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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에서 역행을 선택,‘남’같지 않은 외국인들(상)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20.03.17일 15:16
*편집자 주

전염병 상황도를 놓고 보면 이미 전방과 후방이라는 개념이 모호해졌다. 국내와 해외의 구분도 사라졌다. 수많은 보통사람들이 자신만의 전‘역’을 시작하였고 그둘중에는 중국에서 다년간 생활하고 사업하고 있는 외국인들도 포함된다. 본기 나의 전‘역’이라는 코너를 통해 그들이 이야기 하는 진실되고 생생한 경력을 들어보려고 한다.

1. 야마사키 유미코: 삼척 교단에 돌아와 나의 학생들에게 신심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일본 ‘3•11’ 대지진 때 “일본 사람들 힘내세요!”, “일본 힘내세요!” 등 현수막을 내걸었던 장춘시민들을, 골목마다에서 자발적으로 의연금을 모으던 대학생들을 말이다…

구술: 야마사키 유미코(일본) |55세|교원|길림 장춘

정월 초이튿날 나는 일본에서 장춘으로 돌아왔다. 룡가국제공항에 도착해서 택시에 오른 나는 택시기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의 출발지에 대한 주제가 나왔다.

택시기사는 내가 일본인이라는 소리를 듣더니 “당신은 ‘역행자’네요!”라며 놀라와했다.

길림대학에서 중국어를 배운 적 있는 나는 ‘역행’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본다. 집에 돌아와서 자전을 찾아보고 나서야 알게 되였다. ‘역행’이란 “정해진 방향의 반대방향으로 거꾸로 나아간다”는 뜻이였다.

알고 보니 나도 ‘역행’이였다니. 장춘에 돌아오기 전에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는 아들이 나보고 잠시 중국에 돌아가지 말라고 했다. 중국에 있는 남편도 지금 바로 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나는 나의 학생들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일본 ‘3•11’ 대지진 때 “일본 사람들 힘내세요!”, “일본 힘내세요!” 등 현수막을 내걸었던 장춘시민들을, 골목마다에서 자발적으로 의연금을 모으던 대학생들을 말이다…

의무일군들처럼 제일선에 달려가 생명을 구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의 삼척 교단에 돌아와  학생들에게 신심을 부여할 수는 있지 않을가.

센다이시는 장춘과 우호도시 관계이다. 센다이시는 내가 출생한 곳이며 장춘은 내가 인생리상을 실현한 두번째 고향이다. 하여 나는 항상 나 자신을 ‘장춘사람’이라고 말하군 한다.

나는 항상 그렇게 생각한다. 고향이 곤난이 있을 때 어찌 뒤로 물러날 수 있단 말인가? 이따금 이번의 ‘역행’을 생각해 보다가 나는 고향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가를 고민하게 되였다.



장춘시외사판공실 사업일군들이 가져다준 마스크.

정월 대보름 날 장춘시인민정부 외사판공실 사업일군들이 우리 집을 방문해 마스크, 소독액, 소독 손세제 등 방호용품들을 가져다 주었다.

외사판공실 사업일군은 “우리는 장춘의 경제와 사회건설을 위해 로력과 노력을 아끼지 않은 외국인들을 잊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생활하고 있는 사회구역의 사업일군들은 경상적으로 나에게 정황을 물으면서 료해하고 관심을 보내준다. 나는 작은 세절적인 것을 주의하게 되였는데 바로 체온을 측정할 때 그들은 딱딱하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나더러 작성표에 적어넣도록 한다. 이리하여 나는 자연히 체온을 측정하겠다고 요구하고 난 후에 작성표에 기입한다. 전반 과정이 체현한 것은 믿음, 리해와 례의이다.

