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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해동지를 심심히 그리며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4.04일 11:42
주덕해동지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조기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일찍 조선족을 대표하여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기 전체회의와 중화인민공화국 개국경축행사에도 참석한적이 있다. 주덕해동지는 일찍 길림성 부성장, 중국공산당 8기 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였으며 제3기 전국인대 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 등으로 당선되였었다. 주덕해동지는 중국인민의 해방사업을 위해, 우리 나라 민족단합을 강화하기 위해, 길림성 특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 건설과 발전을 위해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

자치구 창립 민족구역자치 실시

1952년 9월 3일, 연변인민들은 민족구역자치의 력사의 장을 열었다.

자치구 창립전야 즉 1952년 7월 24일 중앙혁명로근거지 방문단일행 50명이 연변을 방문, 연길시 여러 민족 각계의 3만여명은 중앙방문단의 방문을 성황리에 맞이하였다. 방문단 단장 팽택민은 대회에서 모주석과 중앙인민정부의 위문편지를 선독하였다. 중공연변지위 서기 주덕해동지가 연변의 여러 민족 인민들을 대표하여 모주석이 제자를 쓴 《중화인민공화국 여러 민족은 단합하자》라는 축기를 받았다. 연변인민들은 자신들이 직접 두손으로 만든 선물을 중앙방문단에 넘겨주고 모주석께 보내드렸다.

1952년 8월 29일부터 9월 2일까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구 제1기인민대표대회가 연길시에서 소집되였다. 회의에서는 연변조선족자치구인민정부 위원 35명을 선출하고 주덕해동지를 자치구인민정부 주석으로 선거하였다. 아울러 9월 3일을 자치구창립기념일로 정하였다.

9월 3일은 연변사상 잊을수 없는 하루였다. 이날 연길시 거리거리마다 명절의 꽃단장을 하였다. 연길시인민광장에는 3만여명 군중들이 모였다. 사람들은 산뜻한 민족복장을 곱게 차려입고 손에 생화를 들고 채색기발과 프랑카드를 높이 들고 연변조선족자치구 창립을 열렬히 경축하였다. 이 중요한 력사적순간을 회상할 때마다 나는 벅찬 기쁨을 감출수 없다. 그것은 이번 성대한 대회는 나와 민정처의 동지들이 주덕해서기의 령도밑에 몇달간의 빈틈없는 준비작업을 통해 대표인수배분, 대표선거 및 회장에서 회의절차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배치하였기때문이다.

이기간 나는 주덕해동지와 보다 잦은 만남의 기회가 있었던것이다.

민족단합 강화 경제와 사회발전 추진

1952년 10월, 자치구 주석 주덕해, 부주석 동옥곤 등 지도자들은 내가 민정처를 대표하여 제기한 대중성민족단합운동을 대폭 전개하고 민족단합모범대표대회를 소집할데 대한 건의를 비준하였다.회의에 참석한 여러 민족 대표는 도합 366명, 362명의 대표가 렬석하였다. 대회는 하급에서 상급에 이르기까지의 민족단합모범대회를 소집한 토대에서 열렸다. 기층에서 온 대표들이 전형발언을 하고 경험을 교류하면서 민족단합사업의 발전을 위해 튼튼한 토대를 닦아놓았다.

주덕해주석은 제2차 대표대회에서 《국내외형세 및 민족단합 강화에 관하여》란 보고를 하여 대회에 참석한 대표들이 큰 고무를 받고 조국의 사회주의건설에서 민족단합을 강화하는 중요한 의의를 깊이 알게 되였다.

주덕해동지가 창설한 민족단합모범대회는 연변에서 이미 제도로 되여 대체적으로 5년에 한번씩 소집된다. 연변은 1994년, 1999년, 2005년에 걸쳐 선후하여 3차례 국무원으로부터 전국의 유일한 민족단합진보모범자치주》로 명명받으면서 민족단합진보사업이 줄곧 전국 여러 소수민족자치지방의 선두를 달리게 되였다.

