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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녀걸16] 제1로군 재봉대 대장 김로숙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5.06.26일 10:40
항전승리 70돐 기념 특별기획ㅡ항일련군의 20명 조선족녀걸들(16)

■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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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날 제1군과 제2군으로 무어진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에는 제1로군 제1임 군수부장 엄필순(严弼顺)과 더불어 제1로군의 후방기지를 지켜선 항일련군 녀전사 김로숙(金鲁淑)이 있었다. 그는 제1군도 아닌 제1로군의 재봉대 대장이고 병기수리소, 피복공장(즉 재봉대), 후방병원을 망라한 후방기지 책임자이지만 동만이라 불리운 연변도 아닌 남만에서, 그것도 심산속 비밀후방기지를 전전한데서 김로숙의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오늘날 항일련군 녀전사라하면 최희숙을 알고, 리계순을 알고, 배성춘을 알지만 항일련군 녀전사들중 급별이 가장 뛰여난 김로숙이라하면 사람들은 잘 모르는 실정이다.

김로숙렬사를 한편의 전기로 세상에 선참 알린 이는 력사학가이고 소설가인 고 김운룡(金云龙)선생으로 알려진다. 김로숙전기는 김운룡선생에 의해 1992년 3월 료녕민족출판사에 의해 출판된 《조선족혁명렬사전》 제3집에 실리고, 1995년 1월 민족출판사에서 출판한 《근대중국조선족녀걸》에 다시 실리는 과정을 거치였다. 그런 김운룡선생을 연변일보사 기자시절 통화지구 현지취재차 휘남(辉南)현성 조양진(朝阳镇) 자택에서 만났으니 그날은 1985년 4월 6일 밤. 초면이자 구면인 우리는 11년이란 나이격차와는 무관하게 밤을 패면서 우리 항일사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남만당 책임자 리동광(李东光)의 부인 김로숙에 대하여 알게된것은 그날 밤의 일이였다.

김운룡선생 소개와 그로부터 몇해후 선생의 김로숙전기에 따르면 김로숙은 고향이 경상북도 안동군(安东郡,오늘의 안동시) 월곡면 사월동 태생으로서 1906년 생이다. 김로숙은 철모르던 두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열한살에 나는 오빠 김로흠(金鲁钦)과 같이 어머니 슬하에서 눈물겨운 동년시절을 보내다가 여섯살 때 오빠와 함께 어머니, 할머니를 따라 압록강을 넘어서고 길림성 통화현 청하자(青河子)에 보짐을 풀어놓았다. 그나마 김로숙이 열두살 잡던 해에 어머니와 할머니가 선후로 세상을 떠나니 집안에는 오누이 둘밖에 남지 않아 류하현 사도구(四道沟)에 사는 먼 친척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고한다.

하지만 세월은 부자요 빈자요를 가리지 않는다. 천대와 눈물속에서도 세월은 흘러 김로숙은 18살의 아름다운 처녀로 자라났다. 이해는 1923년이라 김로숙은 삼원포 동명(三源浦东明)중학교 졸업생 리우백(李禹伯)과 결혼식이라고 올리였지만 고아로 자란데서 결혼하는 날 시부모에게 큰절을 할줄도 몰랐고 첫날밤 이부자리를 펼줄도 몰랐다.

그러던 김로숙은 《남만청년동맹》 동지들이 꾸린 야학교에서 중국문과 조선문을 배우게 되고 1925년에는 부부같이 《남만청년동맹》에 가입하고 동맹부녀회 책임을 맡아보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간다고 김로숙전기는 말한다. 김로숙의 혁명선배님들은 진공목(陈公木), 리동광 등 한다하는 조선인혁명가들이였다. 1929년에 남편 리우백이 투쟁가운데서 불행히 희생되였지만 김로숙의 혁명열성은 조금도 시들지 않았다. 이해 1929년에 김로숙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직업혁명가의 생애를 시작하였다.



