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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항산영령들...오지산 '미나리타령'과 부녀대장 리화림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2.11.28일 10:27

중경에 있을 때의 리화림(좌)과 로년시절의 리화림(자료사진).

  당시 태항산근거지의 조선의용군에는 10여명의 녀전사들이 있었다고 한다. 1943봄부터 《자력갱생 풍의족식》대생산열조가 일던 시기 가장 어려운 고비는 식량난이였다. 일제놈들의 무시로 되는 《소탕》과 국민당반동파들의 태항산항일근거지에 대한 경제봉쇄로 하여 근거지 군민들은 모진 식량난에 부대끼면서 나무 껍질과 잎사귀, 산나물을 주식으로 기아를 이겨나갔다.

  그래도 태항산에는 봄이면 미나리가 많아 다행이였다. 조선의용군전사들은 미나리를 캐여다 김치도 담그고 볶아도 먹었다. 당지 주민들은 미나리를 먹는 습관이 없었지만 조선의용군들이 먹는것을 보고 미나리를 먹기 시작하였다. 미나리김치를 담그자면 소금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소금이라고는 구경조차 할수 없었다. 당지 주민들은 소금 대신 《쿠엔》(苦盐)이라는 돌을 가루내여 썼다. 그것을 미나리김치에 넣으면 쓰거운 맛이 나면서 미나리가 숙지고 김치맛이 났다. 또 미나리를 말리워 가루를 낸 다음 겨에 섞어 강낭떡처럼 먹었고 도토리를 주어 삶아 가루 내여 묵도 앗아먹었다. 그들은 밤이면 대부분 강낭짚을 깔고 잠을 잤고 조이짚이나 벼짚을 깔면 상등잠자리였다.

  이 어려운 나날에 태항산근거지정부에서는 조선의용군들을 지극히 보살피면서 당지 주민들도 얻기 어려운 좁쌀까지 다달이 공급해주었다. 무정총사령은 메마른 황토고원의 섬감녕변구를 《북국의 강남》으로 건설한 연안군민들의 경험을 소개하면서 전체 조선의용군전사들을 대생산운동에로 궐기시켰다. 《우리는 대생산운동에서 사상의식을 단련해야 합니다. 도토리 한알 주었다면 우리의 정치력량이 그만큼 늘어난걸로 생각하고 도라지 한뿌리 뽑았다면 일본파쑈뿌리를 그만큼 뽑아내친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무정장군의 이런 생동한 말씀에 힘을 얻은 조선의용군전사들은 생활은 간고했지만 언제나 락천적이였다. 당시 부녀대 대장을 담임한 리화림동지는 녀성들을 거느리고 민들레, 세투리, 미나리와 같은 봄나물과 갓 돋아난 수양버들잎사귀들을 뜯어 전사들의 점심음식을 마련해갖고 청천황무지개간지로 날라갔다.

  전사들은 총을 한곳에 세워놓고 황무지를 개간하느라고 땀벌창이 되여 일하다가도 녀전사들이 점심을 머리에 이고가면 달려와 음식을 받아들고 멀건 푸성귀국에다 미나리떡이며 텐캉(甜糠,익은 감에다 겨를 발라 말린 음식)을 맛갈스레 먹었다. 녀전사들은 그들을 도와 한쉼씩 일하다가는 저녁식사준비로 떠나오군 하였는데 휴식시간에는 의례 오락판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때 조선팔도에서 모여온 전사들은 각 지방의 민요들을 저마끔 불렀다. 처음에는 재미도 있고 흥이 났지만 나중에는 가사들이 마땅치 않아 차차 민요곡에 나름으로 새 가사를 창작하여 부르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혁명군사학교 교무주임 정률성이 《군중가요창작활동》을 창도하였던것이다. .

  리화림대장은 《도라지》곡에다 맞추어 노래 한수를 지었다. 녀전사들은 모여앉아 네 한마디 내 한마디 가사를 보충수정하고 합창련습까지 하고는 어느 한 점심참에 제법 《미나리타령》하고 프로소개까지 하면서 정식 《공연》을 하여 남전사들을 깜짝 놀래웠다.

  미나리 미나리 돌미나리 / 태항산골짜기의 돌미나리/ 한두뿌리만 뜯어도/ 대바구니가 찰찰 넘치누나/에헤야 데헤야 좋구나/

  어여라 뜯어라 지화자자 캐여라/ 이것도 우리의 혁명이란다/ 남동무들은 곡괭이 메고/ 태항산골짜기로 올라가서/ 한포기 두포기 드덜기 빼고/ 감자를 두둥실 심는구나/ (후렴)

  공산당 모주석 령도하에/ 동지들 굳게 단결하여/ 왜놈제국주의 때려부시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자/ (후렴)

  당시 전사들속에는 괜히 공산당의 항일근거지로 이동하는 바람에 황무지를 일구고 산나물을 캐면서 고생들을 한다는 정서가 있던차라 《이것도 우리의 혁명이란다》,《모주석 공산당 령도하에》라는 가사를 지어 힘차게 부름으로써 대생산도 혁명이고 전투라는 점을 강조하여 선전하였던것이다. 민요곡에 자체창작가요를 부르면서 그들은 한편 멀리 두고온 고향과 조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고 항일의 승리와 조국독립의 신념을 다져갔던것이다.