전국소수민족참관단 접대사업 역시 민족단합을 강화하는 중요구성부분이였다. 제1기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위원 반찬에르데니 췌지젠짠을 부단장으로 하는 서장참관단 일행 200여명이 중공중앙 통전부 부부장 류격평의 안내하에 연변을 참관방문하였다. 참관단성원속에는 달레와 반찬의 경서스승, 활불이 들어있었고 행정장관 아페 아왕직메 등 상층인사들도 들어있었다.

주당위 서기 주덕해동지는 접대사업에 각별한 중시를 돌리고 나에게 숙박과 음식 등을 잘 배치하라고 지시하였다. 2월 18일, 주덕해서기는 주정부 회의실에서 참관단의 모든 성원들을 회견하고 이들에게 연변조선족자치주 개황을 소개하고나서 이들을 안내하여 연변대학, 연변의학원, 연변1중, 연변농업기계공장 등 단위를 참관하였다. 저녁에는 성대한 환영연회를 마련하고 연변가무단의 민족가무공연 종목도 관람시켰다. 주덕해서기의 관심과 중시하에 우리 주의 접대사업은 참관단성원들과 류격평부부장의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민족간의 대단합을 증진하는데 적극적 역할을 발휘하였다.

주덕해서기는 소수민족을 각별히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1962년, 중앙당학교에서 학습할 때 그는 늘 신강반의 학생들과 접촉을 갖고 학습경험을 교류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중앙당학교 신강반 학습단과 기념촬영한 사진이 보관되여있다.

1964년 9월하순, 주덕해서기는 나에게 연변소수민족대표단을 인솔하여 건국 15돐 경축행사에 참석하라고 지시하였다. 10월 5일, 당과 국가 지도자들인 모택동, 류소기, 주덕, 주은래가 대표들을 회견하고 대표들과 기념촬영을 하였다. 이 사진은 지금도 나의 집에 걸려있으며 항상 소수민족에 대한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배려를 되새겨볼뿐더러 그때마다 주덕해서기를 더욱더 그리게 된다.

당과 국가 지도자들이 연변을 관심한 말이 나오면 주은래총리가 연변을 방문할 때의 모습이 생각난다. 주덕해서기는 기차역에 나와 주총리를 마중하여 호텔로 모셔갔고 그이를 안내하여 농기계공장을 시찰하였으며 또 연변대학, 연변의학원, 연변농학원을 시찰하였다. 그리고 연길시 신풍대대의 최죽송의 집을 찾아가 그에게 과학영농을 잘하라고 권장하고 최죽송일가와 기념사진도 남겼다. 연변에 머무는 이틀동안 주총리와 등영초는 호텔 복무원들 그리고 주급지도자 및 주덕해일가와 기념사진을 남겼다. 그 사진은 소중한 기념으로 오늘까지 간직되여있으며 연변인민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다.

10년 대혼란 주덕해 억울하게 서거

문화대혁명이 시작된후 연변의 각 대중소학교들이 분분히 문화대혁명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교원과 학생들은 지도자와 부분적 교원들에게 대자보를 써붙이면서 연변의 문화대혁명서막이 열렸다.

1966년 6월 12일, 중공연변주위에서는 문화대혁명지도소조를 설립하고 주덕해가 조장을 맡았다. 요흔과 내가 부조장을 맡으면서 문화대혁명 운동개입이 시작되였다. 문화대혁명을 잘하기 위해 주직속기관에서 간부들을 선발하여 강습훈련을 한 토대에서 문화대혁명사업조를 구성하고 각기 연변대학, 연변의학원과 연변농학원 및 각 문화단체에 입주하였다.