김로숙의 발자취 어린 홍석라자항일근거지는 반석시 서북 20킬로메터 되는 삼붕향과 명성진 사이에 위치해 있다(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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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은 김로숙으로 말해 잊을수 없는 한해였다. 이해 김로숙은 평소 믿고따르던 혁명선배이고 반석현(磐石县) 반동(磐东)구위서기인 리동광을 사랑하게 되고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리동광은 나이로 보아 김로숙보다 네살 우이고 함경북도 경원군 태생. 리동광 역시 어린시절 부모를 따라 두만강을 건너고 훈춘현 대황구(大荒沟)로 이사한 경력을 가지고있다. 김로숙과 다르다면 리동광은 부모덕분에 1922년에 북간도 조선족의 서울로 알려진 룡정에 가서 사립동흥중학교를 다닌것이라 할까.

리동광은 1927년 10월이후 연변을 떠나 남만으로 활동무대를 옮기게 되면서 1928년 여름 남만지구의 첫사람으로 중공만주성위의 파견을 받은 조선족공산당원들과 손을 잡게되고 녀성혁명가 김로숙과 부부를 이루게 되였다. 1932년에 김로숙은 중공반석중심현위의 지시로 무장대ㅡ부녀대를 조직하니 반석로농유격대와 더불어 몇차례 전투를 벌리며 용맹을 떨쳐간다. 그후 김로숙의 투쟁행적은 부녀대 대장이란 이 시절 경력이 김로숙을 보다 성숙한 녀성혁명가로, 항일련군 녀전사로 띄워줌을 알리고있다.

1933년 5월 7일, 김로숙의 남편 리동광은 중공반석중심현위 서기로 부임하였다. 김로숙은 반석중심현위 부녀책임자로 활동하면서 그해 1933년 6월의 어느날 밤 서버리하투(西玻璃河套)에서 열린 중공반석중심현위 확대회의에 참가하게 되였다. 회의는 당의 통일전선에 대한 중공중앙 《1.26지시편지》를 보다 전달하고 시달하는 자못 중요한 회의였다. 회의가 한창일 때 바깥 보초선에서 적정을 알리는 총성이 들리였다. 100여명 적 《토벌》대가 달려들었지만 적위대원 20여명과 10여명 회의참가자들이 신속히 반격을 가한데서 일순 숨돌릴 기회를 가지였다.

하지만 적아간의 력량대비가 엄청난데다가 우리 측은 보총 10여자루에 약간의 권총들, 탄알도 별반 없은데서 시간을 끈다는것은 말이 아니였다. 김로숙의 남편이고 현위서기인 리동광이 자기가 엄호할테니 괴자항(拐子炕)구위서기 김창근(金昌根)더러 대오를 거느리고 철거하라고 할 때 두손에 권총을 잡고 적들에게 불질하던 김로숙이 10여명 적위대원을 맡겨주면 보증코 적들을 다른데로 유인하겠다고 나섰다.

어려운 과업이지만 리동광은 전투의 세례를 겪어온 안해를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다. 현실의 엄중한 사태를 풀자면 그렇게하는 수밖에 없었다. 리동광이 머리를 끄떡이자 김로숙은 업었던 아이를 다른 동지에게 부탁하고는 적위대 리대장 등 10여명 동지들을 거느리고 버리하(玻璃河)쪽으로 나아갔다.

김로숙 등 10여명 적위대원들이 어둠속에 사라지자 리홍광은 남은 동지들과 함께 한바탕 사격을 퍼붓다가 차차 사격을 줄이였다. 대신 적들의 포위망을 헤치며 강을 건넌 김로숙네가 강변쪽에서 김로숙의 《사격》소리와 함께 몰사격을 퍼부으니 적들은 깜짝 속히웠다. 적들의 주의력이 김로숙 등에게 쏠리고 뒤를 물때 리동광은 나머지 동지들을 인솔하여 어둠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적들은 끈덕지게도 김로숙네를 물고 늘어졌지만 밤새껏 울창한 수림속 여기저기 더러운 시체를 남길뿐 적위대의 행방을 찾지 못하였다. 날샐녘이 되자 김로숙은 동지들과 함께 적들을 감쪽같이 내동댕이쳤다. 약속장소에서 남편 리동광과 동지들을 만난건 그뒤의 일, 김로숙은 진짜 보통내기 녀성이 아니였다.