계림에서의 조선의용대 녀전사들

  리화림동지는 고향을 떠나온지 어언간 10년도 넘었었다. 고향 평양에서 그는 력사문학연구회에 다니면서 공산주의계몽교육을 받았고 1927년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후 그는 조직의 파견을 받고 학생운동과 종교신자들에 대한 사업을 진행하고 상해림시정부에 자금을 모아보내면서 밀정들의 눈을 피해 긴장한 나날들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하루,그는 중국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난 아버지가 객사를 하고 두 오빠는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군부대에서 지휘관으로 있다는 소식을 접한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슬픔속에 온 하루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망국노의 희생물이 된 아버지의 원쑤를 갚기 위해 중국으로 떠나온다.

  어머니는 먼길을 떠나는 딸에게 시조 한수 읊어주셨다.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여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 가실줄이 있으랴.》 고려충신 정몽주의 이 시조를 어머니는 남매들을 키우면서 마냥 자장가처럼 읊조려주었던것이다. 딸은 어머니 발밑에 꿇어앉아 큰절을 올리고는 비장한 결의를 다지며 눈물을 닦고 갈길을 재촉하였다. 쉬파리떼처럼 따라붙는 밀정들을 떼여버리며 신의주, 인천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중국 단동에 이르렀을 때는 바로 1930년 3월, 그가 25세되던 해였다.

  오빠들을 찾아 동북으로 가고싶었으나 바다에서 바늘 찾기라 천진을 거쳐 상해 황포강안에 이르렀다. 번화한 거리에 우뚝 솟은 고층건물, 빈민굴에 게딱지처럼 올망졸망한 판자집, 채찍을 휘두르는 감독과 무거운 짐짝을 힘겹게 나르는 《쿠리》들, 《중국인과 개는 들어오지 말라》는 패쪽이 걸린 조계지...왜 동방의 약소민족은 제국주의렬강들의 유린을 고스란히 받아야만 하는가?

  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디디며 상해에서 조선교민소학교 교장으로 있는 김두봉선생을 찾아가 《제손으로 일본놈들을 죽이고 겨레들을 위해 복수하겠다》며 독립운동을 이끌고있는 한국림시정부 총리 백범 김구선생을 소개해줄것을 부탁한다. 어렵게 만난 김구선생의 지도밑에서 비서역할을 감당하게 된 그녀는 《애국단》일원이 되며 《리동해》라는 가명을 쓰게 된다. 공산주의자들을 일본침략자들 버금으로 미워하는 김구선생앞에서 그녀는 자신은 조선공산당원이라는 신분을 밝히지 못한다. 다만 《애국단》도 일본침략자괴수를 암살하고 군경기관을 폭파하는 이름높은 《의렬단》과 같은 조직이라고 믿고싶었을따름이였다.

  1932년 1월초, 김구선생앞에서 선서를 하고 일본천황을 암살하러 떠나는 《의렬단》단원 리봉창에게 그녀는 작탄을 넣는 훈도시를 직접 만들어준다. 그해 4월 29일, 일본천황의 탄생일 윤봉길과 함께 부부로 가장하고 홍구공원으로 들어가 일본침략군두목들을 처단하기로 계획한다. 그러나 일본어를 구사할줄 몰랐던 그녀는 홍구공원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밖에서 손에 땀을 쥐고 윤봉길의 폭탄투척소식을 기다렸다. 굉장한 폭음과 함께 일본거류민단 단장과 일본군총사령 시라가와 대장이 즉사하고 중장, 사단장, 총령사들이 중상을 입고 …그러나 폭탄투척자 윤봉길은 체포된다. 윤봉길은 당장에서 《조선독립 만세!》를 웨치며 조선인은 죽지 않았음을 세상에 알린다. 이에 그녀는 민족적긍지감을 가슴벅차게 느낀다.

그러나 시일이 흐르면서 그는 개인테로의 방법은 조선혁명과 국제혁명의 적당한 방법이 아님을 터득하게 되면서 《애국단》을 탈퇴하고 조선혁명가들이 활약하고있는 광주로 떠난다. 6년후 그는 우연히 중경에서 갓 모친상을 치른 김구선생과 만난다. 《동해(상해시절 가명)야, 넌 아직도 공산주의자냐? 계속 공산주의를 믿느냐? 》,《네, 저는 공산주의를 믿습니다. 저는 공산주의자입니다!》,《그럼 우린 다시는 만나지 말자!》 과연 두사람은 그뒤로 한번도 만난적 없었다고 한다.

  1932년 늦가을 혁명의 진리를 탐구하는 새길에 올라 광주로 간 그녀는 조선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중국혁명가들의 도움으로 중산대학 의학원부속병원 견습간호원으로 의학을 배우게 된다. 중산대학의 30여명 조선인학생들중 같은 평양태생인 진광화가 가까이하면서 《자본론》, 《공산당선언》, 《레닌주의기초》,《국가와 혁명》 등 맑스-레닌주의 로작들을 빌려보고 학습하면서 혁명에 대해 많이 담론하군 하였다.

