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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이장희의 스케치 여행]강진 다산초당

[기타] | 발행시간: 2012.03.17일 03:07

다산의 거처 문틈 사이로 茶香이 흘러나오는 듯

[동아일보]

꽃샘추위 속 잠깐 따뜻한 봄볕이 내리쬐던 얼마 전, 전남 강진의 산사(山寺)에서 하룻밤을 묵고 일찌감치 근처에 있는 백련사 동백숲(천연기념물 151호)을 찾았다. 이른 봄 남부지방에 들르면 빼놓지 않고 가보는 곳이다.

▶본보 ‘O₂’ 2011년 6월 11일자 B7면 강진 백련사 동백숲

백련사를 지나 동백숲이 있는 만덕산의 작은 오솔길을 걸었다. 아직 새싹이 올라오지 않은 나무들 사이로 사철 푸른 동백나무의 커다란 잎이 유난히 싱그러워 보였다. 그 잎 사이를 비집고 핀 붉은 동백꽃들. 봄을 재촉하듯 햇살 아래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인적 없는 이른 아침의 동백숲에선 동박새들만 요란스레 나를 반겼다. 숲을 빠져나오자 이내 차밭이 펼쳐졌다. 찻잎 가득한 산기슭. 그래서 예로부터 마을 사람들이 ‘다산(茶山)’이라 불렀던 산. 정약용의 여러 호(號) 중 하나가 바로 이 산의 이름에서 왔다.(그에겐 다산 외에 귀농, 탁옹, 자하도인 등의 호가 있었다.) 바로 여기에 그가 10년 남짓 유배생활을 한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있다.

○ 차를 사랑한 실학자

조선시대, 그리고 귀양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몇몇 있다. 정약용은 그 대표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야심 찬 개혁가였지만, 막강한 후견인이었던 정조가 갑자기 죽으면서 그의 득의시절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급기야 천주교인을 탄압한 신유박해(1801년)에 휘말려 유배형을 받았다. 18년이란 긴 유배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그의 개혁은 피어 보지도 못한 꽃이 되었다. 하지만 고난의 시절 동안 그는 실학사상을 집대성하고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를 비롯한 600여 권의 저서를 집필해 자신의 뜻을 후세를 위한 ‘씨앗’으로 남겼다.

다산초당은 정약용이 1808년 봄부터 1818년 가을까지 지낸 거처다. 그는 호를 다산으로 할 정도로 차를 아주 좋아했다. 죽을 때까지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찻잔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유배생활 동안 책을 쓰면서 차를 얼마나 많이 마셨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지금도 다산이 찻물을 끓일 때 이용했다는, 초당 앞의 넓적한 바위가 오롯이 남아 그의 차 사랑을 떠올려 보게 한다.

○ 숲을 가르는 바람과 차 향기

초당에는 정약용의 초상이 세워져 있었다. 안경을 쓴, 온화한 선비의 모습이었다. 근처를 돌아본 후 툇마루에 걸터앉아 조용한 봄을 만끽했다. 약간 쌀쌀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오로지 이른 봄에만 느낄 수 있는 이 감상, 이 햇살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쏴아, 문득 숲을 가르는 바람. 바람은 거대한 물결이 되어 나뭇잎을 흔들며 지나갔다. 눈을 감고 몸을 맡겨 봤다. 거대한 바람의 강물이 지나가는 한가운데 홀로 있는 섬. 그 느낌처럼 초가에서의 귀양생활은 막막하고 외로웠을까. 바람이 지나가자 고요는 한층 짙어졌다. 새 소리 하나 없는 아침. 그 많던 동박새는 모두 어디로 간 걸까. 순간, 퐁. 작은 연못 위로 동백꽃 한 송이가 떨어져 내렸다. 목이 꺾이듯 통째로 떨어진 커다란 꽃의 파문이 산 속의 깊은 정적을 깼다.

문득 초당의 문이 열리고 정약용이 얼굴을 내밀어 연못을 바라본다. 그의 손에는 붓이 들려 있다. 조금은 피곤한 기색, 조금은 수척한 모습이다. 긴 글을 쓰느라 지난밤을 지새웠는지도 모른다. 글쟁이들이 글에 심취했을 때는 잠도 자지 않고 아침 해를 맞는 것이 흔하지 않은가. 그는 붓을 내려놓고 머름(바람을 막거나 모양을 내기 위해 문지방 아래에 대는 널조각)에 기대 한참 동안 숲의 봄빛을 바라본다. 나 역시 그가 보고 있는 풍경을 오랫동안 함께 바라본다. 끊어졌던 문맥을 이을 방도가 떠오른 걸까. 쿵, 열었던 문을 닫고 그가 사라진다. 초당은 아무 일 없었던 듯 다시 고요해진다. 이제 세상에는 그 고요를 깨뜨릴, 그의 글쓰기를 방해할 그 어떤 바람도, 그 어떤 낙화도 없을 것만 같다. 다산의 길고 긴 글쓰기를 멈출 수 있는 건 오로지 향긋한 차 한 잔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문틈 사이로 가느다란 차향이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 향기는 오랫동안 내 마음을 가만히 움켜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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