반석 홍석라자항일근거지 안내비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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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7월 1일에 중공만주성위에서는 리동광이 지도하는 반석중심현위와 남만유격대에 당의 《1.26지시편지》에 좇아 홍군유격대ㅡ즉 중국로농홍군 제32군 남만유격대로 활동하는 남만유격대를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독립사로 개편하라는 지시를 내리였다. 남편 리동광을 통하여 만주성위의 지시정신을 알게 된 김로숙은 남만유격대의 토대우에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를 편성할 조건은 주어졌다고 인정하고 남편과 함께 관련준비사업을 드세게 내밀었다. 8월 27일에는 김로숙 등 동지들의 참가하에 반석중심현위 전문회의를 가지고 상응한 결의를 지으면서 다가오는 《9.18 두돐기념일에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독립사를 편성하자》는 투쟁목표를 확정하였다.

드디여 1933년 9월 18일 9.18사변 두돐기념일에 양정우(杨靖宇)를 사장 겸 정위로 하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가 정식으로 설립되였다. 설립대회 주회장은 반석중심현위 소재지 버리하투에, 현내 각지에 10여개의 분회장이 설치되여 2000여명의 군민들이 참가하였다. 신생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는 중공반석중심현위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는 항일무장대오로서 김로숙은 남편 등 현위의 동지들과 함께 그 얼마나 많은 불면의 불철주야를 보냈는지 모른다.

우리 당이 지도하는 남만 항일무장대오의 신속한 장성과 발전은 적들의 지대한 불안과 공포를 자아냈다. 1933년 10월 1일부터 12월 말에 이르기까지 일본침략군은 이른바 《황군제1사단》을 주력으로 하고 길림수비대와 경비사령부 병력 도합 1만 1000여명을 동원하여 우리 제1군독립사와 버리하투를 중심으로하는 반석 홍석라자근거지에 대해 대거 《숙청토벌》(肃正)을 감행하였다. 홍석랍자근거지를 중심으로 하는 우리 남만의 항일근거지를 향하여 련속 3차의 대 《토벌》을 벌린것은 이 시기의 일이였다.

준엄한 정세하에서 리동광를 선두로하는 중공반석중심현위와 제1군독립사 사부는 전문회의를 소집하였다. 김로숙도 전문회의에 참가하였다. 회의는, 리동광이 독립사 제1퇀과 소년영을 친히 거느리고 반석일대에 남아 적들의 토벌에 맞서 싸우기로 하고, 양정우, 리홍광 등 동지들이 독립사 사령부와 제3퇀, 정치보안련 등 주력부대를 인솔하여 적들의 포위를 헤치면서 휘발하(辉发江)이남의 광활한 삼림지대로 진출하여 유격활동을 벌리며 새로운 유격근거지를 개척하도록 결의하였다. 김로숙은 남편 리동광을 도와 반석유격근거지에 남아 투쟁을 견지하기로 하였다.

1933년 10월 27일(김창국. 남만인민항일투쟁사. 연변인민출판사, 1986년 5월 출판,98페지), 양정우와 리홍광 등이 독립사사령부와 제3퇀, 정치보안련을 인솔하여 휘발강을 건너 강남으로 진출한후 반석일대ㅡ강북유격근거지의 항일투쟁은 엄혹한 시련에 봉착하였다. 적들의 세차례 대 《토벌》로 대부분 군중들이 근거지를 떠난데서 더욱 그러하였다. 급변한 사태앞에서 김로숙은 남편 리동광의 부탁을 지니고 반석 홍석라자근거지에 남은 부대의 부상자와 환자 10여명을 근거지변두리의 다른 야전병원ㅡ밀림속 산굴로 호송하는 과업을 짊어졌다. 이 과업수행에 나선 이들은 김로숙과 김로숙이 이끄는 30여명 무장공작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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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로숙은 무장투쟁 경험이 풍부하고 후방기지전이에 익숙한데서 무장공작대를 인차 척후대와 담가대, 후위대, 전투대로 나누었다. 선두의 척후대는 3ㅡ4명으로 구성되여 적정을 탐지하게 하고 담가대가 그 뒤를 따르며 후위대 7ㅡ8명은 뒤에서 담가대엄호를 맡아 나섰다. 그리고는 절대적인 안전을 위하여 밤에만 행군하도록 하였다.

