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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돼지등뼈에 붙은 ‘가난’을 발라내던…‘감자탕 먹는 사람들’

[기타] | 발행시간: 2013.09.06일 14:33

이제는 사라진, 영등포역 앞 감자탕 골목. 뒤로 백화점이 보이고 그 골목으로 홍등이 밝았었다. 황교익씨 제공

◆영등포역 앞의 등골 빠지는 삶 = 1990년대 나는 종로에서 밥을 벌었다. 술집 많은 피맛골은 밥벌이의 노곤함을 풀어주는 최적의 장소였다. 동료들과 어울려 밤늦도록 부어라 마셔라 하였다. 그 중에 부천 사는 선배가 있었는데, 웬만큼 마셨다 싶으면 영등포역 앞으로 가자고 우겨대었다. 거기서 마무리 술 한잔을 더 하자는 것이었다. 종로에서는 전철이 부천까지 그의 몸을 실어주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으나 영등포역 앞에서는 아주 늦게까지 버스가 있었고, 더 늦으면 나라시 택시가 기다려 주었다. 선배가 까라면 까야 했고, 가끔 나는 곧 새벽닭이 울 듯한 시간에 영등포역 앞의 노점에서 감자탕에 소주를 마셨다.

영등포역을 정면으로 보면 오른쪽에 신세계백화점이 있었고 큰길 바로 건너편에 감자탕 골목이 있었다. 예닐곱의 작은 식당이었는데 그 앞의 길까지 식탁이 놓였다. 식당 안보다 노천의 식탁에 앉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겨울이면 노천의 식탁까지 비닐 천막이 쳐졌다. 주방도 바깥에 있었다. 연탄화로 위에 커다란 솥이 놓였고 그 안에는 감자탕 국물이 내내 끓었다. 그 곁에 익힌 돼지등뼈와 감자가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돼지 비린내가 풀풀 났다. 감자탕을 앞에 두고 소주를 마시는 사람들의 몸에서도 그 비릿한 냄새가 나는 듯하였다. 그들은 대부분 허름한 옷을 입었고 거친 노동에 찌든 얼굴과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감자탕에 소주를 마셨다. 칙칙한 그 풍경은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그림 같았다. 가끔 별일도 아닌 것을 두고 시비가 붙었다. 소주병이 깨지고 식탁이 엎어졌다. 서울의 가난이 버거웠을 것이다.

◆홍등의 골목과 경방 = 고흐의 그림 속에 앉았으나 고개를 들어 오른쪽을 보면 신세계가 연출되었다. 현대식으로 말쑥하게 단장한 백화점 건물이 감자탕 골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백화점 바로 옆 골목은 감자탕 골목보다 더 비루한 삶이 있다는 것을. 그 삶을 알게 된 것은 내가 서울에 살기 시작한 1980년이었다. 몸을 파는 여인네들이 그곳에 있었다.

밤늦게 영등포역에 내리면 여자들이 내 앞 또는 옆으로 바짝 붙었다. “쉬었다 가세요.” 몸을 팔기에는 나이가 많은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삐끼일 것이다. 겨우 떼어내고 길을 건너면 거기에도 또 있었다. 지금의 백화점 자리 즈음에 이르면 왼쪽으로 홍등이 보였다. 정육점 불빛이 환하였다. 뒷일을 봐주는 어깨들도 눈에 걸렸다. 도시에서의 욕정은 돈과 폭력이 함께한다는 것을 아직 어린 내 눈에다 확실히 심어주었다. 그래서 영등포역 앞은 내게 늘 두려움의 공간이었고 그 앞을 지나칠 일이 있다 하여도 시선을 두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러던 어느해 그 홍등의 골목이 헐린다는 말을 들었고 그 앞에서 여인네들이 시위를 한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먹고 살지 못하는 삶이 이 번듯한 서울에 있다는 것에 우울하였다. 나를 붙들던 그 나이 많은 여자들의 몸에서도 비릿한 냄새가 났었던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몇년 전 초가을이었다. 서울 음식 취재를 위해 감자탕 골목을 찾았다. 근 20년 만에 그 골목의 노천 식탁에 앉아 감자탕에 소주를 마셨다. 이번에는 한낮에 거기에 앉았다. 가게 수는 줄어든 듯하였으나 감자탕은 여전하였다. 17년 전부터 그 자리에서 감자탕을 팔았다는 할머니를 만나 이런저런 옛 이야기를 하였다. 낮이라 손님이 없었기도 하였고 가을바람이 할머니의 향수를 건드렸을 수도 있었다. 그분은 이제 67세가 됐을 것이다. 정순자 씨이다.

