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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항산에서의 조선민족영령들(2)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2.10.15일 11:01

 황북평마을 뒤산언덕에 모셔져있는 조선의용대 4명 렬사의 묘지.

  1941년 11월말 태항산근거지에 주둔하고있던 조선의용대는 적후선전공작을 벌이기 위해 무장선전대를 조직하고 매개 대에 2개 분대를 두었다. 제2대의 대장은 김세일이고 1분대 분대장은 조렬광, 2분대 분대장은 손일봉이였다. 제2대의 20여명 대원들은 무장선전을 펼치려고 주야로 강행군하여 원씨현 경내에 이르렀다.

  그들은 밤이면 적의 또치카에 접근하여 선전을 하면서 적의 군심을 분산시키고 또 한면으로는 군중선전활동도 벌이고 성벽에 항일구호들을 써붙이면서 20여일간 선전활동을 벌였다.

  12월 11일 밤, 유격근거지인 호가장마을에 당도하여 큰 집을 빌어 휴식을 취하고있는데 날샐녘 마을밖에서 총성이 울렸다.

  워낙 마을남쪽 2, 3키로메터 떨어진 곳에 일본 침략군이 둥지를 틀고있었고 이 마을에는 괴뢰군가족들이 있었다.

  괴뢰군가족들이 조선의용대가 마을에 들어왔다고 밀고를 하자 의용대의 무장선전활동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던 일본군은 그날 저녁으로 500명에 달하는 적군을 동원하여 호가장마을을 포위하고 날 밝기를 기다려 공격을 준비하였다.

  이때 지방유격대 또한 조선의용군 무장선전대가 적들의 포위에 들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적군을 유인하려고 호가장으로 달려와 적들과 접전을 벌렸던것이다.

  총소리에 잠을 깬 조선의용대는 간부와 촌민들을 보호하고 저 마을북쪽으로 길을 잡고 사면공격을 물리치면서 마을을 벗어나고있었다.

탐방팀을 반기는 숙영지옛터 주인 호숙영녀성과 호가장촌당지부서기.

  맨 뒤에서 김학철, 박철동, 손일봉 등이 엄호를 하고있었다. 박철동은 추격해오는 적들에게 명중탄을 안기며 《동지들 빨리 뛰라! 우리가 저놈들을 막을테니...》라고 소리를 쳤다.

  그러던 박철동이 적탄에 부상을 입었다. 박철동은 손일봉에게 《탄약이 없소?》 하고 물었다. 손일봉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수류탄 하나를 흔들어보였다. 이때 일본군소대장이 병졸 일곱명을 거느리고 손일봉을 에워싸며 달려들었다. 손일봉은 날래게 몸을 날려 일본군소대장에게 덮쳤다. 《에익, 왜놈의 새끼…》 그는 왼손으로 그 소대장의 목을 틀어쥐고 오른손으로 수류탄을 뽑아 돌에 대고 탁 쳤다. 《쾅!》 하는 폭음과 함께 일본소대장과 일곱병졸들은 모두 황천객이 되였다.동시에 손일봉도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박철동 역시 덮쳐드는 적병들과 박투를 벌이고있었다. 그는 수류탄으로 한놈의 대갈통을 까부셨다. 그는 기진맥진하였고 이미 놈들의 총칼에 여러곳이 찔렸다. 그는 달려드는 적들을 경멸의 눈길로 쏘아보며 앞가슴을 헤쳤다. 《개자식들, 어서 찔러라…》 야만적인 놈들은 그의 가슴에 총창을 박았다. 박철동은 영용히 최후를 마쳤다.

  이들의 장렬한 최후를 목격한 한청도의 눈에서는 복수의 불길이 활활 타번졌다. 그한테로 또 한무리 적들이 달려들었다. 한놈 또 한놈 명중하며 총격을 가하던 그는 총알이 떨어졌다. 적들은《생포하라!》고 아우성치며 달려들었다. 그는 두눈을 지긋이 감고서서 적들이 몰려오기를 기다렸다. 세놈의 졸병들이 앞뒤로 그에게 덮쳤다. 그는 팔소매안에 넣어두었던 수류탄 도화선을 뽑아제꼈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모두가 하늘로 날아올라갔다.