도처에 적토벌대들이 욱실거리는데서 부상자환자호송에 무척 신경을 써야 하였다. 홍석라자 원지(原地)를 떠난지 벌써 3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오후시간대에 척후대에서 적정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보고가 전해졌는데 어느 야산비탈을 지날 때 그만 한무리 적토벌대와 맞띄웠다. 김로숙은 산마루를 점령하게 하고 부상자와 환자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지만 첫시작부터 전투가 자못 치렬하게 번진데서 무장공작대 거의 반수가 적탄에 쓰러졌다.

해가 지면서 적들은 일단 공격을 멈추었지만 아군은 적들의 포위속에 들었다. 날밝기전에 포위를 헤치고저 김로숙은 튼튼한 전사들이 부상자들을 업고 기도록 하였다. 산과 산사이는 불과 10메터 정도의 거리밖에 안되였지만 그들은 숫눈속을 세시간 푼히 헤쳐서야 눈앞의 골짜기 하나를 가까스로 벗어날수 있었다.

골짜기를 지나고 개활지대를 지나니 큰길이 나섰다. 날샐녘이여서 대오의 뒤에서 몇몇 전사들이 소나무가지로 눈속에 난 발자취를 지우는데 큰길에는 여기저기 화토볼이 타올랐다. 짐실은 마차 약 50대가 서있는것으로 보아 적운수대가 분명하다. 정찰을 거쳐 운수대 앞뒤에 위만군 각기 한개 반이고 중간부위에 일본놈 한개 분대라는것이 드러났다.

김로숙은 적들을 까부시기로 작정하고 소속 무장대를 3개 전투소조로 나누었다. 그리곤 전사 셋을 거느리고 적운수대 중간쪽으로 숨어들다가 화토불가에서 자고있는 일본놈들에게 수류탄 여러개를 뿌리였다. 대부분 적들이 나부러졌다. 다른 2개 전투소조도 적운수대 앞뒤를 무찔렀다. 민부로 나선 마차군들 사이에서 혼란이 일자 김로숙은 제꺽 마차우에 올라가 류창한 중국어로 그들을 진정시킨뒤 속히 현장을 떠나도록 하였다. 우리 대오에는 항일군을 탄원한 민부 둘이 더 늘었다. 아군이 로획한 두대의 마차에 나누어오르자 마차는 큰길을 따라 쌩쌩 내달리였다.

적들의 토벌이 거듭되는 험난한 투쟁속에서 강북에 남은 독립사 제1퇀 퇀장 원덕승(袁得胜), 소년영 정치위원 리민환(李敏焕) 등은 리동광의 두리에 굳게 뭉치였다. 1934년 4월, 강남으로 진군한 독립사 주력부대가 《강남항일련합군총지휘부》를 설립한후 리동광은 등은 5월에 강북 이통(伊通)에서 《강북항일련합군총지휘부》를 내오며 도처에서 적들과 싸웠다. 동북항일련군사료총서ㅡ《동북항일련군 제1군》(孙继英 등. 흑룡강인민출판사, 1986년 6월 출판, 제84페지)에 따르면 1933년 9월 20일부터 1934년 8월 20일까지 기간에 제1퇀과 소년영은 일위군과 도합 33차의 전투를 벌리였는데 그중 두차례외 31차 전부가 승리를 거둔 전투들이였다. 김로숙도 이런 하나 또 하나의 전투를 승리에로 이끈 지휘자의 한사람이였다.



