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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선촌의 개척자-그의 이름은 '김주임'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2.09.05일 10:02
 칠대하시 홍선촌 김룡하촌주임

 (흑룡강신문=하얼빈) 최성림기자 = 지난세기 60년대초, 흑룡강성 원 벌리현 영광촌에서 살던 한개 생산소대의 농가들이 황무지가 많은 칠대하시 신흥구 홍기진 홍승촌구역으로 집단이주하여 황량한 벌판에 보습을 대고 처녀지를 일구어 지금의 홍선촌을 세웠다.

  그들의 앞장에 서서 마을을 개척하고 마을을 건설했으며 지금 80세 고령을 바라보며 마을을 지켜온 주인공이 바로 김룡하 로촌주임(당시 생산대대 주임)이다. 촌민들은 지금도 항상 인자하고 틀없는 그를 '김주임'이라 친절히 부른다.

  당시 이곳은 벌리현에 속했고 칠대하시는 칠대하촌으로 불리웠으며 후에 홍승촌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벌리현 영광촌은 토지면적이 적고 인구가 많아 매우 가난했었다. 살길을 모색하던중 벼농사를 모르는 한족마을인 홍승촌에 황무지가 많다는 말을 듣고 현 농업부문의 허가를 받고 27호가 원정대를 무어 개척지로 향했다. 그때가 1964년이였다.

  당시 30대초반의 장정으로 영광촌(당시 대대)에서 부지서, 회계를 담임했던 김로인은 첫해에 27호의 로동력들만 이끌고 허허벌판에 초막을 짓고 논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하려는 이들의 로정은 순탄치가 않았다. 원래 이곳은 꼬지개 대가리가 많은 소문난 습지로 당지 한족들은 랑와당(浪洼塘)이라고 불렀다. 손잡이트랙터는 물론 소도 빠지면 나오지 못하는 흔들습지로 파종으로부터 모든 일은 사람의 힘으로 해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쪽지게가 등에서 벗어날 때가 없었다.

  이렇게 고생한 보람으로 그래도 첫해에 10헥타르의 논을 일구어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었는데 념원대로 풍작을 이루었다. 여기에서 신심을 얻은 그들은 이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떼장집을 짓고 가족들도 모두 이주하여 1966년부터는 떳떳한 홍선촌의 주인으로 됐다.

  하지만 시련을 이겨내지 못한 농호들도 있었다. 너무나 렬악한 환경때문에 한호 두호 떠나가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27호에서 10여호가 떠나갔다. 촌에서는 나머지 농호들을 묶어세우는 한편 외지호를 받아들이기 시작, 이렇게 한호 두호 불어나기 시작한 농호가 최고로 80여호로 늘어났다.

  그들이 한창 삶의 터전을 닦으며 땀을 흘리고 있을 때 전례없던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김룡하 본신도 촌간부로 사업했던 '죄'로 당권파로 몰려 령도직위에서 밀려났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해야 할 일들을 앞장서 해 나갔다.

  1977년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4인방'이 타도되자 그도 다시 촌민위원회주임으로 복귀, 1989년까지 줄곧 마을의 선줄군으로 빛을 발했다. 재직기간 그는 촌민들을 이끌고 겨울에 곡괭이로 언 땅을 파 3000여미터에 달하는 배수로를 팠으며 1982년도에 큰물이 져 심한 수재를 입자 왜긍하 큰강쪽으로 3리에 달하는 제방을 높게 쌓았다. 지하수가 낮아져 농기계가 힘을 발휘할수 있게 되였고 왜긍하도 고분고분해져 더는 수재를 입지 않게 되였는바 말 그대로 가뭄과 홍수에도 수확을 보증하는 복지로 변했다.

  이렇게 1983년까지 촌에서 개간한 토지는 86헥타르, 자신들의 구역에서 늘어나는 기름진 옥답들을 배아프게 생각한 홍승촌에서 소송을 제기, 자신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하여 조선족농민들은 현, 시는 물론 북경까지 찾아가 신원하여 끝내 정책의 보호를 받을수 있었다. 이렇게 얻어진 이 마을은 홍선촌외에 또 '북경대(北京队)로도 불렸다. .

  집체화시기 홍선촌은 전시적으로 이름난 선진촌으로 모내기도 다른 촌보다 일찍 도입하여 해마다 징구량임무를 초과완성하였고 촌집체경제건설에도 박차를 가하여 당지의 자원우세인 탄광도 3개씩이나 경영하였으며 벽돌공장을 꾸려 학교를 새로 짓고 촌민들에게도 혜택을 주어 많은 가정들에서 벽돌집에 들게 하였다.

  당시 촌민들의 수입을 비겨보면 다른 마을에서는 한공에 1원정도도 힘들었지만 이 마을은 보통 한공에 1.50~1.70원, 높을 때는 2.00원이 넘어 부유한 촌으로 원근에 소문이 났다.

  또한 그 자신도 해마다 시, 현급 로동모범 등 수두룩한 영예를 안아왔으며 1981년부터 1987년까지 칠대하시 제3, 제4기인민대표로 소수민족을 대표해 5명 상무위원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퇴직후 김룡하 로촌주임은 촌로년협회 회장을 4년간 하다가 물러났지만 지금도 로년협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면서 마을을 지켜오고 있다. 그를 안타깝게 하고 있는것은 개발바람으로 평생을 바쳐 개척한 마을이 거의 없어질 위기에 처한것이다.

  농토는 이미 전부 석탄가공기업의 부지로 변했고 공기 좋고 살기 좋던 마을은 오염으로 몸살을 앓고있다. 더욱 한심한것은 촌민들이 아직도 여러가지 원인으로 토지보상비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있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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