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남경은 중국 관내 조선인 혁명자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중심지로 부상하였다. 김구와 한국림시정부가 남경에 와서 민족통합운동을 전개하였을뿐만아니라 김원봉을 단장으로 한 의렬단도 남경으로 본부를 옮겼다. 김원봉은 대일전선통일을 이룩해내고 각파 혁명
길림군구 군사자료를 보면 1946년 상반기 동북전역에 분포된 150만 조선족주민가운데 70만이 길림성에 살았고 약 60만이 연변지역에 집거해있었다. 이는 연변지역 총인구수의 80%를 점했다. 그리고 군구부대에는 조선족 간부와 전사가 많은 비중을 차지했는데 례하면 길
1946년초에 들어서서 첫단계의 토비숙청을 거쳐 동만근거지인 연변의 토비들은 기본적으로 숙청되여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이 마련되였다. 동만을 더욱 공고히하기 위해 항일련군의 주요지도자들과 연안에서 들어온 간부들은 항일전쟁시기 연안에 있던 항일군정대학과 같
하이얼 코리아 김병렬 대표 인터뷰 (흑룡강신문=칭다오) 하이얼이 한국에 진출한 지도 벌써 8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하이얼은 시장 진입에 있어 진입기, 정착기, 선도기의 3단계를 밟게 되는데, 현재 하이얼 코리아는 두 번째 단계인 정착기에 접어들고 있다. 김병렬 하
오기활 미국인구중 유태인의 비례가 3%지만 미국 유명대학교수의 30%가 유태인이고 미국 억만장자의 40%가 유태인이다. 유태인은 세계인구의 0.25%지만 노벨수상자의 33%가 유태인이다. 유태인의 이런 우수성은 《책의 민족》으로 불리는 유태민족이 어릴 때부터 가정에
1946년 국민당군이 장춘과 길림시를 점령하자 길림성 당위원회와 성정부는 돈화를 거쳐 연길에 도착하였다. 따라서 길림성 군구와 정부기관, 군정학교가 모두 연길로 옮겨졌고 연길은 동만해방구의 정치,군사 중심지로 되였다. 그리고 연변지역은 동북에서 우리군의 가
1946년 6월 26일에 장개석은 중경평화담판의 합의서를 찢어버리고 화북에 집결한 수십만명의 국민당군을 동원해 해방구를 공격하였다. 이로써 반파쑈전쟁이 승리한후 중국에서의 평화적인 노력은 모두 무산되여버렸고 전면적인 국공내전이 시작되였다. 근 1년간의 시간
1946년 5월 18일, 사평에서 철수한 민주련군은 극히 어려운 상황에서도 성공적으로 20만 병력을 송화강이북으로 철수시켰다. 5월 22일에 동북국은 장춘으로부터 할빈에 철수하고 국민당군은 23일 장춘을 다시 점령하였다. 28일 중국공산당 동북국의 지시에 따라 길료성
피어린 장춘 쟁탈전이 끝났다. 전반 전투에서 조선족 열혈청년들로 구성된 조선퇀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두려움없이 싸우면서 장춘을 점령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희생도 적지 않았다. 일반 전사로부터 퇀장, 부퇀장에 이르기까지 280여명 우리 민족의 훌륭한
1946년 봄, 동북에서의 국공량당간의 겨룸은 무력투쟁과 담판의 형식으로 진행되고있었다. 미국제 무기로 무장한 국민당 10여만 주력군이 심양으로부터 본계, 사평으로 공격태세를 취했고 동북민주련군 총사령인 림표는 손에 장악한 팔로군, 신사군 주력부대를 사평부근
1946년 2월에 쏘련군의 철수문제가 첨예하게 제기되였다. 이때는 장개석도 대량의 정예군을 동북에 진입시켰기때문에 쏘련군의 철수를 더 지연하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미국과 영국정부의 촉구도 심해졌다. 미영정부는 쏘련은 주둔기한을 연장한 기회를 빌어 밤낮을 가
1931년 《9.18》사변을 통해 일본침략자들은 중국 동북을 강점하였다. 부유한 동북대지는 일제가 더욱 큰 야망을 실현하는 중요한 기지로 전락되였고 수천만 동북사람들이 일제의 압박과 략탈에 시달려야 했다. 일제의 중국대륙침략은 수억 중국인민의 강렬한 반항을 불
일제가 패망한후 동북에는 토비가 많았다. 이가운데서도 흑룡강성의 토비가 특히 살벌했다. 리화당(李华堂), 사문동(谢文东), 마희산을 두목으로 하는 크고작은 비적떼는 한때 북만 3분의 2 지역을 장악하기도 했다. 비적들은 공산당 간부를 살해하고 백성의 재물을 략
조선의용군이 연변에 도착함에 따라 연변지역의 조선족경비부대는 병력과 조직력을 크게 보강하게 되였다. 복장도 변변치 못한 경비부대에는 총도 제대로 쏘아보지 못한 전사들이 많았고 일제가 버리고간 무기를 주어들었지만 그렇다할 전략전술도 없었다. 하지만 항일