나의 중국 학생들은 나를 매우 관심한다. 그들은 나에게 “선생님, 우리와 함께 있어줘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무서워 마세요. 우리가 언제나 선생님의 힘이 되겠습니다.”, “선생님, 인터넷 구두어교류 수업중 뢰신산병원과 화신산병원 건설의 ‘중국속도’에 대해 강의하셨는데 저는 매우 자호감을 느꼈습니다.” 등 문자들을 남겨 주었다…

‘장춘사람’으로서 나는 이미 오래전에 전염병 예방통제에 대한 ‘중국속도’를 깊이 체득하였다. 례를 들면,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는 전날밤까지만 해도 자유로이 출입이 가능했는데 이튿날 아침에 벌써 일찍부터 봉쇄식 관리를 완성하였다.

2월 18일, 장춘의 많은 곳에서 업무에 복귀하고 생산을 재개하면서 사회구역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아침 8시 40분에 나는 몇명의 자원봉사자들과 집 아래에서 만나 집합하여 령하 십몇도나 되는 추운 날씨에 단원관리자(楼长)를 따라 소독 작업을 진행하였다.



야마사키 유미코(오른쪽 첫번째)가 아파트 자원봉사활동에 참가하고 있다.

소독액이 찬바람을 만나 몸에 날리면서 얇은 얼음조각을 형성하였다. 냄새도 이상야릇했다. 그러나 외국자원봉사자의 신분으로 중국의 전‘역’에 참가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기쁨과 위안을 느꼈다.

방역 자원봉사자로서 나는 또 아파트단지 출입구에서 사회구역 사업일군들을 도와 체온을 측정하는 봉사를 하였다. 그 일을 하면서 나는 사람마다 자각적으로 줄을 서고 사람과 사람사이 5메터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았고 누구 하나 뒤칠세라 앞을 다투거나 큰소리로 떠드는 상황이 없음을 발견하였다.

1995년에 길림대학에 류학와서 지금까지, 나는 장춘에서 공부하고 사업하면서 25년을 보냈다. 그 기간 ‘사스’도 겪었다. 나는 이번 전염병 기간의 중국정부 소식이 더욱 투명하고 더욱 동원력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호응하는 아주 강렬한 호소력이 있다.

‘사스’와 비교하면 10여년이 지난 지금 웨이보, 위챗 등 수많은 전파수단이 출현하였고 중국 인민들은 이러한 도경을 리용하여 긍정적 에너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전염병 발생기간의 에피소드들은 바이러스를 물리치려는 신심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웃을수있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내용에서 나는 현재의 중국 대중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더욱 자신감 있고 침착하며 락관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였다.

2. 미란: 전염병이 하루 빨리 물러가기를 희망한다, 나는 심리상담을 받고 싶다.

들은 바에 의하면 600여명의 나와 같은 짐바브웨인이 도시가 봉쇄된후 무한에 남게 되였다고 한다. 그들중 일부는 류학생이고 일부는 이미 사업에 참가했다. 내가 알기로는 모든 무한의 짐바브웨인이 안전하고 또 건강하다.

구술:미란(짐바브웨)|27세|연극 교원|호북 무한

오전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멍때리고 있다가 20분간 신체단련을 한다. 그 다음 샤워를 오래동안 한다. 아무튼 시간은 아주 많으니 말이다.

오후에는 핸드폰을 보다가, 일기를 쓰다가, 저녁 밥을 짓는다. 최근 나는 료리재간이  많이 늘었다. 중국식 료리를 몇가지나 할줄 알게 되였다.

저녁에는 영화를 본다. 친구나 낯선 사람들과 인터넷으로 채팅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간식을 먹는다.

……

이는 내가 지난 한달이 넘는 동안 기계사람처럼 보낸 일상이다. 지갑이 점점 얇아지고 날씨가 차차 따뜻해 지지 않았다면 나는 시간이 멈췄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것이다.

나는 미란이라고 한다. 27살 짐바브웨인이다. 대학교 졸업 후 나는 남부 아프리카 국가에서 중국에 류학을 왔다. 작년에 하문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무한으로 초빙받아 한 학교의 연극 교원이 되였다.



미란씨 무한 거처의 창밖 모습.

왜 귀국하지 않았냐고? 중국에서 수입이 더 높고 생활이 더욱 편리하기 때문이다.