금천하리회의 옛터(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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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차례 또 한차례의 전투속에서 1934년이 흘러간다. 한해가 흐른 1934년 10월에 반석일대에 남은 독립사 제1퇀과 소년영은 리동광의 지시에 따라 실력을 보존하면서 주력부대와 배합작전하기 위하여 강남의 몽강, 휘남, 금천 일대에서 활동하는 사령부와 승리적으로 회사하였다. 이에따라서 김로숙 등은 명령을 받고 반석의 홍석라자를 중심으로 여러 밀영에 산재한 병기수리소, 피복공장(재봉대), 후방병원을 금천하리(金川河里)로 전이시키였다.

1934년 11월 5일 남만당조직은 하리후방기지의 림강현 (临江县, 오늘의 浑江市) 사도이차(四道二岔)에서 남만당 제1차대표대회를 소집(김창국. 남만인민항일투쟁사. 연변인민출판사, 1986년 5월, 제108페지)하였다. 회의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을 창건할데 관한 의제를 통과하고 김로숙의 남편 리동광을 서기로하고, 리동광, 양정우, 기유림(纪儒林) 등을 상무위원으로 하는 중공남만특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1월 7일에는 리동광과 양정위의 지도와 사회하에 림강현 판석구(板石沟)에서 제1사 고급간부회의(김창국. 남만인민항일투쟁사. 연변인민출판사, 1986년 5월, 제108페지)를 가지고 양정우를 군장 겸 정위로 하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을 창건하였다. 남만특위는 제1군의 지도기관으로서 특위기관은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에 따라 신생한 제1군 사령부 부근에 자리잡았다. 중공남만특위와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의 탄생으로 리동광과 양정우는 남만당과 항일무장의 최고지도자로 떠올랐다.

김로숙은 제1군 재봉대 대장 겸 제1군 후방기지 주요책임자로 부임하면서 반석, 이통, 화전 일대 산속밀영들에 산재한 부대가족들을 새로 개척한 금천하리 쪽으로 전이시키라는 새로운 과업을 맡았다. 김로숙은 지체없이 자기의 어린아이를 반일회 회원인 한 중국인농민에게 맡기고는 수십명 무장공작대를 거느리고 나섰고 적들의 엄밀한 봉쇄선을 헤치면서 로인과 어린아이들을 포괄한 부대가족을 새 근거지로 전이시키였다. 한편으로 부대의 군수부장으로 나선 조선족 엄필순(严弼顺), 한진(韩震) 등 동지들과 더불어 금천하리항일근거지 후방기지건설을 보다 힘있게 내밀었다.

금천하리는 오늘의 통화현 국영조양림장 회가구(朝阳林场会家沟)의 심산밀림속, 즉 룡강산맥 (龙岗山脉) 중부의 하니하(哈尼河) 상류지구에 위치하였다. 그 범위는 통화현 흥림진(兴林镇)을 중심으로 동서길이 7.5킬로메터, 남북너비 11.5킬로메터에 미치면서 산이 높고 수림이 무성하여 적들의 통치가 따르지 못하는 산간지대를 이루었다. 해방후 금천현(金川县, 오늘의 辉南县)이 소실되였으나 일제치하기에는 이 일대들에 금천현이 설치된데서 하리지구를 금천하리라고 부르게 되였다.

엄필순과 한진, 김로숙 등의 지도와 노력으로 1934년 11월에 이르러 금천하리의 취류천(지금의 통화현 흥림진) 등 여러 곳들에 이미 5개의 병기수리소가 세워지고 취류천(曲柳川)과 서남차(西南岔)등지에 각기 피복공장이 일어섰다. 후방병원들도 일떠섰다. 김로숙은 상급의 지시로 여러 피복공장들에서 겨울철군복을 다그쳐 짓도록 이끄는 한편 여러 전투부대들에서 호송해 온 부대의 상병원들이 후방병원에서 시름놓고 치료하며 휴양하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김로숙은 또 엄필순과 더불어 30여명으로 구성된 후방부대의 책임자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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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하리에 설치된 하리항일근거지는 동북항일련군 제1군으로 말하면 튼튼한 후방기지로서 부대의 군수물자를 담당하는 휴식과 군정훈련의 장소이기도 하고 부대의 중요한 회의장소이기도 하였다. 이곳 하리후방기지에서 선참 련이어 열린 중요한 회의는 김로숙의 남편 리동광을 중공남만특위서기로 추대한 1934년 11월 5일 남만당 제1차 대표대회와 11월 7일, 남편이 양정우와 함께 소집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의 탄생회의라 하겠다.