1945년말에 이르러 중국공산당은 신속한 행동으로 동북 대부분 지역에 자리를 잡게 되였고 자유와 해방을 위해 새로운 전투에 뛰여들도록 동북의 광범한 여러 민족인민을 단합시켰다. 항일련군속의 조선인 간부와 조선의용군은 신속히 남만, 북만, 동만에 진출해 조선인
1945년 11월 심양의 조선의용군 군인대회에서는 조선의용군 제5지대를 편성해 동만지역으로 파견했다. 동만은 장백산을 중심으로 한 중국과 조선 국경지역을 말한다. 대체적으로 장백산북쪽기슭의 두만강으로부터 길림시주변까지, 장백산남쪽기슭의 압록강상류로부터 길
아름다운 송화강기슭에 자리잡은 길림성 길림시는 성소재지인 장춘과 더불어 남만과 북만, 동만을 이어주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그리고 토질이 놓아서 일찍부터 많은 조선인이 길림시주변에서 송화강의 물을 리용해 벼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일제가 패망하자
중앙인민방송국을 찾은 흑룡강의 사학자 서명훈. 조선의용군 심양 군인대회가 있은후 조선의용군과 조선독립동맹은 새로운 투쟁방략을 확정하고 중국내에서 중국공산당과 함께 민주주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중국내 동북에 거주하고있는 광범한
팔로군 주덕총사령의 제6호명령에 따라 동북으로 진출해 심양에 모인 조선혁명가들은 군인대회를 열고 중국내의 조선족을 보호하고 중국인민의 해방투쟁에 참여할 방침을 확정지었다. 군인대회의 포치에 따라 조선의용군 제1지대, 제3지대, 제5지대가 신속히 조직되였으
9월 25일, 이틀간 교류와 합작, 창신, 공동리익을 주제로 한 제3회 전국조선족고위층경제론단이 이날 주제보고회를 마치고 원만한 성과로 페막되였다. 조선족 유일한 상장기업인 랑자주식회사의 황국웅부총경리가《주식상장의 가능성과 시도》란 제목으로 본회사의 기업
중앙인민방송국민족방송센터와 중 일 한 경제발전협회, 중국서부발전촉진회에서 주최하고 장백조선족자치현당위, 장백조선족자치현인민정부에서 맡아한 제3회 전국조선족고위층경제론단이 국경62주년을 맞으며 9월 24일오전 산 좋고 물 맑은 아름다운 변강소도시인 장백
[길림신문이 만난 사람]유대진프로필 1959년 10월 10일 한국 충남 논산군 출생 한국 방송통신대학 교육학과 졸업(1990년) 미국 이민(1993년 12월) 미국 캘리포니아 국제대학 심리교육학과 수료(1996년) 미국 샌프랜시스코 한이 TV뉴스 앵커(1995년―1996년) 일요시사 신
눈물로 얘기한다. 허심탄회한 인생고백, 성공기업문화의 정수, 리얼한 현장스토리... 저자 김성순 련재순 一、소영이를류학보내면서 二、초창기시련 三、갈등을넘어서 ●내가본정영채회장 1. 만남 2. 죽음을체험하다 3. 정영채회장중풍 4. 별장에숨은 정 5. 정영채회장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광복을 맞이했지만 가난한 조선족농민의 살길은 여전히 험악하기만 하였다. 비록 쏘련군이 대도시를 점령하고 치안을 유지한다지만 기타 소도시와 농촌은 토비들의 성화가 극심했다. 게다가 국민당특파원이 동북에 들어와 일본군 포로, 괴뢰만주국
○ 김청수기자의
중경에 자리하고있던 국민당통수인 장개석은 일제패망후 전국범위에서 자기의 독재통치를 실현하려는 야심을 품고 세력확장에 서둘렀다. 이를 실현하려면 중국 서남부와 서북부에 모여있는 국민당정예군을 신속히 전국 각지 특히는 전략적요지인 동북에 보내야 했다. 일
동북에 진출한 쏘련군에는 특수한 군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항일전쟁시기 동북대지를 휩쓸며 간고하고도 치렬한 전투를 진행해온 항일련군장병들이였다. 항일명장 허형식(许亨植)과 리홍광(李红光)을 비롯한 수많은 우리겨레 항일지사들이 동북대지에서 소중한 생명을
재한중국동포축구련합회 곽용호 사무총장을 만나 한국 서울, 가리봉동, 대림동 조선족 밀집지역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을 보느라면 '재한중국동포축구련합회 회원모집'광고를 심심찮게 볼수 있다. 이를 보느라면 역시 우리 민족은 축구를 떠나서 살수 없는 민족이구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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