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배달 온 설치기사에 “내 머리 위쪽 벽에 달아달라” 요구
“에어컨 주문하신 분이오?”
13일 오전 9시30분 서울 강서경찰서 형사팀. 전자제품 판매점 에어컨 설치기사 정모씨(40)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정씨의 외침은 공허했다. 누가 에어컨을 주문했는지 묻는 정씨가 얻을 수 있는 답은 “여기로 주문한 것 맞느냐”는 말뿐이었다. 전력난 때문에 경찰서 등의 공공기관에는 에어컨을 가동하지도 않는 상황이었다.
정씨는 어쩔 수 없이 주문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경찰서 구석에서 전화벨이 울렸고, 한 남성이 수갑을 찬 채로 정씨의 전화를 받았다. 폭행 혐의로 조사를 받던 이모씨(32)였다. 이씨는 수갑을 찬 손으로 자신의 머리 위 벽을 가리키며 “날이 더우니 여기에 달아달라”고 말했다. 정씨와 경찰은 모두 헛웃음을 지었다.
정씨는 지난 11일 이씨로부터 에어컨 설치 예약을 받았다. 폭염 탓에 예약이 밀려 있어 설치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날이 13일이었다. 이날 오전 정씨의 전화를 받은 이씨는 강서구 화곡동 자신의 집으로 에어컨을 보내달라고 했다. 오전 9시에 정씨가 이씨의 집에 도착했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이씨는 “경찰서로 오라”고 했다. 정씨는 그때까지 이씨의 직업이 경찰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경찰서를 나온 뒤 이씨에게 다시 전화가 왔지만 정씨는 받지 않았다. 정씨는 “날이 더워지니 일이 많아 좋지만 이런 황당한 일도 다 겪는다”고 했다. 이씨의 에어컨 설치 예약은 이날 오전 11시42분 접수 취소됐다.
<정대연 기자 hoan@kyunghyang.com>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