7월 16일, 나는 연변대학 문화대혁명사업조 조장을 맡고 사업조를 거느리고 연변대학에 입주하였다. 8월 27일, 연변대학에서는 학생을 주체로 하는 《8.27혁명반란파》와 《붉은기 련군》 등 군중조직이 나타났다.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를 속출하여 투쟁하는 바람이 재빨리 전 주 범위에서 퍼졌다.

9월 1일, 연변대학반란파들은 학교당위 서기 리희일과 부교장 림민호를 투쟁하면서 사람을 파견하여 주덕해와 나더러 비판대회에 참석하게 하였다. 비판투쟁대회가 끝날 때 반란파들은 주덕해의 찦차에 대자보를 가득 붙여놓는바람에 나는 주덕해서기를 안내하여 보행으로 공원소학교에 들어갔다. 거기서 주당위에 전화를 쳐 차를 오게 해서야 귀가할수 있었다.

9월 3일 오전, 연길시체육관에서 이른바 검은무리분자 요흔, 리휘 비판투쟁대회가 소집되였다. 요흔동지는 30년대초 혁명에 참가하여 모주석의 신변에서 사업했으며 50년대초 연변에 온 뒤 공안보안사업을 해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당위 제2서기로 있으면서 혼신의 정력을 전 주 여러 민족 인민들을 거느리고 새 연변을 건설하는 사업에 바쳤으며 인민들의 존중을 받고있다. 리휘는 40년대 혁명에 참가한 로동지이다. 연변에 온 뒤 문화교육사업을 주관하면서 연변의 문화교육사업발전에 주력해왔다.주덕해는 무거운 심정으로 이런 간부들이 어떻게 당을 반대하고 사회주의를 반대하고 모택동사상을 반대할수 있겠는가고 말하면서 운동후기에 기어이 당의 정책에 따라 이같은 문제를 실사구시적으로 처리하리라 작심하였다.

9월중순에 정세는 더욱 혼란해지면서 주당위도 통제불능의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주덕해에 대한 대자보는 갈수록 많아졌다. 이때 중공중앙 동북국 제1서기 송임궁과 서기 마명방, 길림성당위 서기 조림 등 지도자들은 연변에 와 문화대혁명상황을 료해하는 한편 주덕해를 보호할데 대한 주은래총리의 지시를 전달했다.

9월 28일, 주은래총리는 직접 마명방과 주덕해를 지명하여 함께 북경에 와서 건국기념일 경축행사에 참가할것을 요구하였으며 비행기를 파견해 그들을 영접했다. 10월 2일, 《인민일보》의 건국기념일 경축행사 보도에는 관람대명단에 주덕해가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중앙에서 주덕해를 신임한다고 믿었다.

12월초, 주덕해는 한 군중조직에 의해 연변대학 학교사무청사에 갇혔다. 반란파들은 주덕해를 집중공격하면서 《연변일보》의 권한을 빼앗으려 했다. 주덕해는 《연변일보》는 당기관지이기에 군중조직은 인계할수 없다고 대답했다.

동북의 한무리 고위층 자녀들의 조종과 부추김으로 연변의 문화대혁명 공격방향은 갈수록 주덕해한테 집중되였다. 누가 주덕해를 타도하면 그는 반란파이고 이와 반대면 보황파로 주목받았다. 주덕해를 보호할데 대한 주은래총리의 지시에 따라 연변군분구 정위 조남기는 많은 일을 했다.

1967년 1월 하순, 군중조직은 또 주덕해동지를 끌고갔다. 정세는 더는 통제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4월 18일, 중앙의 지시에 따라 분구와 군사관제위원회는 분구 정치부 주임 진열공을 파견해 주덕해동지를 남구역에서 기차에 오르게 한 뒤 북경에 호송하였다가 다시 호북의 5.3농장에까지 기차편으로 호송했다.

