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종(44)씨는 ‘나홀로 귀농족’이다. 벌써 7년째. 김씨는 걷는 법이 없다. 살림과 농사를 병행하다 보니 남들보다 배 이상 부지런해야 한다. 김씨의 하루는 오전 6시에 시작된다. 전날 해둔 밥을 꺼내 먹고 작업도구와 새참거리를 들고 서둘러 밭에 나간다. 밭과 영농조합을 오가며 일하다 보면 날이 저문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오후 6시쯤 집에 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아침에 하지 못한 설거지. 혼자 식사를 하고 인터넷으로 자신이 키우는 묘목을 판매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관리하면 어느새 8시를 훌쩍 넘긴다.
다음날 작업도구를 챙기고 잠이 드는 시간은 오후 9시. 김씨의 일상이다.
그는 세종특별자치시(구 충남 연기군) 전의면에서 나무를 키워 파는 일을 한다. 마로니에 등 20여종의 조경수 씨를 뿌려 묘목으로 자라게 하는 나무 농사꾼이다. 지난 10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차로 30분을 달려 김씨를 만났다.
“외롭지 않으세요?” 첫 질문을 던지자 밭에서 강풍에 날아간 차양 가리개를 고정하는 작업을 하던 그가 피식 웃는다. “외로울 틈이 없어요. 외로우면 실패했다는 증거예요.”
나홀로 귀농 성공법을 묻자 준비했다는 듯 술술 풀어낸다.
“7년 동안 저처럼 혼자 내려온 후배 귀농인이 많았어요. 열에 아홉은 실패하고 돌아갔죠. 나홀로 귀농은 혼자 있으면 안돼요. 혼자 있는 시간은 독약입니다.”
김씨가 밝힌 성공 비법은 ‘어울림’에 있었다. 정착하고 1년 동안 이 마을의 ‘캡틴’인 전의조경수영농조합 임헌균 대표를 죽도록 따라다녔다. 묘목 선정부터 파종, 거름 주는 법, 판매 기법까지 임 대표가 하라는 대로 했다. 귀농 교육에서 배운 방식과 달라도 현장 방식을 택했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려도 마을 사람 모두에게 인사를 했다. 받는 둥 마는 둥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친해지고 보니 “다른 귀농인과 다르게 인사 예의가 바르다”는 평가를 받은 것을 알았다. 대학에서 전공한 전자공학 기술을 살려 마을 수리공이 됐다. 집에 와서 피곤해도 라디오부터 장애인용 전동차까지 모두 고쳐줬다. 보답으로 밑반찬과 함께 마을 사람들의 ‘마음’도 함께 왔다. 그렇게 지낸 지 7년이 넘고 나서 지난달 그는 조합의 준회원이 됐다. 2003년 조합이 만들어진 지 10년 만에 첫 외부 수혈이었다.
임 대표는 “33가구가 조합을 만들면서 ‘더 이상의 조합원은 없다’는 원칙을 세웠는데 김씨 때문에 원칙이 깨졌다”고 웃었다. “도시에서 내려왔다고 폼을 안 잡더라.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쳤는데 잘 따라왔지. 딱 하나 내 말 안 들은 게 3년 전 빚내서 땅 사라고 했는데 안 들었어. 땅값 지금 세 배 됐는데….”
임 대표의 말에 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임대농은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 같다고 했다. 버려진 땅을 1∼2년 옥토로 만들면 땅주인이 자기가 농사짓겠다고 임대 연장을 해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으며 지난해 김씨가 쥔 돈은 6500만원. 종자값과 밭 임대료 등을 뺀 순수익은 5000만원이다. 첫해 500만원에서 이듬해 1500만원, 그 이듬해 3000만원으로 발전해 왔다.
그 돈으로 9살, 6살 아이들 포함해 4인 가구 생활이 됐을까. “귀농할 때 집에서 가져 온 돈도 없지만 갖다준 돈도 한 푼 없어요. 이제부터는 달라져야죠.”
그동안 가정생활은 경기도 분당에서 직장에 다니는 김씨의 부인이 책임졌다. 집에 가는 것은 한 달에 한 번꼴. 땅이 언 농한기인 12월 중순부터 2월까지는 가족과 밀린 정을 나눴다. 내년에는 가족이 세종시 아파트로 내려와 나홀로 귀농족에서 벗어날 예정이다. “내려가는 건 말리지 않겠지만 내려가자 강요하지 말라”던 부인도 김씨의 ‘작은 성공’에 보답하기로 한 것이다.
김씨는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나홀로 귀농이 어려움도 많지만 우선은 가족과 떨어져 홀로 내려올 것을 권했다. 실패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라는 것이다. 37살, 우연히 귀농 세미나를 듣고 엔지니어에서 농사꾼으로 변신한 김씨의 성공은 이제부터다.
국민일보 세종=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