1935년과 1936년에도 몇차례 중요한 회의가 하리후방기지에서 열리였으니 1935년 6월, 남편 리동광과 양정우가 하리의 왕륙구(王六沟)밀영에서 부대의 정치사업을 강화할 등 의제를 가지고 연 남만특위와 제1군 지휘부 련석회의가 그러하고, 1936년 7월 초 남편이 또 양정우와 더불어 하리의 회가구(惠家沟)밀영에서 가진 중공남만림시특위 제2차 대표대회가 그러하다. 특위 제2차 대표대회에서는 특위의 지도를 받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을 동북항일련군 제1군으로 재편성하였으니 그 의의는 보다 크다고 할것이다.

하리후방기지에서 열리는 이런 중요한 회의는 김로숙으로 말할 때 부대의 군수부문을 책임진 엄필순, 한진 등과 함께 회의의 절대적 보위와 안전, 식량과 식품 등 후근보장을 담당하는 나날이기도 하지만 또한 남편 리동광을 만나 직접 도와줄수 있고 함께 지낼수도 있는 절호의 나날이기도 하였다.

김로숙 부부는 말이 부부라지만 함께 지낼수가 있는 기회가 극히 적은것으로 알려진다. 앞에서도 스치고 지났지만 강북에서 투쟁을 견지하던 이들이 1934년 10월 강남으로 전이할 때 김로숙은 업고다니던 남편과의 사랑의 결정체ㅡ어린 아이를 당지 중국인 반일회 회원께 입양을 부탁하게 되였다. 지금에 와서 이 어린 아이가 몇살인지, 아들인지 딸인지, 그후는 어떻게 되였는지를 알수가 없지만 부대의 후방기지를 맡아나선 김로숙은 자기일로 동분서주하다보면 남만당 중임을 떠멘 남편과 만나기조차 힘들다. 남편은 남편대로 전방이나 후방에서나 늘 양정우와 같이 주숙하거나 식사하거나 같이 어울리니 더욱 그러한것 같다. 그러다가도 후방기지에서의 회의때면 김로숙은 별반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도 가까이에서 남편을 지켜볼수가 있어 행복한 시각이기만 하다.

1936년 7월 초 항일련군 제1군으로 편성되던 중요회의에 이어 이달 7월에 통화현 흥림진 대혜가골(通化县兴林镇大惠家沟)에서 열린 동만당과 남만당, 항일련군 제1군과 제2군의 련석회의ㅡ하리회의(河里会议)도 김로숙한테는 행복한 시각의 련속이였다. 이 중요한 회의에서 남만당과 동만당을 통합한 동남만성위, 즉 남만성위가 탄생하고 항일련군 제1군과 제2군을 합치여 제1로군이라 부르니 남편은 남만성위 조직부장으로 부임한다. 남만에서 양정우가 1로군 총지휘로 부임되니 동만의 제2군 군장 왕덕태(王德泰)는 부총지휘요, 동만특위 서기 위증민(魏拯民)이 신생한 남만성위 서기로 부임하니 남만특위서기 리동광은 성위 조직부장을 맡게 되였다.

그번 회의에서 조선족 엄필순이 제1로군 군수부장으로 나서고 김로숙은 제1로군 재봉대 대장 겸 1로군 후방기지 책임자로 나섰다. 보기로 대장이요, 책임자요 하니 급별이 낮아보여도 명실공히 군급인물로서 남만지구와 동만지구를 포괄한 최고위급 녀성인물로, 녀성혁명가의 걸출한 대표로 떠올랐다. 이때의 김로숙은 나이 만 30세로서 1로군의 장병들은 흔히 《누님》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김로숙은 동지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면서 조금의 틀거지도 나타내지 않았다.