할머니는 경북 문경에서 났다. 아래로 여동생 둘 있는 장녀였다. 입이라도 하나 덜자고 열다섯 나이에 대구로 식모살이를 갔다. 일찌감치 남편을 만나 경기도 언저리로 이주하여 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남편의 벌이가 시원찮았다. 장판 공장에서 일을 하였다. 첫아이를 낳고는 행상을 하였다. 아이를 등에 업고 광주리를 머리에 이었다. 영등포 시장에서 생닭을 받아다 팔았다. 계절에 따라 딸기도 팔고 사과도 팔고 하였다. 1994년부터 감자탕집에서 일을 하였다. 주인이 가게를 아예 맡겼다. 하루 12시간 일하고 한 달에 120만 원을 받는다 하였다.

낮술 탓인지 할머니와 되도록 밝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도 가슴 한쪽이 저렸다. 괜히 일어났다 앉았다 하였다. 기념(?)으로 사진을 남기자 하였는데 기꺼이 포즈를 취해주었다. 사진을 찍으면서 웃어달라 하였다. 지금 와서 사진을 보니 그럴 것이 아니었다. 웃음에 가려진 민낯의 삶을 알기 때문이다. 채플린처럼, 웃음이 더 슬프다.

그날은 큰길 건너 백화점 옆 골목까지 진출하였다. 어둠의 홍등이 있던 곳이었다. 이제 그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는데 더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또 모르는 일이었다. 그 골목을 지나자 화려한 쇼핑타운이 보였다. 타임스퀘어이다. 그 곁으로 붉은 벽돌의 고건물이 있다. 경성방직의 사무동이다. 일제강점기 때의 건물인데 근대유물로 남겨져 있다.

경성방직은 보통 경방으로 줄여 부른다. 경방은 1919년 조선인의 자본으로 설립되었다. 경영주의 친일 여부는 따로 따지더라도, 조선인만 직원으로 뽑아 민족기업이라는 성격을 분명히 하였다. 방직공장의 일은 대부분 여자가 하였다. 당시 방직공장에 입사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안정된 돈벌이가 보장되는 직장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1970년대까지는 그랬다. 경방에 다닌다 하면 중매쟁이가 여기저기 줄을 댈 정도였다. 그 경방이 문을 닫고 그 자리에 거대한 쇼핑타운이 섰다. 여자들이 몸을 파는 홍등의 골목 그 안쪽으로 경방이 있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하였다. 타임스퀘어에서는 조선 식민지의 역사와 대한민국 산업화의 그늘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빠는 것은 = 감자탕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한 억척의 ‘썰’이 있다. 돼지등뼈를 옛날에는 감자뼈라 하였다는 것이다. 감자탕에 감자는 거의 없고 돼지등뼈만 가득하기 때문에 생긴 ‘썰’이다. 이는 감자라는 작물이 우리 땅에서 오래 전부터 있었고 그 이름도 오래 전부터 감자라 하였을 때에야 가능한 일이다. 감자가 우리 땅에 들어온 것은 겨우 1800년대 초의 일이다. 또, 이게 한반도의 농민에게 널리 보급되어 일상식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의 일이다. 그리고 그때에도 감자를 감자라고 부르는 일은 드물었다. 공식 명칭은 마령서(馬鈴薯)였다. 감저(甘藷)라고도 하였으며, 감저는 고구마를 뜻하기도 하여 감자-고구마-감저는 오랫동안 분별없이 쓰였다. 1925년 발표한 김동인의 소설 ‘감자’의 그 감자는 고구마이다. 감자를 감자라고 확실하게 이르게 된 것은, 그러니까 마령서, 감저 등의 말은 사라지고 감자와 고구마의 구별을 명확히 하며 부르게 된 것은 1960년대 들어서의 일이다. 1973년 과학기술처는 ‘생활기술용어 통일안’을 발표하는데, 이 통일안에 비로소 마령서는 버리고 감자를 선택하게 된다. 그러니까 최근래에 들어서야 널리 쓰이기 시작한 감자라는 이름이 수천 년 먹어온 돼지뼈에 붙었을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다. 축산 전문가들도 감자뼈라는 이름의 돼지뼈는 없다고 한다.

