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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항산에서의 조선민족영령들(3)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2.10.17일 09:03

80년대중반까지도 나귀를 타고 겨우 십자령에 오를수 있었으나 지금은 뻐스가 통한다.

  우리 력사탐방일행은 태항산항일전쟁사에서 가장 치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십자령(十字岭)전적지 령길에 올랐다. 하북성과 산서성의 접경지에 위치한 십자령은 해발 7000메터,십자령으로 치달아오르는 뻐스는 험한 산세를 타고 우불구불 산중턱길을 따라 숨가쁘게 오르고있었다. 태항산주봉의 하나인 십자령은 거의 돌바위로 된 고산준령이였다. 지금은 가끔 푸른 수풀이며 나무들이 종종 눈에 띄이지만 당년엔 풀 한포기 보기 힘든 벌거숭이 바위산이였다고 한다.

  당시 국민당통치구에서 태항산항일민주근거지로 이동한 조선의용대는 태항산자락을 감돌아 흐르는 청장하기슭의 운두저촌(云头底村)에서 1942년의 첫봄을 맞이하였다.그들은 거기서 군사훈련도 하고 정치학습도 하고 무장선전사업도 전개했다. 그러던 5월 24일, 먼곳으로부터 《쿵쿵》포소리가 들려왔다. 일제놈들의 《5월 대소탕》이 시작된것이다. 일제는 3만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철벽합위》의 전술로 태항산근거지의 팔로군전선총지휘부를 일거에 소멸하려고 날뛰였다.

  팔로군전선총지휘부에서는 전체 전투원들과 비전투원들에게 본부를 따라 이동하라는 긴급명령을 내렸다. 전선총지휘부에는 무장을 한 두개 경위패가 있었을뿐 그외에는 정치부, 후근부, 위생부 등 각 기관의 일군들, 방송사업일군, 문공단 배우들, 로신예술학교 교원과 학생 등 비부장인원들이였다. 이 대오의 총지휘는 정치부 주임 라서경동지였다.

탐방팀일행이 십자령에 올라 한창 수건중에 있는 좌권장군의 기념관을

  둘러보고 진광화, 윤세주 렬사가 희생된 곳을 향해 묵상하고있다.

  조선의용대에는 100여명의 전투원들이 있고 정치사업일군들과 후방사업일군, 10여명의 녀성대원들과 가족들이 있었다. 게다가 물건과 서류상자들을 가득 실은 말과 노새들이 있어 행동이 굼떴다. 이 어려운 나날에 팔로군전선총지휘부와 부사령원 팽덕회동지는 조선의용대를 전투의 앞장에 세우지 않고 보다 안전한 뒤켠에서 대오를 따르도록 하였다.

  적군은 팔로군전선총지휘부 부사령원 팽덕회동지와 부총참모장 좌권동지가 인솔한 대오를 향해 기세사납게 덮쳐들었다. 일본군의 기관총과 박격포가 련속 불을 토하고 땅우에서 총성이 콩볶듯하며 탄우가 비발치듯하는데 하늘에서는 적기가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미친듯이 해댔다. 삽시에 사위는 불바다로 변하고 뒤에서는 적들이 이리떼처럼 까맣게 육박해 올라오고있었다.

  두개 패밖에 안되는 경위부대로는 적들의 진공을 막아낼수 없었다. 이 위기일발의 시각, 조선의용대 박효삼지대장이 비발치는 탄우속을 헤치고 라서경동지를 찾아 팔로군과 함께 생사를 같이하겠다고 나섰다. 라서경동지는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고 미더운 눈길로 박지대장을 바라보더니 《동지들! 우리 생사를 같이합시다! 팔로군경위부대는 서쪽으로, 조선의용대는 동쪽으로!》 하고 령을 내렸다.

  팔로군경위대와 조선의용대 전투원들이 십자령의 동서 두 산머리에 나뉘여 필사적으로 적을 막아내며 팽덕회부총사령을 비롯한 팔로군장령들과 비전투원들의 퇴로를 사수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팔로군 부총참모장 좌권동지와 조선의용대의 지도자 석정 윤세주, 진광화 동지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혈전의 5월 십자령에서 순국한 좌권,진광화, 윤제주 렬사를

  처음 안치했던 공동묘지는 지금 혁명전통교양기지로 되였다.