  전사들은 그 누구나 항일의 길에 나선 그날부터 혁명을 위하여 목숨 바칠 각오가 되여있었으므로 그 어떤 위험도 죽음도 두렵지 않았다. 대오의 맨 마지막에 섰던 장례신은 동쪽고지에 오르다가 중상을 입고쓰러진 김세일대장을 발견하였다.

  김대장은 한손으로 어깨에 멘 서류가방을 벗겨 그에게 쥐여주며 빨리 이곳을 떠나라고 재촉하였다. 《안됩니다! 대장동지, 같이 가야 합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합니다. 어서 나한테 업히세요!》 그는 강경히 등을 들이 밀었다.

돌집앞벽에 써붙인 옛터해설문.

  《안되오. 이 서류는 목숨보다 더 귀중한 조직의 서류요. 꼭 이 서류를 가지고 적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하오. 이건 명령이요!》 김대장은 자기의 권총까지 뽑아 장례신에게 넘겨주었다. 장례신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휘뿌리면서 대오가 간 방향을 따라 달렸다. 그러나 뜻밖에 깎아지른듯한 산벼랑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물러설수도 없고 멈춰설수도 없었다. 그는 생명보다 귀중한 서류를 적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된다는 일념으로 30여미터 높이의 벼랑에서 아래로 내리뛰였다.

  그가 혼수상태에서 깨여났을 때는 총소리도 멎고 사위가 조용하였는데 그의 몸은 산벼랑중턱에 걸려있었다. 어깨에 멘 가방도 손에 든 권총도 그대로 있었다. 그는 기여가다싶이 벼량을 에돌아 산마루고지에 올라섰다.

  그 고지는 호가장에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동남쪽 산등성이였다. 거기에는 김대장도 피못이 된채로 와있었다. 그들은 채 당도하지 못한 여섯 전우를 기다리고있었다. 그러나 박철동, 손일봉, 최철호(한청도), 왕현순(본명 리정순) 4명은 영영 고지로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던것이다...

  우리 일행을 실은 차는 어느덧 호가장마을입구에 당도하였다.

  차문이 열리자 곡식지푸라기가 썩는 냄새가 물씬 풍겼고 파리들이 차안으로 마구 날아들었다. 당년 조선의용군들이 머물었다는 그 큰집을 찾아들어가는데 호숙영이라는 마을녀성이 마중하며 안내를 하였다.

  그가 바로 그 《숙영지》 돌집 주인이라고 한다. 그 돌집은 지금 창고로 쓰고있는데 안에는 낡은 농궤며 가구들이 놓여있었다. 뜻밖에 벽에는 김학철선생이 젊은시절 지팡이를 짚고 외다리를 한채로 찍은 옛사진과 김사량의 사진, 조선의용대창립 당시 기념사진, 그리고 조선의용군숙영지 옛터 관리소조 명단이 걸려있었다.

집안벽에 걸려있는 조선의용대 전사들의 모습.

  천리밖 태항산기슭의 한 오지마을의 어둑침침한 돌집안에서 김학철선생의 미소 띤 모습이며 하나로 뭉쳐 서있는 조선의용대전사들의 의젓한 모습을 바라보노라니 실로 이름할수 없는 비장감이 한가슴 안겨들었다.

  이 집안 어느 구석에서 마지막으로 쪽잠이나마 취하고 장렬히 희생되였을 4명 의용대 전사들… 그나마 우리 조선의용대원들의 휴식터가 되였던 그 돌집안에서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의용대 대원들의 위용을 우러러보았다.

  호가장마을 사람들은 항일전쟁의 앞장에서 용감히 싸운 조선의용군을 몹시 사랑하였고 조선의용대와 팔로군, 지역주민들사이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는 지금도 전해져가고있었다.

  마을사람들 기억속의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세가지 언어에 정통한 청년들이였는데 저들끼리 말할 때는 한국말을 썼고 우리와 말할 때는 중국어로 하고 일본군을 상대로 교란작전을 할 때는 일본어를 쓰는 아주 똑똑하고 지식이 있고 재미있는 청년들이였다. 어린 청년들이 고향이야기를 하거나 일본놈들에게 당한 얘기를 할 때면 함께 울기도 했다. 겨울에는 방이 부족하여 촌민들에게 방을 내주고 청년들은 밖에서 잤다. 로인들이 가여워 솜이불을 덮어주면 청년들은 로인들을 위해 다시 방에 들어와 돌려주군 하였다. 그래서 밤새 이불싸움을 했다》고 한다.

