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우 칼럼
비가 며칠 내리더니 다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네요. 아주 덥습니다. 아침에 베란다에 나가 차를 한 잔 마시다 보니 요 사이 1층 아파트 정원에 잡초가 훌쩍 자란 모습이 눈에 보이더군요. 아마도 비가 오면서 이 놈들이 힘차게 기운을 받아 솟아 오른 듯 합니다. 저희 집 아래에는 세 집의 정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오른 쪽 집의 정원은 아예 잡초로 범벅이 되어 버렸고, 바로 아랫 집에는 꾸준히 관리를 해서인지 중간 중간에 잡초가 더러 있지만 아직은 보기가 좋습니다. 왼쪽 집에는 아예 맨땅이 많더군요.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문득 "사람 사는 세상"이 생각 났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세상, 인간의 삶에도 이런 유형의 잡초가 자라고, 뽑히고, 다시 비를 맞으며 또 자라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 입니다.
아무리 훌륭하게 가꾸어 놓은 잔디라도, 아무리 "마스터스"가 개최되는 "오거스타" 골프장도 잡초는 있을 겁니다. 잡초가 한 개도 없는 푸른 초장은 없습니다. 잡초는 이런 끈질긴 생명을 유지하며 들판에 언덕에 이름 모를 구석진 골목에서 살아 갑니다. 물론, 잡초는 가능한 뽑아 주고 약을 뿌려서라도 다음에는 나지 않아야 하는 식물입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논과 밭에 제초제를 뿌립니다. 잡초가 자칫 농사를 망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잡초는 어떻게든지 자라 납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어느 작가의 말이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부분 죄보다는 그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고 비난하고 욕을 합니다. 당연히 죄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무조건 그 사람의 여러 변명을 무시하고 엎어 버립니다. 무슨 개 소리야!... 이런 겁니다. 할 말이 없는 겁니다. 어떤 이유도, 어떤 상황적 논리도 그런 6월 장대비 같이 쏟아지는 여론에는 꿈쩍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겁니다. 그래서 사람 사는 사회에는 최소의 장치로 법이 만들어지고 법원이 생기고 죄인을 처벌하는 사람과 변호하는 사람 그리고 중간에서 최종 판결하는 사람을 만든 겁니다. 최후의 처벌과 구제가 이 법정에서 일어 납니다.
어느 드라마의 한 대목을 보니, 어느 유괴범이 이런 절규에 가까운 변명을 합니다. "왜 유괴를 했나? 돈이 필요 했다. 아니, 돈이 필요 하다고 어린이를 유괴하나? 처음부터 살해할 목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왜 죽였나? 내가 죽인 것이 아니다. 그 애가 도망 가다가 언덕에서 넘어져 죽은 것이다. 진짜다. 나를 믿어 달라..... " 세상 논리로 보면 이런 범인의 변명은 가당치도 않은 말입니다. 그저 죽일 놈이 되는 겁니다. 유괴를 했으니 애가 도망 간 것이고 그러다 죽었으니 그 모든 원인은 당신에게 있다고 하면, 사실 할 말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왜 돈이 필요했나?"고 물어 보니 "자기 딸 아이가 심장병으로 하루 하루 죽어 가는데 수술 할 돈이 없어서...." "그 애를 무기력하게 쳐다 보아야 하는 애비의 심정을 당신은 이해 할 수있느냐?"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시청자도 잠깐 속을(?) 수 있습니다. 속는다는 것은 잠시 인간적인 연민도 든다는 뜻입니다. 이유야 어떻든, 이 대목에서는 같은 애비로서, 같은 부모로서 잠시 동정심이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법적인 잣대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중형이 선고 되는 겁니다. 법적인 논리로 보면 그 사람의 변명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늘 그렇듯이 누구에게나 잡초라는 생물이 자라고 있는지 모릅니다. 내심에 아무런 잡초가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악한 마음, 누군가를 원망하는 마음, 증오와 저주, 슬픔과 한탄, 비탄과 쓰라린 눈물..... 아마도 이런 모두가 인생의 잡초일 겁니다. 아무리 관리를 잘 하고, 인격 수양을 하고, 여름 휴가 철에 절에 들어가 참선의 도를 닦아도 잘 없어지질 않습니다. 깊은 산 속에 들어가 도를 닦는 스님도, 수도원의 수도자라고 잡초가 없을까요? 있습니다. 있는 것이 당연 할 겁니다. 다만, 이런 악한 잡초가 마음에서 밖으로 삐져 나오는 원인은, 그래서 악한 범행을 저지르는 원인은 그 사람이 처한 악한 상황이 원인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사람이 원래 악하고 추하고 짐승 같아서 그랬다고 하는 것이 전부는 아닐 겁니다. 우리는 아직도 성악설 보다는 성선설을 믿는 부류입니다. 인간을 둘러싼 상황이 악한 겁니다. 아무리 잡초를 뽑으려 해도 악한 상황이 자꾸 그 사람을 그 쪽으로 몰아 가는 겁니다. 인간은 어떤 믿음과 종교적인 신앙이 없다면 결국은 유혹과 악마의 손에 넘어 가는 연약한 동물입니다. 이길 재간이 없습니다.
아침에 아파트 정원의 잡초를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났습니다. 잡초가 싫다고 왼쪽 집처럼 아예 맨땅을 만들어 버리니 보기가 아주 싫고, 오른 쪽 정원처럼 잡초를 마냥 방치하니 정원이 아닌 잡숲이 되어 버리고, 바로 아래 집처럼 적당히 관리를 해 주니 보기가 좋더군요. 결국 인간의 악한 행동은, 그 악한 행동을 한 사람이 본질적으로 나빠서가 아니라 그 삶의 주변 환경, 내적인 환경이 자꾸 악한 상황으로 변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는 시조가 있기도 합니다. 고명한 학식의 학자가 어느 날 정치 판에 뛰어들었다가 패가 망신을 한 경우는 흔히 보는 현상입니다. 그 학자가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아닐 겁니다. 잡초가 무성한 곳에 잔디 한 조각이 들어 간 겁니다. 견디기 힘들어 집니다. 금방 잡초가 되는 겁니다.
혹시 아침에 마음 속에서 잡초가 몇 개 자라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지요? "이 놈을 한 번은 꼭 손을 봐야 하는데... 이 자식은 사사건건 말썽을 부리는데 아예 정리를 해야 하나..." 이런 것이 다 잡초의 일종일 겁니다. 그러나 잡초를 뽑다가 옆에 묻어서 잘 자라는 순수한 잔디 마저 떨어져 나갈 수가 있을 겁니다. 일단은 왜 잡초가 자라는지 그 상황을 잘 살펴 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해 보면서 늦게 보내 드리는 89회 한양 통신을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