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창렬시인의 근작시와 마주하고
심숙
(흑룡강신문=하얼빈) 결국 시는 철학적 사색을 시적인 언어와 시적인 리듬으로 반죽해낸 결과물이 될것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사물이나 사람을 볼 때 피상적인것만 보지 않고 그 본질을 꿰뚫어보기에 늘 안간힘이고 그런 노력이 헛되지 않았을 때 좋은 시의 탄생은 기대해도 좋은것이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변창렬시인의 근작시들은 바로 이와 같은 사유의 비약이라는 줄기를 당겼을 때 그 줄기 따라 묻어나온 감자알 같은 철학적 사색들이 독자들에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흥미롭다.
시 '물의 철학'에서는 물의 속성을 파헤치면서 '가야 할 운명'이라는 사색을 견인해낸다. 결국 물은 우는 소리와 번개소리와 파도소리를 다 담고있어도 또 하늘과 땅을 넘나들어도 가야 한다는 속성을 떠날수 없다. 어차피 가야 하는게 물의 속성이요 물의 운명이라면 우리는 물의 흐름을 지켜보기만 하면 될것이다. 아니 지켜보면서 우리의 자세를 여며보는것이 더 필요한 행위이리라.
시 '갈등'은 날카로운 고양이와 성실한 늙은 주인의 이중주를 담아내고 있다. 먹고싶은 고양이는 발톱을 세워 상모서리를 긁어대며 짜증을 토해낸다. 뾰족한 심술이 아닐수 없다. 주고싶은 주인은 그러나 고양이가 귀여우면서도 고양이의 성급함이 얄밉기만 하다. 그래서 망설인다. 밥을 주었는지 주지 않았는지 시에서는 답이 없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랴. 하나의 장면을 포착해서 인간세상의 한 모롱이를 스케치했으면 시는 그것으로 끝인것을.
시 '별'에서는 거창한 사유가 자유로워 기분난다. 달을 던진 조각들이 별이 되였다는 사유의 비약도 그렇고 발 베일가 신발 신고 걸어야 한다는 메시지도 그렇고 뿔 달린 별이 은하수 칼집에서 날을 숨긴다는 표현이 이색적이면서도 감미롭다. 시인 아니면 상상이 안되는 표현들이요 조합들인것이다.
시 '허수아비'는 말 그대로 벌판에 서있는 허수아비를 스케치하고 있다. 누더기에 숨긴 노을빛이 찬란한가 하면 서너알 새똥이 신통하기도 하고 배부른 저녁상때문에 놓친 시 한수가 아쉽기도 하다. 그러나 시를 놓치면 어떤가. 세상은 허수아비 하나로도 이토록 아름답지 아니한가.
상기 시 네수는 각자 색다른 맛으로 되여있고 시어로 표현되는 사유의 비약이 철학적 사색들을 불러일으키며 독자들에게 사색의 공간을 충분히 남겨주고 있다. 재간있는 료리사는 일반 식재료로도 맛있는 근사한 료리를 조리해낸다고 했던가.
변창렬시인의 시를 최근에 신문잡지에서 두루 주목해오고 있는데 작시솜씨가 례사롭지 않아 가끔 놀라기도 한다. 또 다른 신작들을 기대하는 마음이 흐뭇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