일본관동군 병영이 벽체만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하에서 그는 친히 교직원과 학생들을 이끌고 불에 타버린 병영을 수리하여 교실로 쓰고 새로운 사무청사와 실험실을 설계하여 짓고 나무를 심었다.

림민호는 조선민족대학의 창립과 발전을 위하여 로심초사하고 피타는 노력을 기울여 당의 교육방 침을 관철집행하고 근검하게 학교를 꾸려 특색있는 민족대학의 교풍을 수립하고 교육과 교수개혁을 진행하여 연변대학의 창립과 발전에 마멸할수 없는 공적을 쌓았다. 그는 1950년 10월, 동북조선족을 대표하여 국경1주년 경축행사에 참가하여 모주석과 주덕의 접견을 받았다.



1950년 10월1일 국경기념일에 참가한 림민호(왼쪽 여덟번째)를 비롯한 조선민족대표들

림민호는 연변대학 초창기부터 시종 국내외교류와 합작에도 알힘을 넣었다. 그는 선후로 수많은 교원과 학생들을 조선의 김일성종합대학, 모스크바대학에 보내여 공부를 시키고 북경대학, 중국인민대학에 보내여 연수를 시켰다. 그리고 교류와 합작을 통하여 대학교경영의 보귀한 경험을 쌓았다. 그는 다년간의 대학교경영실천가운데서 우량한 건학전통을 개척하고 민족문화를 계승하고 문화의 융합과 창조로 연변대학의 귀중한 정신적자산을 마련하였다.

연변대학 김호웅교수는 림민호교장에 대해 《연변대학교 교장으로 20년 6개월, 그는 만인이 우러르는 고매한 인격과 탁월한 리더로 연변대학의 기틀을 잡았고 온갖 경제적위기와 정치적풍파를 이겨내고 연변대학을 살려내고 성장시켰으며 참된 교육가로서의 귀감을 보여주었다. 자유, 정의, 평화, 평등, 인간존엄성이라는 인류의 보편적이고 영원한 리상을 추구했고 연변대학의 민족적, 지역적 특성을 강조하되 중국의 주류문화, 조선과 쏘련의 교육문화를 융합하고 조화시키고 타민족의 형제자매들도 껴안음으로써 연변대학의 독자적인 힘을 키워냈다. 또한 대학교의 주체는 교수요, 대학교의 중심은 교학과 연구라는 확고한 신념아래 다양한 개성을 가진 교수들을 품어주고 그들이지혜와 창조력을 발휘하도록 해주었다.》 (《림민호평전》 제276페지)라고 평가했다.

림민호가 제정한 연변대학의 3대 사명은 인재의 양성, 진리의 탐구, 지역과 국가 건설을 위한 봉사였고 강의와 과학연구를 병행으로 교수의 질을 제고하는것이였다.

《대학은 인재를 양성하는 곳인 동시에 진리를 탐구하고 과학을 연구하는 곳이다. 인재를 키워야 과학연구를 할수있고 과학연구를 해야 좋은 강의를 할수있고 뛰여난 인재들을 키워낼수있다.》라고 생각한 림민호는 과학연구 각별한 관심을 돌렸다.



1950년 연길역에서 조선대표단을 영접하는 림민호(앞줄 오른쪽 첫번째)

시대의 평가

1966년에 일어난 중국의 《문화대혁명》에서 수많은 좋은 간부들이 박해를 받았다. 림민호도 례외가 아니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여 얼마되지 않아 홍위병들에게 《변절자》《주자파》(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로 몰리워 박해를 받았다. 림민호교장은 문화대혁명의 박해를 받아 1970년7월 14일 66세의 아까운 나이에 원한을 풀지 못한채 불행히 서거했다.

림민호가 세상뜬지 8년이 지난 1978년 7월 14일, 중공연변주위에서는 결정을 내려 그의 억울한 루명을 벗겨주고 명예를 회복하여 주었으며 추도회와 유해이장식을 거행하였다. 그의 골회는 가족의 요구에 따라 일부분이 연변대학정원에 뿌려졌고 나머지는 화룡현 동성향 고성촌 뒤산 림씨묘지에 안장되였다.

림민호 프로필:

1904년 조선 함격북도 회령군 태생.

1920년대 혁명에 참가.

1926년 중국공산당 동만구역위원회 청년부장.

1928년 9월 조직의 파견을 받고 모스크바동방로동대학에 입학, 1932년 5월 졸업.

1933년 일본경찰에 체포, 서울 서대문감옥에 수감.항일전쟁 승리후 돈화현 부현장, 《길림일보》 부총편집, 《연변일보》 총편집 력임.

1948년 12월 연변대학주비위원회 부주임, 연변대학의 주요한 창시인의 한사람으로 됨.

1949년 3월 연변대학 설립이후 제1임 부교장 겸 당지부서기, 개교후 20여년간 그는 전교와 일상사업을 주관함.

문화대학명기간에 피해를 받아 1971년에 서거함.


참고문헌:

《연변대학 산책》 류연산 저 민족출판사

《교육가 림민호 평전》 김호웅 저

《림민호 교장선생님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주청룡 저

편집/기자: [ 김영화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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