1967년 5월 1일후, 나는 주정부기관 죄행폭로회의에 참가했다. 반란파들은 주덕해동지의 장백산 경계선획분시의 매국죄행을 폭로할것을 나에게 요구했다. 나는 장백산 경계선획분문제에 대해 그때 주덕해는 한차례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주은래총리와 부총리이며 외교부장인 진의가 서명한 문건을 내놓았고 나도 그 문건을 보았다고 똑똑히 알려주었다.

그리고 모주석께서도 경계선획분의견에 동의한것으로 알고있었으며 이런 대사는 국가지도자만이 결정할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반란파들은 말문이 막히자 나중에는 주덕해를 대신해 변호한다고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8월하순, 나는 반란파들에 끌려 주당위당학교 3층 북쪽켠에 위치한 변소 바로옆 차거운 방에 갇혀 심사를 받았다. 이기간 위벽천공으로 13일 동안 입원한외 옹근 3년동안 갇혀있었다. 1970년 9월, 나는 돈화 현유 주5.7간부학교에서 로동감독개조를 받았으며 1971년 3월에야 드디여 해방받았다.

주덕해동지는 1967년 4월 18일 연변을 떠나 북경에서 2년 4개월 동안의 시간을 보내고 1969년 9월에는 호북의 5.3농장에 쫓겨갔다. 1971년 9월말, 연변에서는 두명의 군대표와 두명의 지방간부가 찾아가서 억지다짐으로 주덕해에게 문제를 털어놓으라고 핍박하면서 핍박, 자백강요, 서신협박을 감행하면서 한달여 동안 달달 들볶았다.

주덕해의 심신이 여지없이 망가졌다. 11월 28일, 협화의학원과 병원에 입원하여 검사한 결과 오른쪽 페선암인것으로 확인받았다. 1972년 2월 10일에 수술을 받고 책임적인 치료와 간호를 받았으며 주총리와 오덕이 주덕해에게 수입약품을 보내왔으나 주덕해의 심장은 이미 거의 쇠퇴에 가까와 이같은 고급약품을 받아들일 힘이 없었다. 7월 3일 오후, 주덕해는 억울하게도 병으로 결국 무한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1978년 6월 20일, 길림성당위의 비준을 거쳐 중공연변주위에서는 군중대회를 소집하고 주덕해동지의 억울한 루명을 벗겨주고 명예를 회복하는것을 공개하였다. 전 주 10만여명이 대회실황을 청취하였다. 성당위 부서기 우극이 성당위를 대표하여 주덕해동지에게 억지로 들씌운 모든 모함을 벗겨준다고 선포하고 주덕해동지는 우리 당의 우수한 당원이며 우수한 민족간부이며 모주석께 충성하고 당에 충성하며 인민에게 충성한 공산주의전사라고 선포하자 주회장과 분회장은 온통 들끓기 시작하였다. 나는 문화대혁명가운데서 억울하게 련좌당한 간부, 군중들과 마찬가지로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어 엉엉 소리내여 울었다.

주덕해동지 탄신 100돐을 기념하는 기회를 빌어 우리는 조국을 사랑하고 당과 인민에게 무한히 충성하며 사심없이 기여하는 그의 숭고한 품성을 따라배워야 한다. 중국공산당을 충심으로 옹호하고 열애하며 시종 변함없이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의 길로 나아가려는 그의 확고한 신념을 따라배워야 하며 열심히 배우고 실제에 심입하여 조사연구하는 주덕해동지의 사업작풍을 따라배워야 한다. 광명정대하고 청렴하며 사람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그의 고상한 품성을 따라배워야 한다.

우리는 주덕해동지가 주도한 민족단합정신을 견지하고 착실히 개혁 발전 안정의 제반 사업을 잘하고 초요사회를 전면적으로 건설함으로써 우수한 성적으로 중국공산당 창건 90돐을 맞이해야 한다.

/조룡호 (작자는 원 전국인대 상무위원, 원 연변조선족자치주인대 상무위원회 주임이였음)



>>> 인터넷 주덕해동지 생애전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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