  좌권(左权)동지(1905-1942)는 호북성 예릉현 사람으로서 황포군관학교 제1기생이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 그는 모스크바중산대학을 졸업한 후 홍군 제1군단 참모장으로 2만 5천리 장정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그는 주덕과 팽덕회를 보좌하는 팔로군작전참모중 가장 젊고 탁월한 군사가였다. 좌권동지는 5월 25일, 우리 대오의 대부분이 안전하게 위험구를 벗어났을 때 적의 포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그해 그는 37세였다.

  좌권동지는 장기간 홍군과 팔로군의 고위지도자로 활약하면서 중대한 전역과 건군계획, 지휘에 참여하였고 군사리론, 전략전술, 군대건설, 참모사업, 후근공작에서 독특하면서도 휘황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여 주은래동지는 《좌권동지는 리론수양을 갖춘 동시에 실천경험을 겸비한 우리 군의 보기 드문 훌륭한 군사가였다》고 하였다.

좌권장군의 령전앞에서 묵도를 하고있는 탐방팀일행

  진광화(陈光华,본명 김창화, 37세), 1911년 조선 평양 대동출신, 193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36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937년 광주중산대학을 졸업한 후 연안중앙당학교에서 학습, 1938년 태항산항일근거지로 들어와 북방국당학교 조직과장, 중공진기로예당학교 부교장을 담임하였다. 1941년 1월 10일, 태항산분구에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를 건립하고 무정장군이 회장을 담임하고 진광화가 부회장으로 구체조직사업을 책임졌다.

  그는 또한 진기로예분회 회장, 화북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정치지도원으로 활동하였다. 몸집이 호리호리하고 키가 큰 그는 늘 온화하고 부드럽고 조리있게 말하면서 동지들을 뜨겁게 포옹해주었다. 그는 언제나 겸손하게 처신하였고 동지들을 조선의용대의 두리에 철석같이 뭉치게 하는 유능한 지도자였다.

  석정 윤제주(石晶尹世胄), 최채동지의 회억에 따르면 《키가 작달막하고 얼굴이 감실감실한 석정동지는 일찍 18살 에 〈3.1운동〉에 뛰여든 반일투사였다》. 그는 조선 경상남도 밀양사람이며 중국신흥무관학교에서 학습하고 나라의 광복대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11월, 중국 길림에서 고향사람 김원봉과 함께 의렬단을 창단하며 귀국하여 일본수뇌괴수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여 징역살이를 한다.

  출옥후 중국에 망명하여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고 1938년 무한에서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건립하는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된다. 1941년 1월 1일, 태항산항일근거지로 북상하는 조선의용대 정치지도원으로 박효삼부지대장과 함께 제1지대와 제3지대를 거느리고 《민생호》배를 타고 중경을 떠난다.

  그는 천재적인 연설가인 동시에 유능한 선동가였다. 그가 작사한 조선의용대 전가 《최후의 결전》(원래는 《최후의 혈전》으로 기재되여있다고 함)은 태항산항일민주근거지로 향한 북상의 길에서, 항일전쟁싸움터에서 전사들의 혁명열의를 북돋우고 멸적의 기세를 북돋우는 군가로 울려퍼졌다.

  최후의 결전을 맞으러 가자/생사적운명의 판가리다/나가자 나가자 굳게 뭉치여/원쑤를 소탕하러 나가자/총칼을 메고 결전의 길로/다 앞으로 동무들아/혁명의 기발 우리 앞에 날린다/다 앞으로 동무들아

  무거운 쇠사슬 벗어버리고/뼈속에 사무친 원을 풀자/무산자대중아 모두다 나가자/승리는 우리를 재촉한다/총칼을 메고 혁명의 길로/다 앞으로 동무들아/혁명의 기는 우리 앞에 날린다/다 앞으로 동무들아

  1942년 7월 31일발 연안 《해방일보》의 기재에 따르면 중공북방국에서는 정의 위해 숨진 조선전우들을 추도하기로 결정을 지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몇년래 적후에서 항전에 참가하여 팔로군과 어깨겯고 멸적의 휘훈을 떨치고있는 조선의용대!》,《국제혁명전우 조선의용대는 중조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로고와 험난을 무릅쓰고 적의 후방에서 우리와 어깨겯고 적들과 완강히 박투하고있다. 이 간고한 투쟁가운데서 석정 등 동지들은 영광스럽게 희생되였다. 이것은 중조 두 민족의 크나큰 손실로 된다. 선렬들을 추도함과 동시에 이 위대하고 귀중한 국제혁명에서의 친선의 정을 기념하기 위하여 〈9.18〉에 태항구 모 지구에서 장례식을 거행하며 구당위원회, 129사 정치부에서 진기로예변구 림참회, 변구정부와 함께 장례식준비를 하기로 결정한다. 기타 각 지구들에서는 〈9.18〉기념회에서 렬사들의 영웅사적을 보고하여야 하며 3분동안 묵도를 드려야 한다.》

