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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첫 조선족화가 -한락연의 생애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1.04.26일 10:44
 "중국의 피카소"

  한락연(韓樂然)은 1898년 길림성 연길현 6도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 부터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했다. 그가 태어난 6도구는 맑디 맑은 해란강이 동으로 흐르고 있었고 거연이 솟은 모아산과 노란 이엉을 인 조선족 초가들이 보기좋게 자리잡고 있어 동네사람들은 물론 동네를 찾아오는 손님들도 그림 같은 동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한락연은 바로 이런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림에 남다른 끼를 보였다.

  성인이 되자 한락연은 길장도세관에서 일하게 되었다. 당시 세관에는 많은 외국인과 외국 서적, 외국 명화들이 많이 걸쳐갔는데 한락연은 저도 모르게 그들을 관찰, 모방, 그리기 까지에 이르렀다. 1920년 그는 세관일을 그만 두고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친구와 같이 상해로 갔다. 상해에 도착한 그는 어릴 때 부터 키워온 그림 그리기를 더 공고히 하기 위하여 상해미술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주경야독을 하면서 중국의 저명한 화가이며 교장인 류해속(劉海粟)의 총애를 받았다. 천성이 성실한 그는 교수님들의 가르침 속에서 꾸준히 소묘데생, 수채화, 유화를 그려 나갔다.

  1924년 1월 한락연은 드디어 졸업을 하게 되고 1월 15일자 한국 "동아일보"신문에는 "중국 미술계의 수재"라는 제목과 함께 "4년간 줄곧 우등생으로 중국 최고의 미술학교를 나온 동포 한락연"이라는 기사까지 실렸다.

  졸업후 한락연은 할빈 보육학교에 가 교편을 잡았다. 그는 이 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다가 체포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고 곧바로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프랑스에서 미술공부를 하면서도 한락연은 자신이 태어난 용정, 상해, 할빈을 잊지 않았으며 식당잡부, 신문사 기자로 뛰면서도 고향에 두고온 친지들을 잊지 않았다.

그가 다니는 프랑스국립 루브르예술학교는 천부적 화재(畫才)를 지닌 그를 말없이 껴안아주었다. 유학 기간 그는 또 유럽 여러 나라들을 다니면서 국제반파시즘운동에 가담했고 프랑스 리옹에서 미술가 려사백(呂斯百), 류개거(劉開渠) 등 미술청년들과 함께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는 이 시기 프랑스 "신인상파"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되었다. 그는 사실적 필법의 기초 위에서 빛과 색깔의 혼용에 특별한 주의를 돌렸다. 당시 프랑스 화가들은 동양에서 온 화가들을 시답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락연은 그들의 그런 우월감을 꺾어 주기 위해 미술에서 더욱 정력적으로 연마를 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의 노력은 헛 되지 않았다. 그의 미술은 높은 수준에 이르렀고 주변의 프랑스 화가들은 그의 능숙한 솜씨에 찬탄을 하기 시작했다. 허나 그렇게 한창 미술에 심취해 있을 때 중국에서 항일전쟁(7.7사변)이 발발했다. 때는 바로 1937년 7월 7일. 유럽고학을 그만 두고 한락연은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무한과 중경, 서안 등지를 다니면서 좀 더 성숙한 작품들을 창작했고 그의 그림은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화풍에 동양 전통의 필묵풍이 가미해져 화면의 층차가 뚜렷하고 입체감이 넘쳤으며 색조가 묵직하면서도 명쾌했다. 거기다 그는 프랑스, 스위스, 영국 등 구라파 여러 나라들을 돌면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그 중에서도 중국의 서북 지역인 란주와 돈황을 다니면서 창작한 작품이 후세에 많이 알려져있고 수채화가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한락연은 돈황과 란주 일대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실개천과 언덕길 그리고 소박한 농민들의 형상마다에 깊은 정을 담았다. 그는 또 중국의 예술보고(藝術寶庫) 중의 하나인 돈황의 벽화에 매료되어 그 황홀함들을 캔퍼스에 담았고 수백개의 동굴 마다에 그의 발자국을 남겼다. 그래서 오랜 세월 지진과 풍화작용으로 하여 감춰져 있던 돈황벽화가 그에 의해 작품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또 중국의 서부지역뿐아 아닌 중원에 있는 화산, 보계에도 들려 많은 그림을 그렸다. 화산(華山)에서 그는 한 달 여 동안 풍찬노숙을 하면서 40여폭의 수채화 작품을 만들어 냈다. 그는 화산지역의 농촌마을의 풍차, 물방아를 그렸으며 찌그러진 산간 마을과 오지의 모습모습들을 그렸다. 그렇게 그는 프랑스 고학을 마치고 돌아온 20년 동안 그림 그리기를 시종 멈추지 않았고 어느덧 50세를 맞게 되었다.

  운명의 조화라고 할가! 아무도 예상 못 했던 일이 그에게 발생했다. 1947년 9월 3일 한락연은 우룸치에서 비행기를 타고 란주로 가다가 그만 조난당하고 만다. 이는 중국 미술계의 큰 별이 떨어진 것이며 조선족 제1세대 화가가 타계한 것으로 된다. 그의 타계는 중국뿐이 아닌 구라파 예술계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영국의 "타임스"지도 그의 조난소식을 전했고 프랑스 옛 화가친구들도 애도문을 중국으로 보내왔다. "중국의 피카소" 한락연. 그는 중국의 예술보고를 발굴, 조명했고 대서북 지구의 해방을 위해 사막에다 보귀한 생명을 바쳤다.

  현재 그의 유작 200여점이 중국미술관에 소장되었으며 한국에서는 그의 유작전시회가 두 번이나 열렸다. 그는 또 타계하기 전까지 늘 한글서적과 일본의 조선침략사책을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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