1월 중순에 우리 학교는 방학을 했다. 나는 본래 무한의 한 친구집에 음력설을 쇠러 가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당시 인터넷에서 새로운 ‘사스’ 바이러스가 무한에서 전파되고 있다는 소식을 보았다.

관련 부문에서 요언이라고 했지만 나는 겁이 많은 사람이다. 망설이다가 그래도 계획을 취소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집에서 머물기로 결정하였다. 사업에 참가한 후 처음으로 혼자 보내는 음력설이다.

음력설 전 무한이 봉쇄됐다. 코로나19 전염병이 전세계가 아는 중대사건으로 되였다. 나의 가족들은 속이 탈대로 타서 매일 나와 영상통화를 하면서 나더러 귀국하라고 권고했다. 나는 전염병이 인츰 지나갈 것이라고 그들을 위로할 수 밖에 없었다. 하물며 지금은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나의 친구들이 많은 격려를 보내 주었다. 오래동안 련락이 닿지 않았던 친구가 돌아돌아 나의 련락방식을 얻어내서는 국제전화를 걸어와 나를 관심해주었다. 정말 너무 큰 감동을 받았다.

집주인도 나에게 친절하였는데 집세를 감면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나를 데리고 아파트단지내의 과일채소시장에 가서 물건을 살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 한달이 넘는 동안 나의 식품 구매는 기본적으로 그 시장에서 해결하였다.

매번 채소를 사러 갈 때면 나는 방역조치를 철저히 한다. 나는 2원에 하나인 의료용 마스크 밖에 없다. 아주 얇아보여 안에 속옷패드를 더 넣어서 두껍게 만들었다. 이러면 더욱 안전할 것 같았다.

시장에 가는 것 외에도 위챗에서 단체구매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인터넷 구매가 전염위험이 있을 것 같아 겁이 났고 또 일부 사람들이 구매한 채소가 신선하지 않다고 불만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지금 인터넷에서 간식 만 구매한다. 매일 집에 있다 보니 간식 만 먹고 있다.

나는 뉴스도 보고 웨이보도 훑어본다. 당연히 위챗 모멘트도 주의해 본다. 무한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리문량 의사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고 나와 친구들이 건강하기를 빌었다. 나는 내가 영락없는 무한사람이라고 느꼈다.

들은 데 의하면 600여명의 나와 같은 짐바브웨인이 도시를 봉쇄한 후 무한에 남게 되였다고 한다. 그들중 일부는 류학생이고 일부는 이미 사업에 참가했다. 내가 알기로는 모든 무한의 짐바브웨인이 안전하고 또 건강하다고 한다.

한 위챗단체방에 가입하였는데 단체방 구성원들이 모두 무한에 남은 짐바브웨 녀성들이다. 우리는 매일 단체방에서 활약하면서 영어와 치쇼나어(绍纳文, 짐바브웨 당지 언어)로 대화한다. 드문드문 중국어를 섞기도 한다.

도시가 봉쇄되니 생활상 많은 불편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조치들이 바이러스의 전파를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밖에 나가지 않고 실내에 있으면 나는 안전하다.

나는 집에 가만히 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특수시기 나와 타인의 건강을 위하여 나는 기꺼이 이렇게 하였다.

나는 중국이 코로나19 전염병을 아주 훌륭하게 억제하였다고 생각한다. 대국으로서의 중국은 충족한 의료자원과 고효률적인 반응기제를 가지고 있다.

특히 이곳의 의사들 말이다. 나는 그들을 이 도시를 구하는 ‘슈퍼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병마와 투쟁하고 있다. 어떤 의사들은 생명을 희생하였다.

무한, 호북이나 중국의 기타 지방을 막론하고 새로 증가는 환자수가 매일 감소하고 있고 완치환자수는 되려 증가하고 있는 사실이 나를 기쁘게 했다.