《중한 우정의 숲》안내문

  《중국항전이 발발한 5년동안 수많은 조선지사들이 우리 나라의 여러 전장에서 시종 활약하고있다. 이런 견인분발한 의지와 불요불굴의 정신은 우리 전체 군민들이 따라배울바이다》, 《조선 렬사들의 영용한 투쟁업적을 길이 전하며 우리 군민들로 하여금 민족해방투쟁에서의 중조 두 민족의 밀접한 관계를 알게 하기 위해 혁명운동에 종사한 렬사들의 생전경력을 학교의 교재와 전사들의 독본으로 편집해야 한다》,《광범한 군민들은 실제적행동가운데서 국제주의적 우애심으로 조선전우들을 가일층 애호하고 방조하며다 함께 어깨겯고 싸움으로써 일본파쑈를 반대하는 전투가운데서 중조 두 민족의 철저한 해방을 전취해야 한다. 》

  팔로군 총사령 주덕동지는 《자유 위해 희생되였거니 그 생명 영원하리》(1942년 9월 20일발 연안 《해방일보》에서 )라는 글을 발표하여 조선혁명동지들을 추모하였다. 《우리의 조선혁명동지들은 중국의 민족해방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생전에 우리 화북군민과 동심협력하고 함께 간난신고를 겪으면서 숭고한 국제주의정신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전취하는 위대한 지향을 위해 생전에 갖은 박해를 받았고 사처로 전전하였지만 견인분발의 의지력으로 계속 싸움으로써 조선민족의 영용한 애국적기개를 보여주었다.

중한 우정의 숲에서 식수하면서 선렬들의 뜻을 기리고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적점령구역에서 무장선전을 벌이고 유격투쟁을 전개하면서 마지막 한방울의 피까지 다 바쳤고 어떤 이들은 간고한 사업과 생활 가운데서 피로가 쌓여 병이 났으며 나젊은 청춘을 빼앗겼다…자유를 위해 희생된 투사들의 생명은 영원할것이다. 그들의 전투정신은 자유를 전취하기 위해 싸우는 중조인민들의 마음속에 살아있을것이다.그들이 몸바쳐 싸운 위업은 더 많은 투사들에 의해 계승완수될것이다.

  우리는 조선의 우수한 투사들의 희생을 몹시 애석하게 여긴다. 그러나 려명은 오래지 않아 닥쳐올것이다. 우리는 조선의 혁명동지들이 화북의 우리 군민과 긴밀히 단합하고 화북의 20만 조선인민과 더 널리 단결하여 오래지 않은 앞날에 지지리 긴 밤의 어둠을 물리치고 려명의 서광을 맞아오기 위해 굳게 손잡고 용감히 적들을 무찌르며 전진하기를 희망한다.》

  1942년 10월 10일,포성이 울부짖는 가운데 좌권장군, 진광화, 석정 윤세주 렬사들의 장례의식이 하북성 섭현 석문촌에서 거행되였다. 태항산에서 청장하가 굽어보이는 련화산언덕배기 뉘연한 곳에 좌권장군의 묘와 기념비가 그리고 그뒤로 진광화, 윤세주 유체가 안장되였다. 중공대표 리대장, 팔로군 부총참모장 등대원, 야전군 정치부 주임 라서경, 129사 사장 류백승, 정치위원 등소평, 진기로예변구 참의회대표, 조선의용대 대표 최창익 및 태항산 각계 대표 5000여명이 장례식에 참가하였다. 그 이듬해 10월 21일, 중앙인민정부에서는 좌권장군과 진광화, 윤세주 렬사의 유체를 한단진기로예렬사릉원으로 이장하기로 결정하였다.

력사탐방일행은 렬사들 앞에 무릎 꿇고 추모의 글을 올리고있다.

