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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사절은 왜서 머리가 떨어졌을까 [제17편]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6.06.16일 11:08
(흑룡강신문=하얼빈) 결론부터 쓴다면 양산(梁山)에는 무덤 귀신만 있었다. 양산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무덤이었다. 그러나 양산에 도착하면서 눈앞에 언뜻 떠오른 것은 웬 풍만한 여인이었다. 택시기사가 말하는 산의 이름은 그대로 여인을 연상케 하고 있었던 것이다."다들 '유봉(乳峰)'이라고 부르지요. 봐요, 모양이 비슷하지 않아요?"

  이른 봄의 양산은 산의 누런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주봉 남쪽의 봉긋한 두 봉우리의 꼭대기에는 탑 모양의 건물이 있었는데, 젖무덤 즉 유봉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별칭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은 의미의 내두산(奶頭山)이라고 한단다.

  유봉은 섬서성(陝西省) 함양(咸陽)의 건현(乾縣) 현성에서 북쪽으로 6㎞ 상거한다. 건현은 당(唐)나라 고종(高宗) 이치(李治)와 무측천(武側天)의 합장무덤인 건릉(乾陵)으로 해서 얻은 이름이다.

  건릉은 유봉 북쪽의 주봉에 있으며 '산을 능으로 삼는' 옛날의 건조(建造)방식으로 인해 산 자체가 거대한 능으로 되고 있다. 마를 건(乾)은 하늘과 지아비, 황제 등을 뜻하고 있으니 건릉이라는 이름은 결국 고무지우개처럼 양산의 여성스런 참모습을 지우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양산은 황후 무측천에 의해 능 자리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고종이 병으로 사망한 후 무측천은 그의 유언에 따라 장안(長安) 즉 지금의 서안(西安) 부근에서 음택(陰宅)의 길지를 선택하기로 했다.



건릉의 무자비(無字碑), 무측천을 위해 세운 이 비석은 글자가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때 황궁의 유명한 방사(方士) 이순풍(李淳風)은 칙지를 받고 진천(秦川)의 땅을 밟고 다녔다. 진천은 지금의 섬서 북부의 평원지대로 옛 진(秦)나라의 땅이라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어느 날, 이순풍은 기이한 돌산을 발견하였다.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흡사 웬 여인이 흰 구름 아래에 다소곳이 누워있는 양상이었다. 이 여인은 이목구비를 오목조목 다 갖추고 있었다. 젖무덤이 가지런히 솟아있었고 젖꼭지가 있었으며 배꼽까지 있었다. 두 다리의 사이에는 또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이순풍은 급급히 주봉에 올라 방위를 잡고 머리핀을 땅에 박아 표식으로 삼았다.

  미구에 무측천이 대신을 파견하여 무덤자리를 확인할 때 기괴한 일이 생겼다.

  "글쎄 머리핀이 면바로 동전 복판의 네모 구멍에 박혀 있더라는 겁니다." 가이드의 다소 흥분된 말이다.

  방사(方士) 원천강(袁天罡)이 이에 앞서 표식으로 동전을 땅에 묻어 놓았다고 한다. 원천강도 실은 이순풍처럼 칙지를 받들고 무덤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는 밤중에 천체 현상을 살피다가 상서로운 기운이 솟구쳐 북두칠성과 서로 교접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상서로운 기운이 똬리처럼 서린 그곳에 원천강은 일부러 동전을 묻어 놓았던 것이다.

  말 그대로 건과 곤, 음과 양이 양산에서 절묘한 만남을 하고 있었다.

  홍도(弘道) 원년(683), 건릉 공정이 시작되었고 이듬해 고종 이치가 능에 묻혔다. 건릉공정은 계속되었고 신룡(神龍) 2년(706)년 중종(中宗) 이현(李顯)이 조서를 내려 무측천을 능에 안치했다.

  주봉의 건릉으로 향한 신도(神道)에 들어서기 전에 가이드를 졸라 유봉에 올랐다. 유봉에 오르는 관광객은 우리가 처음이라면서 가이드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든다. 언덕 같은 나지막한 산마루에 금세 올라설 수 있었다. 산꼭대기의 조형물은 봉화대인 줄로 알았는데 실은 흙무지의 옛터에 상상을 동원해서 각색한 망루였다.



양산의 유봉, 가운데로 신도(神道)가 지나고 있다.

  솔직히 봉화대라고 해도 반론을 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다. 장안 서쪽의 이 산정에 봉화대가 나타나는 게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나라 초기 돌궐과 전쟁이 이어졌고 또 서역을 두고 토번과 쟁탈전이 있었으며 나중에는 대식(大食)과 전투를 벌인다. 대식은 당․송(唐․宋)시기 아라비아를 이르던 말이다. 정말로 봉화대에 불을 지폈다면 분명 당나라의 쇠패를 알리는 신호였다는 얘기가 된다.