나는 중국이 꼭 이번 전염병을 싸워이길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내가 걱정되는 것은 나의 저축이다. 음력설 전에 학교에서 1월달 월급을 발급하였고 그 이후에는 없었다. 집세, 물세와 전기세, 인터넷비, 식품을 사는 돈… 이런 일상의 소비가 나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다.

원래는 돈을 저축하려고 계획하였는데 부모님에게 보내드리고 형제자매들을 돕고 하다 보니 지금은 그들을 도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내 자신이 쓸 돈도 거의 없어지고 있다. 내가 계산해 보았더니 손에 있는 돈으로 두달은 버틸 수 있다. 만약 그냥 출근할 수 없다면 나는 귀국할 비행기표도 구할 수 없게 된다.

2월 하순의 어느날 나는 창가에 엎드려 밖을 내다 보다가 장례식장의 령구차를 보았다. 옆동 건물에서 시신을 실어갔는데 이는 나를 슬프고도 불안하게 했다.

사회구역 사업일군은 고인은 자연사망이며 코로나19 환자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사실들이 어쨋든 사람을 두렵게 한다.

전염병이 하루 빨리 지나가기를 희망한다. 이 한달여 동안 너무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다. 상담사를 찾아가 심리상담을 받고 싶다. 심리치료를 한 다음 나의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취재 응답자의 요구에 따라 여기서 미란은 가명임을 밝힌다.)

3. 도일부(图一夫):당시 교민 철수 때 나는 떠나지 않았다. 정주에 남아 가족들 곁을 지켰다.

신변의 일부 친구들은 나더러 먼저 폴란드에 갈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나는 떠나지 않았다. 교민 철수가 결속된 이튿날에 나는 안해에게 교민철수 문제를 말했다. 안해는 나에게 왜 떠나지 않았냐고 물었다. 나는 당신이 집에 있고 아이들도 여기에 있는데 내가 어떻게 떠나냐고 했다.

구술:도일부(图一夫, 폴란드)|39세|교육기구 책임자|하남 정주

전염병이 발생한 후 얼마 안되여 중국 주재 폴란드대사관에서 교민 철수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나더러 등록하라고 하면서 북경에 집합하여 함께 전세기로 폴란드에 돌아간다고 하였다.

2월 5일, 나는 처음 이 소식을 접하게 되였고 신변의 일부 친구들이 나더러 먼저 폴란드에 갈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나는 떠나지 않았다. 이럴 때 일 수록 나는 나의 안해와 아이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민 철수가 결속된 이튿날에 나는 안해에게 교민철수 문제를 말했다. 안해는 나에게 왜 떠나지 않았냐고 물었다. 나는 당신이 집에 있고 아이들도 여기에 있는데 내가 어떻게 떠나냐고 했다. 당시 안해는 매우 감동을 받았다.

이건 내가 응당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안해는 지난해에 그만 발을 접질러 줄곧 치료 중이다. 최근에 아이들의 인터넷 수업도 시작되였다. 만약 내가 떠난다면 안해 혼자서 압력이 아주 클 것이다.

결혼한지 10여년이 되는데 아이들을 돌보고 밥하는 것은 모두 내가 책임지고 있다. 나는 밥하는 걸 좋아한다. 특히 중국음식을 아주 좋아한다.

안해는 밥을 할 줄 모르는 척 했다. 10년 동안이나 말이다. 내가 제일 하기 좋아하는 것은 큰접시닭과 마포두부, 동북의 푹 졸이는 채, 그리고 피자이다. 집에 손님이 올 때면 나는 꼭 몇가지의 폴란드 료리도 하군 한다.

나와 안해는 커피숍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당시 그는 커피숍 사장이였다. 나는 매일 커피숍에 커피 마시러 갔고 후에 내가 아예 커피숍 사장이 되였다. 커피를 공짜로 마실 수 있었다!

안해는 나를 정주에 ‘묶어’두었다. 이렇게 있다보니 15, 6년이 되였다. 이젠 ‘정주사람’인 셈이다.