김로숙 부부로 말하면 이같은 인간다운 모습은 김로숙만의 모습이 아니였다. 남만당의 수령이고 항일무장을 지도하는 리동광은 진짜배기 큰인물이지만 아무런 틀거지도 없는 사람이였다. 사업관계로 리동광은 늘 양정우와 어울리지만 부대내의 많은 동지들은 리동광한테서 부대의 그 무슨 관직을 보아내지 못한데서 큰 인물이라는것쯤은 알지만 그의 신분은 잘 모르고지냈다.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지내며 격이없이 지내니 사람들은 리동광을 《리따거즈》(李大个子)라고 친절히 불렀다.

그러나 1936년 7월의 이 행복한 나날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뒤 얼마안되여 하리후방기지는 일제놈들에게 발견되고만다. 적들이 대거병력을 내세워 하리지구를 중점적으로 토벌하게 되니 하리후방기지를 몽강(蒙江), 집안(集安) 일대의 심산속으로 전이시켜야 하였다. 때는 1936년 8월의 일이다.

하리후방기지 전이과업은 항일련군 제1로군 군수부장 엄필순과 김로숙이 맡아나섰다. 무더운 여름도 가는 때여서 1로군 부대의 겨울나이 복장과 식량을 해결해야 함으로 시간을 다투어야 하였다. 헌데 후방기지의 전이길은 피어린 혈전의 길이여서 엄필순과 김로순이 거느린 수십명 후방부대는 적들과 거듭되는 전투를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몽강, 집안 일대의 심산속밀영은 이런 혈전을 거치며 하나 또 하나 설치되였다. 밀영의 비밀식량창고도 하나 또 하나 일어섰다. 녀성혁명가로 뛰던 김로숙의 희생은 이 시기의 일이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1985년 4월 6일 밤은 불면의 밤이나 다를바 없었다. 이날 밤 남만의 항일운동사에 조예가 깊은 김운룡선생은 여러 이야기와 더불어 김로숙의 최후도 들려주었으니 력사의 시침은 1936년 10월을 가리킨다.

이해 10월 김로숙은 엄필순과 함께 소속 후방부대를 인솔하여 집안현 대청구(大青沟)일대에서 활동하고있었다. 김로숙은 직접상급인 엄필순의 지시로 후방부대의 20여명 전사들을 여러 지방으로 파견하여 식량을 중심으로 하는 후근기지 물자구입에 나서게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대청구숙영지에는 엄필순과 김로숙을 비롯한 10여명 동지들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날 아침 200여명에 달하는 일본수비대 놈들이 들이닥치였다.

너무도 돌발적인 사태라 어찌할 겨를이 없다. 어린 아이를 가진 녀전사들을 전이시키려해도 때는 이미 늦었다. 김로숙과 엄필순은 신변의 경위원과 녀전사들을 지휘하면서 일본수비대와 생사박투를 벌리였다. 사면으로 달려들던 적들은 하나 둘 나부러졌지만 아군도 몇명의 희생자를 내였다. 싸움은 갈수록 치렬해지고 엄청난 력량우세에 의거한 적들은 조금도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최후를 각오갈 때가 되였다. 김로숙과 엄필순을 비롯한 항일련군 제1로군 후방부대 10여명 장병들은 모두가 한사람같이 싸우다가 전부 순국하였다.

항일련군 제1로군 력사의 장려한 한페지, 그러나 아직까지 어디에서도 제1로군 후방부대의 이날의 순국자료를 보아내지 못하였다. 다만 김운룡선생의 그날밤 이야기와 그후 김로숙전기의 최후가 이날의 순국장면을 개괄적으로 알려줄뿐이다.

2015년 6월 20일 새로 정리

편집/기자: [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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