  이 전쟁 이야기는 결코 유봉이라는 지명처럼 속인(俗人)의 허망한 상상이 아니었다.

  천보(天寶, 742~756) 연간, 당나라 군대는 대식 정벌에 나섰다. 대식은 속국의 20만 군대를 연합하여 이에 대항했다. 천보 10년(751), 드디어 사상 유명한 전역인 탈라사(怛邏斯) 전역이 시작되었다. 이 전역에서 실패한 당나라는 궁극적으로 세계 최대 제국의 자리를 대식에 내주게 된다.

  이때 대식 연합군에 포로가 된 당나라의 병사 가운데는 제지(製紙) 장인(匠人)이 있었다. 탈라사 전역의 실패는 중국 섬유질의 제지술을 서방으로 전파하는 계기로 되는 것이다. "화가 변하여 복으로 된다"는 속담은 이 같은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똑 마치 전쟁의 실패를 두고 구실을 찾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일행 중 누군가 이렇게 꼬집듯 말한다.

  정말로 억지 구실이 아닐지 한다. 전쟁의 실패는 엉뚱한 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당나라의 야사를 적은 《개원일요(開元逸要)》의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 초기 서역에는 명마가 많이 났다고 한다. 페르시아의 상인이 중원의 종마를 대식에 갖고 가서 명마와 교배, 새끼를 밴 후 다시 갖고 올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을 수용한 안서(安西) 절도사 고선지(高仙芝)는 훗날 당나라군의 장령으로 출전한 인물이다. 고선지는 고구려 유민의 출신으로 일찍 당나라의 서역 정벌에 크게 기여하고 명성을 떨쳤다.

  각설하고, 새끼 말은 성장한 후 과연 몸집이 우람졌으며 모두 전마로 징집되었다. 이에 고선지는 기뻐서 당나라의 준마라는 의미의 '당준(唐駿)'이라는 이름을 지었으며 군대에 있던 옛 말들을 거의 모두 폐기했다. 그런데 탈라사 전역에서 '당준'은 대식의 전마와 접근하면 곧바로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종국적으로 당나라군이 전패한 원인으로 되었다. 페르시아 상인은 대식이 파견한 첩자였던 것이다. 그가 당나라의 종마와 교배시킨 것은 당나귀였으며, 고선지의 '당준'은 준마가 아닌 노새였다.

  '당준'이 싣고 온 비운은 이로써 가셔지지 않았다. 4년 후 고선지는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출전했으나 부하의 모함을 받아 진중에서 참형되었다.

  그런데 목이 떨어진 이 슬픈 이야기는 신도(神道)가 끝나는 주작문(朱雀)門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 주작문 밖의 신도 양쪽에는 각기 석상들이 시립(侍立)하고 있었는데, 웬 영문인지 석상의 머리는 하나같이 전부 댕강 잘려 있었다.



신도 양쪽에 늘어서 있는 석인(石人)과 석수(石獸)는 제왕의 의장대를 의미한다.




주작문의 남쪽에 공경하게 시립한 석인(石人), 하나같이 머리가 떨어져있다.

  신도 양쪽의 석인(石人)과 석수(石獸) 등 석상은 제왕의 생전의 의장대를 상징한다. 그러나 주작문 근처의 석상 군체는 제왕의 의장대를 뜻하는 게 아니었다.

  "'번상(蕃像)'이나 빈왕상'(賓王像)'이라고 해요. 혹은 61번신상(蕃臣像)이라고 하지요." 가이드의 설명이다.

  석상은 신도의 서쪽에 32존이 있었고 또 동쪽에 29존이 있는 등 도합 61존이었다.

  당나라 고종의 장례식에는 민족 관원과 이웃나라의 왕자, 사절이 참석했다고 한다. 무측천은 당나라의 위세를 선양하기 위해 그들의 조각상을 진짜 사람의 크기 모양으로 만들어 이처럼 건릉 앞에 세워놓았다는 것이다.

  석상은 저마다 복색이 다르지만 모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잡는 등 공경한 자태를 하고 있었다. 마치 능 앞 일부러 대열을 지어 황제의 행차를 맞이하고 있는 듯 했다. 당나라는 서방 호인(胡人)의 경교(景敎)가 전래될 정도로 상당히 개방된 나라였다. 만국의 사절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왔다. 건릉 앞에 시립한 61명 번신 석상은 이국 사절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단면도라고 하겠다.