한반도의 옛 사람들은 쇠고기를 넉넉히 먹지 못하였다. 농사를 도와야 하는 소를 함부로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돼지는 그런 대로 제법 먹었을 것이다. 아무것이나 잘 먹고 새끼도 많이 낳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도 그렇게 넉넉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돼지를 잡으면 악착같이 살을 발라먹었을 것이다. 이 ‘악착같이’에서 감자탕의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감자탕(위 사진)에는 감자가 겨우 하나나 둘 들어간다. 그래도 감자탕인 까닭은 음식 이름으로나마 위무를 얻기 위한 것이다. 영등포역 앞 감자탕 골목의 정순자 할머니(아래). 감자탕 골목이 사라지면서 할머니도 어디로 자리를 옮겼을 것이다. 하루 12시간 일하고 한 달에 120만 원을 받았다 하였다. 황교익씨 제공

돼지를 잡으면 버리는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뼈와 털 정도였다. 돼지의 것 중에 사람이 소화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먹었다. 뼈도 푹 고아 먹었다. 그래도 살이 가장 중요한 부위여서 이 살을 발라내는 데 온 신경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살을 알뜰히 발라낼 수 없는 부위가 있다. 바로 등뼈이다. 이 등뼈는 굴곡이 져 있다. 칼로 등뼈의 살을 아무리 발라내어도 발리지 않는 살이 있다. 이걸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등뼈에 마지막까지 붙어 있는 살을 가장 쉽게 먹는 방법은 삶는 것이다. 삶으면 살을 바를 수 있다. 그러니까 ‘돼지등뼈탕’은 돼지를 사육하였던 먼먼 선사시대 때부터 있었던 음식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 솥이 있어야 했으니, 삼국시대 때부터 있었던 음식이라 해둘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감자탕에 든 등뼈는 그래도 살이 많은 편이다. 감자탕용으로 살을 좀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예전의 감자탕 등뼈는 발라먹을 것이 정말 적었다. 겨우겨우 붙은 살을 쪽쪽 빨아먹었다. 그래서 이 탕의 애초 이름은 뼈다귀탕이었다. 뼈다귀국, 뼈다귀해장국이라고도 하였다. 살이 워낙 적으니 그릇에 등뼈를 가득 채워줄 수밖에 없고, 그래서 뼈다귀탕이었던 것이다.

뼈다귀탕에 언제부터 감자가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일제강점기 때 감자 재배가 부쩍 늘었으니 그즈음에 지금의 감자탕 모양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일제는 한반도에서 쌀을 빼앗아가면서 한반도 사람들이 먹고 살 식량으로 감자와 고구마를 적극적으로 보급하였고, 그렇게 하여 흔해진 감자가 뼈다귀탕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뼈다귀도 그렇고, 감자도 그렇고, 감자탕은 태생에서부터 하층민의 음식이었다. 소뼈의 설렁탕도 못 먹고, 쌀밥도 못 먹던 사람들의 음식이었다. 그러니 감자탕은 어느 특정의 지역에서 유래한 것도 아니었다. 여기저기에서, 하층민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이 음식이 있었다. 특히 감자탕이 서울에 많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6·25전쟁 이후 하층민이 가장 큰 집단으로 모였던 곳이 서울이기 때문이다. 전쟁 이후 농촌을 떠나 서울로 와 노동을 팔았던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돼지등뼈와 감자는 안주 겸 끼니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영등포역 앞에 감자탕 골목이 형성된 것도 그 까닭이다. 영등포는 사대문 안이나 강남에 비하면 늘 서울의 변두리이다.

뼈다귀탕을 감자탕이라고 이름을 바꾼 것은 서울의 이주 노동자들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 와서 먹는 게 ‘돼지의 뼈다귀로 끓인 탕’이니… 뼈다귀탕이란 이름이 자신의 가난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싶었을 것이다. 감자는, 고향에서 흔히 먹었던 그 감자는, 향수를 불러오고, 그래서 내가 먹는 음식이 낯선 도시의 하층민 음식이 아니라 누군가의 고향에서 먹었던 음식이었으면 하여, 감자 겨우 한두 알 든 돼지등뼈탕을 감자탕이라 이르게 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2012년 어느날 영등포역 앞 감자탕 골목이 헐렸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감자탕집 할머니들이 어디로 자리를 옮겨 장사를 하는지 어떤지 알 길이 없다. 그렇다고 감자탕 먹는 사람들이 줄거나 없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울의 어느 골목에서 여전히 돼지등뼈의 골수를 쪽쪽 빨며 ‘뼛골이 빠지는 삶’을 견뎌내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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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 의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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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령서(馬鈴薯), 감저(甘藷), 감자-고구마 명칭 유래 그리고 돼지등뼈에 붙은 ‘가난’을 발라내던…‘감자탕 먹는 사람들’ 에 대한 지난 이야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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