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내 연기 보셨죠?”
“무슨 역이길래 무대에선 너를 볼 수 없더구나.”
“풀잎 역이잖아요.”
“풀잎? 그랬어?”
“내가 얼마나 열심히 풀잎을 흔들었다고요.”
“글쎄, 어쩐지 두 번째 풀잎이 유난히 흔들린다 싶더니…….”
학예 발표회가 끝난 후 모녀간의 대화라고 한다. 모 일간지 칼럼에 실린 내용을 발췌한 것인데, 사실 여부를 떠나 요즘의 세태에서 가슴에 와 닿는 바 적지 않다.
그래, 풀잎 배경이 없는 무대에 그저 주연급 몇 명만이 등장했다면 분위기는 얼마나 썰렁했을 것이며, 풀잎 역을 맡은 아이들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았던들 온전한 조화가 이루어졌을 리 없다. 학예발표회 프로그램이나 그 촌극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지만 그 아이는 그러려니 하면서도 평소에 잊고 살았던 것을 그의 어머니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다.
유능한 사람이 그 유능함을 드러내 보이기까지에는 상대적으로 덜 유능한 것으로 치부되는 보다 많은 다수가 필요하고, 어떤 분야에서 이름을 얻은 성공자의 뒤에는 수많은 무명들이 자리하고 있다. 한 사람의 가장이 이름하여 가장으로 불리려면 보다 많은 수효의 가족 구성원을 필요로 하고, 한 사람의 관리자가 성과를 드러낸 이면에는 보다 많은 부서원들의 노력과 열정이 깃들어 있다. 이것이 사장님의 성공을 축하하는 순간보다 많은 사원들이 흘린 땀을 기억해야 하는 이치이다.
백열등을 발명한 사람은 에디슨 한 사람이었지만 지금 시대에 첨단기술을 접목해 우리 삶에 윤기를 더해 주는 존재는 아무개 박사를 위시한 무슨무슨 프로젝트 팀이다. 한때 ‘꼴찌에게 갈채를’이란 화두가 주목을 끌었다. 상위자들을 젖혀 두고 굳이 꼴찌에게만 갈채를 보내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특정 상위자들에게 쏟아진 성과 너머에 그 성과를 도출해 내기까지의 과정과 배경을 기억해야만 한다. 꽃다발 하나를 구성하고 있는 꽃잎 하나하나의 의미를 새기지 못하는 사회는 삭막할 수밖에 없다.
흔히들 이름 없는 꽃이니 이름없는 풀이니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전문가들에게 여쭈어 보면 다들 그럴싸한 이름과 함께 공식적인 학명까지 가지고 있다. 미처 이름을 알지 못한 채 무관심하게 지나쳤을 뿐이다. 이름을 알지 못한 자의 깨닫지 못한 소치일 뿐 결코 풀잎 자체에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 마치 풀잎 배우 역을 맡은 아이가 버젓한 이름을 가지고 있듯이…….
우리 사회 여기저기에 구멍이 뻥뻥 뚫린 것같은 느낌이다. 그것들을 지켜보는 우리들의 마음에도 구멍이 뻥뻥 뚫리고 있다. 각자가 있어야 할 곳에서 자리를 지키면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임에 틀림없다. 풀잎 배우 아이가 그랬던 것처럼 모두들 크건 작건 자기 역할에 충실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접을 수 없다.
이 상실감을 어찌할까? 그래, 옳거니! 내가 하고 있는 이 작은 일에 더욱 충실을 기하는 게 좋은 치유일 수 있겠다. 작은 것부터, 가까운 것부터, 그리고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pjt0041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