정말, 나의 원래 중문이름은 ‘도부(屠夫)’였다. 한 무술영화에서 따온 것이다. 안해를 만나고 그는 이 이름이 너무 웃음거리 같다고 하여 후에 ‘도일부’로 고쳐주었다. 그 의미는 ‘한 병사가 관문을 지키고 있으면 천군만마로도 공격할 수 없다.(一夫当关、万夫莫开)’이다.

나의 모친이 신체가 좋지 못하다. 전염병이 발생한 후 모친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이 정도로 엄중한 줄 몰랐던 모친이 심장이 조금 자극을 받았다.

처음에는 나도 안해에게 모친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안해가 더욱 조급해 할 것 같았으니 말이다. 모친이 조금 호전을 가져오자 안해에게 말했더니 그는 교민을 철수 할 때 신청하였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때는 돌아가기 편리했으니까.



도일부와 자녀들이 폴란드 집에서 놀고 있는 모습.

2월 20일, 나는 국내 확진자수가 련속 며칠 내려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폴란드로 가기로 결정했다. 먼저 고속철을 타고 북경에 갔다가 이틀날 새벽 2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전염병으로 폴란드와 중국을 오가는 직행이 없었고 그리하여 나는 모스크바를 경유하는 왕복 비행기표를 끊었다.

폴란드에 돌아가 모친을 찾아보는 외에도 사업상의 일정이 있었다. 나는 합작하여 학교를 경영하는 일에 종사한다. 폴란드 대학교들에서는 계획대로 개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중국은 아직 격리 중이다. 하여 나는 폴란드 대학교들에 상황을 설명하고 될 수 있는 한 중국학생들을 위해 시간을 쟁취해야 했다.

중국의 전염병 관리통제가 매우 효과적이였다. 평소의 정주는 지하철역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지금은 한산하다. 북경으로 향하는 고속철에도 전보다 사람이 아주 적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는 오래전부터 봉쇄식 관리를 시작했다. 두세날에 한번 외출하여 채소를 사오는 외에 나는 기타 지역에 간 적 없다. 물가도 평소보다 조금 올랐지만 특수시기이니 리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의료물자가 여전히 부족하여 안해는 인터넷으로 알콜을 살 수가 없었다. 나는 폴란드 증류 보드카를 살 것을 제의하였다. 96도의 ‘생명의 물’에 물을 섞어 75%로 희석하면 소독할 수 있다고 말이다. 고향 특산이 이때 쓸모가 생긴 것이다!

나는 사람들과 말할 때 만약 중국이 (전염병 예방통제) 할 수 없으면, 다른 나라는 당연히 할 수 없다고 했다.

폴란드는 아직 확진병례가 없다. 그런데 최근이 마침 학생들의 겨울계절 방학이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딸리아에 스키하러 갔다. 이딸리아의 전염병이 이렇게 엄중하니 폴란드도 압력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내가 관찰한 데 의하면 바르샤바 길거리에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이 얼마 안된다. 정부에서도 사람들에게 마스크를 착용하라고 크게 호소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마스크는 환자들이 착용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의 마스크도 현재 아주 비싸졌다. 보통의 일차성 마스크가 원래는 몇십전이였는데 지금은 열배 넘어 폭등했다.

뉴스를 보니 요며칠 중국의 전염병 공제가 아주 잘되고 있었다.

중국에 돌아갈 때 나는 백개나 이백개 정도의 마스크를 가지고 가려고 한다. 그리고 소독액과 폴란드 특산도 함께.

나의 안해는 한 대학교의 교원이다. 최근 그는 집에서 인터넷 강의를 하고 있다. 작년에 안해는 나에게 책 한권을 쓰려고 준비한다고 말했다. 내가 중국에서 겪은 15년의 경력을 기록하겠다고 했다.

기실 5년 전에 안해는 이미 쓰려고 했다. 나의 중국에서의 10년을 말이다. 각종 원인으로 지체되였는데 이번의 전염병이 지나면 안해는 더이상 미룰 핑게가 없을 것 같다.

/출처 신화사 편역 김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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