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북, 어제 하루종일 통화 끊어
정 총리 “굴욕적 대화는 없다”
류 통일 “보류가 아니라 무산”
애초 예정대로라면 남북 당국회담이 한창 열리고 있을 12일, 정홍원 총리는 회담 무산의 원인이 된 ‘격’(급)을 거듭 거론하며 형식에 갇힌 듯한 태도를 보였고, 북한은 북한대로 남쪽과 연락을 끊었다. 남북은 불신의 높은 벽을 실감하며, 북한이 대화를 제의한 6일 이전 시점으로 빠르게 되돌아가고 있다.
통일부 당국자는 “북한이 오전 9시 업무 개시 통화는 물론 오후 4시 마감 통화에도 응하지 않았다. 하루종일 통화를 시도했지만 끝내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말은 ‘회담 보류’를 통보했다지만, 실질적으로는 ‘대화 단절’도 불사하겠다는 모양새다. 북한은 11일 남쪽에 회담 보류를 통보하면서 “우롱”, “도발” 등 거친 언사를 쏟아냈다.
우리 정부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정홍원 총리는 국회 대정부 질문 답변에서 “국민의 자존심”이란 말을 동원해가며 “대화라는 것은 격이 맞아 서로 수용해야지 일방적으로 굴욕을 당하는 대화는 진실성이 없다. 지금까지는 무한대로, 일방적으로 (북한에) 양보했지만 이제는 남북이 격에 맞는 대화를 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도 기자들과 만나 “회담은 (보류가 아니라) 무산된 것이다. 앞으로 북한도 새로운 남북관계로 가려면 성의있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라며 북한의 태도 변화를 요구했다.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파탄에 이르렀던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본격 가동될 수 있을 것이란 실낱같은 기대가 사그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이번 회담 무산의 원인을 “이명박 정부 5년과 지난 6개월 동안 이어진 전쟁위기 속에서 깊어진 상호 불신이 표출된 것”이라고 짚었다. 표면적 이유는 수석대표의 ‘급’을 둘러싼 충돌이지만, 진짜 이유는 ‘상호 불신’에서 찾아야 한다는 진단이다.
전문가들은 남북이 다시 마주앉기 위해선 구체적인 사안을 통해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고 권했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는 “지금 중요한 것은 남북 사이의 시급한 현안들을 해결하는 것이지 격이 중요한 게 아니다. 박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쉬운 문제부터 풀어가야 신뢰 프로세스가 조금씩 가동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남북관계의 세세한 내용까지 지나치게 개입해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통일부에 일을 맡기고 성과를 평가하고 책임지게 해야지, 모든 것을 청와대에서 컨트롤하면 통일부는 역량을 발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변화된 국제 환경에 맞춰 북한이 달라져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유호열 고려대 교수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동향이 남북관계에도 연계돼 있는데, 북한은 오직 자기 기준으로만 판단하고 있다. 북한이 현실감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유동렬 치안정책연구소 선임연구관도 “북한도 과거처럼 일방적 양보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좀더 협조적으로 나와야 한다. 대화를 깨고 새로운 명분만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길윤형 김수헌 김남일 기자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