조선의용군추도가를 부르고있는 호숙영녀성(왼쪽)

  호숙영녀성은 언젠가 마을사람들에게서 배운 노래라며 《조선의용군추도가》를 들려주었다. 우리 말 노래를 부르고있는것 같았으나 짙은 방언발음때문인지 전혀 내용을 알아들을수가 없었다. 옆에서 왕춘향해설원이 그 뜻을 설명해주었다. 《조선의용군추도가》는 김학철 작사, 유신 곡으로 되여있는데 그 가사는 다음과 같았다.

  사나운 비바람이 치는 길가에

  다 못가고 쓰러지는 너의 뜻을

  이어서 이룰것을 맹세하노니

  진리의 그늘밑에 길이길이 잠들어라

  불멸의 영령...

  추도가노래소리가 울리는 돌집 뜰안에는 석류꽃이 피여있었다.

왕춘향해설원(왼쪽 첫사람)이 추도가의 뜻을 탐방팀에게 알려주고있다.

  호가장마을사람들은 그번 전투에서 희생된 4명의 조선의용대전사들의 시체를 일본놈들이 훼손할가바 당시 전선지휘부가 자리잡고있었다는 100여리 떨어진 황가평마을 산언덕에다 고이 묻었다고 한다.

  력사탐방일행은 4명 용사들의 시체가 묻혀있다는 황가평마을로 향하였다. 황가평마을입구에는 《조선의용군태항산지구항일전순국렬사기념비》가 세워져있고 마을을 꿰질러 뒤산 언덕에 올라서니 4명 렬사의 묘가 나란히 모셔져있었다.

  박철동(27세) 조선 충청도 출신. 1934년 락양중앙륙군군관학교 제2기생, 19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 1935년 조직의 파견을 받고 화남으로 가다가 일본군에게 잡혀 규슈감옥에 3년간 감금. 1939년 락양에서 조선의용대에 가입하여 맹활약을 펼치다가 호가장전투에서 전사함.

  손일봉(29세), 조선 의주사람. 1931년 청도에서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에 가입. 상해 윤봉길 홍구공원 투탄의거 공모자, 1938년 중앙륙군 군관학교 광동 제4분교 졸업. 그후 포병단에서 활약, 간부훈련단 교관, 탄약대장 력임. 1940년 락양에서 조선의용대에 입대. 1941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선임관으로 적후공작 전개.

  최철호(26세), 조선 대전출신. 1935년 남경에서 혁명에 참가. 1938년 5월 중국중앙륙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 제6기 졸업, 한구지역 조선청년전시복무단과 조선의용대 제1-5전구에서 대적선전사업에 종사, 1940년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과 조선의용대 서안판사처 주임, 1941년 조선의용대 적후혁명무장부대 건립을 위해 대적선전과 유격전을 치름.

  리정순 (23세,가명 왕현순), 조선 평북 벽동출신. 1933년 중국남경 의렬단간부학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2기 졸업. 1936년 2월 민족혁명당 조직검사국의 지원으로 활동. 광동국립중산대학부중 및 중원중학에서 수학, 중앙륙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 1938년 5월 졸업, 이어 조선의용대 입대, 제2지대에서 활동하다가 1940년 남악으로 이동, 유격훈련을 마친 뒤 화북지방에서 임무수행중 호가장에서 전사.

북경대학 외국어학원 연구생들이 력사탐방소감을 밝히고있다.

  탐방일행은 순국렬사들의 무덤을 벌초하고 생화를 올리며 참배를 하였다. 북경대학 외국어학원 연구생 상명명은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리상을 안고 중국의 항일전쟁에 뛰여들어 영용히 피흘려 싸운 당년의 20대 조선청년들의 영웅사적은 너무가 감동적이다. 중국의 항일전쟁을 도와나선 국제주의전사 베쮼동지의 사적은 언녕 알고있었으나 조선의용군전사들의 국제주의영웅사적은 잘 모르고있었다. 이번 력사탐방은 참 의미가 있는것 같다.》며 답사소감을 밝혔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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