  1935년 늦가을, 진광화를 통해 《의렬단》의 유명한 지도자인 석정 윤세주를 만나 그의 강연을 듣고 감화를 받는다. 그때 석정 윤세주는 《의렬단》, 《흥사단》, 《조선독립당》 등 7개 조선혁명단체가 련합하여 남경에서 세운 《조선민족혁명당》의 파견을 받고 조직확대사업을 나왔던것이다. 조선공산당에 가입해서부터 분렬파쟁의 쓴맛을 볼 때로 본 리화림은 혁명가들의 사상통일과 단결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것을 알고있었던차라 7개 조선인단체의 련합은 아주 큰 력사적진보라고 여기며 당장에서 입당을 신청한다.

  1936년1월,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한 그녀는 총부(당주석 김규식, 총서기 김원봉)의 지시에 따라 남경에 가 사업하게 된다. 당시 이미 결혼하여 어린 아들까지 두었던 그녀는 남편의 반대가 앞을 가로막자 큰 혁명을 위해 작은 가정을 포기하는 일은 어쩔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남편과 리혼하고 결연히 남경으로 떠난다. 남경에 이르러 그녀는 조선민족혁명당 부녀국 부대장으로 사업하면서 항일선전선동에 앞장서고 조선인녀성들을 조직지도하였으며 중국인녀성들과의 련합통일전선을 결성하였다.

  1938년 봄, 일제놈들의 군사적진공에 남경이 점령당할 위기에 놓이자 조선민족혁명당에서는 로약자들을 중경으로 후퇴시키기로 결정한다. 진눈까비 내리는 진창길을 더듬으며 100여명 되는 병약자들을 부축하여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드디여 반년만에 중경에 이르렀다. 그해 11월경 그녀는 《쌍십절》날 무한에서 조선의용대가 창건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의 눈물을 금치 못하였다. 우리 조선인들에게도 자기의 군대가 있게 되였다는것이 그토록 감격되였던것이다.

  1939년 3월, 리화림은 조선의용대본부의 소환을 받고 계림으로 간다. 조선의용대의 300여명 대원들은 당당한 진영을 이루고 3개 지대와 부녀대로 나뉘여있었다. 대부분 성원들은 여러 군관학교에서 군사를 배운 젊은이들이였고 국민당군대나 헌병대에서 군관으로 있던 사람들로서 그들의 전투력은 상당하였다. 그러나 소극항일, 적극반공으로 싸움마다 패주하는 국민당군과 배합작전을 벌이려니 질식할것만 같은 실망과 비애를 느낀다. 그리하여 하루빨리 진정 항일하는 공산당과 팔로군과 협동작전을 펼쳐야 한다고 강력히들 주장하였다. 조선의용대본부에서는 드디여 태항산항일혁명근거지로 이동할것을 결정지었다.

리화림은 20여명으로 구성된 선견대에 편입되여 락양을 거쳐 태항산으로 가는 먼 행군길에 올랐다. 가는 길에서 일본군진지나 괴뢰군진지앞에 은페하여 함화선전을 벌이기도 하고 삐라나 선전품을 진지안에 뿌려넣기도 하면서도 하루 500킬로메터 강행군을 견지해나갔다. 일본군의 포대앞을 지날 때면 한사람 한사람 한나절씩 기여나가면서 적의 봉쇄구역을 빠져나와 태항산근거지에 이른다. 그때는 1941년 7월경이였다.

  태항산근거지에서 조선의용군 부녀대 대장으로 무장선전사업과 대생산운동에서 적극적으로 활약하던 그녀는 무정사령의 직접적인 지시로 1943년 상반년에 조선의용군병원에서 사업하게 된다. 조선의용군본부가 주둔하고있는 마을은 팔로군병원과 멀리 떨어져있어 군민들이 병을 보이는데 곤난이 적지 않았다. 간고한 환경속에서도 군민들을 위하여 조건을 창조하면서 열정적으로 사업한 그는 사령부의 표창을 받았고 모범으로 당선된다.

  1944년 12월 30일,리화림동지는 조선의용군 각 지대가 연안에 집결하여 군사정치훈련을 한다는 중공중앙의 결정에 따라 혁명의 성지 연안으로 진군하는 첫패의 대렬속에서 보무당당하게 걸어나갔다. 조선의용군주력부대가 연안으로 떠난 뒤에도 태항산근거지에서 계속되는 대생산운동의 고조속에 오지산황무지개간지에서도 《미나리타령》은 여전히 울려퍼졌다.

  태항산현지에서 리화림과 녀전사원들의 사적을 직접 듣노라니 기이한 산봉들이 별풍처럼 우중충한 태항산계곡마다에서 녀전사들이 부르던《미나리타령》이 메아리치고있는듯싶었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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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 의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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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두 참 심하구만..하루에 500km ? 웃기고 자빠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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