  가이드는 일행이 신라사절의 조각상을 찾자 아주 놀라운 기색을 짓는다. "여기에 신라사절도 있어요?"

  석상의 잔등에는 원래 장례식에 참석한 인원의 국별과 관직, 성명이 각기 낱낱이 적혀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로선 '토화나왕자지갈달건(吐火羅王子持羯達犍)' 등 글의 흔적이 7존에만 약간 남아있을 뿐이라고 한다.

  비록 서안은 대륙의 오지였지만, 중앙정부의 행정기구가 있었고 또 실크로드의 대륙 시발점이었다. 이에 따라 신라를 비롯한 이방의 공식 사절과 구법승의 발길이 아주 잦았다.

  신라는 618년 대륙의 통일왕조로 출현한 당나라와 621년부터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거의 해마다 외교사절을 파견하고 있었다. 와중에 성덕왕(聖德王, 703~737)은 재위 30여 년 동안 무려 40차나 사절을 당나라에 보낸다. 신라 승려도 사절의 대열에 들어 있었다. 당나라에 온 신라의 일부 구법승들은 또 이런저런 원인으로 황제의 소견召見을 받았으며 당나라와 신라 쌍방의 교섭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무튼 신라사절이 건릉 61명 번신 석상으로 있을 개연성이 크다는 얘기가 된다. 실제로 학계에서는 신도 동쪽의 석상 군체에서 제일 마지막 줄에 홀로 떨어져 있는 석상을 신라사절로 보고 있다.

  석상은 백의민족이 잘 다루는 활을 들고 있고 또 신라인들의 옷차림에서 나타나는 3겹의 복장을 갖추고 있다. 위층과 중간층, 아래층 등 3겹으로 옷을 입은 방식은 여러 석상의 복장과 뚜렷하게 구분되고 있었다. 이런 복장은 소릉(昭陵, 당태종의 능묘) 주변에서 발견된 진덕(眞德, ?~654) 여왕 좌대의 하반신에도 또렷이 남아있다. 건릉 근처의 장회(章懷) 태자묘의 벽화 '예빈도(禮賓圖)'에 나오는 신라사절도 이 같은 모양의 옷을 입고 있다.



전시실에서는 신라사절의 신분을 신라왕이라고 적고 있다.

  아니, 뭔가 잘못 된 것 같다. 신라사절의 신분은 신라왕으로 껑충 승격하고 있었다. 장회 태자묘의 전시실에서 그렇게 버젓하게 소개되고 있었다. 신라사절만 아니라 61명의 번신이 모두 빈왕으로 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신하가 감히 왕으로 '자처'하는 이 불경스러운 행동 때문에 석상의 머리가 잘렸을까?…

  뜻밖에도 가이드가 맨 처음 지목한 주범은 번군(蕃軍) 즉 이방의 군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석상의 목을 자른 '흉수'는 8국 연합군이라고 말하지요."

  8국 연합군은 1900년 중국 북방의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고자 중국에 침입한 연합 원정군을 이르는 말이다. 연합 원정군은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이탈리아 등 나라의 군대로 편성되었다.

  이때 8국 연합군은 건릉에 시립한 번신의 군상을 보고 화를 버럭 냈다고 한다. 대륙을 휩쓰는 그들의 군위軍威가 낙엽처럼 땅에 뒹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누군지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석상의 머리를 일부러 베어버렸다는 것.

  사실상 8국 연합군은 서안에 진격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희(慈禧) 태후와 광서(光緖) 황제 등이 멀리 이곳에 와서 연합군을 도피하고 있었다.

  "진범은 인간이 아니고요. 사실인즉 지진이 빚어낸 끔찍한 재앙입니다." 가이드는 이렇게 이야기의 복선을 활 풀어버린다.

  명(明)나라 가정(嘉靖) 연간인 1555년 1월 23일, 섬서성 화현(華縣) 일대에 리히터 규모 8 이상의 강진이 일어났다. 이 지진으로 무려 80여만 명이 숨진 것으로 전한다. 건릉은 화현에서 불과 100㎞ 상거하며 역시 진앙 지대에 위치한다. 이로 하여 건릉도 큰 타격을 입었던 것. 주작문의 석상은 물론 신도 양쪽에 서있는 석인(石人)과 석수(石獸)의 일부도 머리가 떨어졌다.

  잠깐 생각의 끈을 놓치고 망연히 서있었다. 이름 모를 웬 무덤이 불현듯 눈앞에 떠오르고 있었다. 와중에 가이드가 무심히 흘리는 말 한마디가 잠언처럼 마음에 와서 닿는다."머리가 떨어졌다고 해서 그냥 없어지는 게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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