  우리 력사탐방일행은 세 렬사가 처음 묻혔던 태항산맥 련화산자락의 렬사묘지앞에 섰다. 돌로 만든 거대한 무덤앞에는 《조선민족영령》이라는 우리 글 자모가 분명히 새겨져있었다. 우리는 렬사들의 위혼을 첨앙하며 그앞에 머리를 숙였다. 이번 탐방길 발기자의 한사람이며 북경대학 한국류학생 제3대대학원 학생회 회장인 박경철씨가 렬사들께 올리는 추모의 글을 쓰고 제5대 대학원학생회 하두진대표가 무릎을 꿇고 격앙된 심정으로 그 추도문을 랑독하여 올렸다.

  《석정 윤세주렬사, 진광화렬사 그리고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희생된 모든 렬사님들께 바칩니다.

  순결한 조국의 산하가 강도 일본에 빼앗기여 목숨이 위태로울 때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해방을 위해 중국의 중원과 이곳 태항산지구에서 일제와 처절히 싸우다/장렬히 전사한 자랑스런 우리 조선의 아들 석정 윤세주렬사, 진광화렬사/그리고 이름도 남김없이 사라져간 렬사님들의 령전앞에/여기 조선 청년들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렬사님들의 기나긴 피맺힌 투쟁과 희생으로 삼천리 강토는 독립을 맞이하였으나 조국의 산하는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리념은 좌와 우로 나뉘여 질곡과 반목의 력사를 반복하는 사이 우리는 부끄럽게도 자주독립을 향한 렬사님들의 빛나는 력사 그리고 숭고한 정신을 잊어왔습니다.

  조국이 독립하는데, 조국이 하나로 통일되자는데 좌와 우가 뭐가 중요합니까? 하지만 질시와 맹목적인 리념의 광풍은 우리 조국의 몸과 마음을/갈기갈기 찢어놓았고 우리의 력사와 생각까지도 흑백론리로 갈라놓고말았습니다. 하여 조선이 해방이 된지 60여년이 지나서야 우리는 렬사님들의 령전앞에 서게 되였습니다/참으로 부끄럽고 또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조선 남쪽 밀양에서 온 윤세주렬사! 조선 북쪽 평양에서 온 진광화렬사 그리고 이름없이 사라져간 조선의용군 렬사들의 혼령이 깃든 이곳 태항산의 준봉은 우리 조선청년들에게 힘주어 말하고있는것 같습니다. 《괜찮다, 다 괜찮다. 먼길을 에돌아오느라 고생이 많았구나. 이제라도 만나서 반갑고 또 기쁘구나. 조국의 미래는 이제 너희들에게 맡기겠노라!》고 허허 웃으시며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고있으시는것 같습니다.

  렬사들이시여! 우리 조선의 청년들은 이제 잃어버린 우리의 력사를 찾고 렬사님들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여기에 모였습니다. 윤세주렬사, 진광화렬사 그리고 이름도 명예도 남김없이 이역만리 타국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몸바쳐 싸우다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수많은 렬사님들의 조국사랑과 만민 자유의 뜻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올해는 특히 윤세주렬사, 진광화렬사께서 태항산전투에서 순국한지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리고 한국과 중국이 긴 랭전의 어둠을 뚫고 수교한지 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한국과 중국이 혈맹으로 함께 싸우면서 뿌린 피와 우정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과 중국의 빠른 우호와 협력은 결코 없었을것입니다. 감히 그 누가 조국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조선반도와 중국의 영원한 우호와 미래 발전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평화공존의 원천을 묻는다면 우리는 자랑스럽게 손을 들어 렬사님들이 잠들어있는 이곳 태항산을 가리키겠습니다…》

  탐방팀일행은 저마다 렬사들의 령전에 술을 부어올리고 두손 모아 렬사들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중한우호림에 식수를 하면서 중한 우호와 발전의 앞날에 거목으로 성장할것을 다지는 의미를 심었다. 이어 우리는 두세시간 차를 달려 한단진기로예렬사릉원에 찾아가 40도 고온의 열기속에서 좌권장군, 진광화렬사의 무담앞에 깊이 머리 숙여 추모하며 그 유지를 계승, 발전시켜나갈것을 결의하였다.

  윤세주렬사묘앞에서 탐방팀은 그의 고향노래 《밀양아리랑》을 추모가로 합창하여 올렸다. 《석정 윤세주렬사지묘》라고 쓴 유일한 우리 글 무덤앞에 너무나도 오랜만에 울리는 《밀양아리랑》, 그 노래를 들으면서 홀로 외로왔던 윤세주렬사는 잠시나마 안위를 느꼈으리라 믿어마지 않았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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