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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녀걸17]6사 재봉대의 한 책임일군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5.07.03일 13:25
항전승리 70돐 기념 특별기획ㅡ항일련군의 20명 조선족녀걸들(16)

■리 함
1

박수환 녀전사 화상사진(자료사진)

모두가 조선사람들로 구성된 항일련군 2군 6사의 녀전사들가운데는 박수환(朴寿环, 1909ㅡ1938년)이라고 부르는 한 재봉대원이 있었다. 그전의 박수환의 가족관계와 래력에 대하여서는 아는바가 없다. 박수환의 래력을 두고 《화룡현의 강가에서 빨래방치로 경찰놈을 까부시고 무기를 탈취》하였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이는 1930년대 초반 적들의 무기를 빼앗아 유격대를 조직하던 시절의 화룡현 삼도구 경내에서 나타난 일로서 삼도구사람으로 보아도 무방할것 같다.

그러나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 재봉대에서 활동한 박수환의 경력과 주변사람들을 보면 박수환은 삼도구가 아닌 개산툰구거나 달라자구로 보는것이 더 어울려 보인다.

여기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화룡현 어랑촌근거지는 1932년 겨울에 정식으로 수립된 항일유격근거지이다. 화룡현유격대는 이 겨울의 어느날 어랑촌에서 조직된후 보다 깊은 산속에 자리잡은 버섯골과 천수동 수림속에 현당위와 현위기관들인 교통처와 비서처 그리고 유격대의 후근기관들인 재봉대, 병기공장, 병원, 장공장 등을 설치하였다. 이런 기관들은 모두 비밀장소에 설치되였기에 아무사람이나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한다. 박수환은 여기 비밀장소의 재봉대원으로 활약하였다. 다시 말하면 화룡현유격대의 재봉대원이고 공산당원이였다.

1934년 가을이후 화룡현 어랑촌근거지의 항일 군민들은 모두 새로 개척된 안도현 처창즈근거지로 전이하였다. 처창즈는 오늘의 화룡시 서성진 화안촌과 그 일대를 가리킨다. 처창즈의 동남차 수림속에는 금곡 연길작탄의 제작자인 박영순이 책임진 화룡현 병기공장과 박수환이 책임자로 있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독립사 화룡퇀 재봉대가 자리잡고있었다.

그때 연길현 상의사 태평구 출신인 김확실 등이 작식대원으로 병기공장과 재봉대 20여명 후근동지들의 식사를 맡아나서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무기수리소ㅡ병기공장에서 뜻밖의 폭발사고가 일어나고 개산툰출신의 강위룡청년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강위룡을 사선에서 구해내고 극진히 간호하여 완치시킨 사람이 김확실처녀였다.

처녀총각은 서로 사랑하게 되였다. 그러나 강위룡이 본의아닌 《민생단》 혐의로 몰린데서 둘은 비밀약속만 하였을뿐 정식결혼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있었다. 그럴 때 《사랑하는 둘이 좋으면 되는거지, 주저할것이 무어나며》 처녀총각의 뒤를 밀어준것이 재봉대 책임자 박수환과 병기공장 책임자 박영순이였다. 드디여 힘을 얻은 김확실과 강위룡은 처창즈인민혁명정부에 가서 정식 결혼등록을 하게 되였다.

재봉대와 병기공장의 두 책임자인 박수환과 박영순은 같은 비밀장소에서 일하는데서 서로 허물없이 보내고있었고 달라자시절 연길작탄 제조랑 둘러싸고 주고받는 이야기들이 가담가담 섞이였다. 이런 사실들을 보면 박수환은 화룡현 달라자 사람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달라자의 이런저런 항일이야기들에 대해서도 박수환은 알고있었다. 물론 화룡현 중공삼도구구위 제1임 부녀위원 황정옥(항일렬사)이 개산툰일대와 달라자일대에 파견되여 활동한것처럼 삼도구사람으로 달라자에 가서 활동할 여지도 없지 않다.



1991년 11월 14일 처창즈항일근거지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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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1월 4일, 처창즈반일자위대 대장출신인 항일로간부 려영준을 모시고 유서깊은 처창즈근거지를 답사할 기회를 가지였다. 원 화룡현 와룡향소재지에서 북으로 화집령과 오도양차를 지나고 묘령이라 불리우는 목도고개를 넘어 굽이굽이 산고개를 따라 북으로 내리면 산골벌방인 처창즈 화안촌에 이르게 된다. 화안촌은 1959년 구역획분시기까지만도 안도현 만보구에 속한 마을이였는데 화룡현 와룡향으로 귀속된것은 1974년이였다. 후에는 또 와룡향이 취소되고 화룡시 서성진 화안촌으로 나타났다.

항일로간부 려영준의 현지소개에 따르면 오늘의 화안촌이 자리잡은 벌방구역이 연길현 왕우구정부 자리이고 연길1퇀과 화룡2퇀은 화안촌에서 동쪽으로 고동하물을 따라 3-4키로메터 되는곳에 자리잡고있었다. 그곳 산밑의 펑퍼짐한 구간이 처창즈 아동유희대와 연길현 팔구정부가 자리잡았다. 화안촌에서 남으로 역시 3-4킬로메터 떨어진 동남차에 옹구정부가 자리잡았고 그곳 더 깊은 산속에 박수환 소속 화룡2퇀 재봉대가 자리하고있었다.

1935년 음력 8월, 위만군을 앞세운 일제놈들은 동으로는 오도양차방면, 북으로는 스치개방면, 서쪽으로는 안도방면 등 세갈래로 나뉘여 세번째로 처창즈근거지를 향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전투는 련며칠 그칠줄 몰랐다. 연길1퇀과 화룡2퇀이 여기저기서 적들과 혈전을 벌이고있을 때 박수환은 재봉대 녀전사들과 함께 싸우는 고지에 올라 적들에게 돌벼락을 안기였다.

근거지의 아동단원들도 고지에 나타나 혁명가요를 부르면서 혁명군아저씨들의 사기를 높이였다.

싸우는 근거지! 근거지는 진짜 말 그대로 혁명군아저씨들과 재봉대원들, 아동단원들, 혁명군중들이 힘을 합친 불멸의 영웅서사시였다. 처창즈근거지에 덮쳐든 적들은 도처에서 우리 항일군민들에 의해 얻어맞는데다가 눈이 내리고 추위가 시작되니 근거지에서 물려갈수밖에 없었다.

1935년 음력 10월, 박수환 소속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화룡2퇀은 처창즈근거지에서 주동적으로 철거하였다. 이해 음력 10월 9일, 즉 양력 11월 4일에는 하늘아래 첫동네라는 장백산밀림의 안도현 내두산마을에 들어섰다. 당시 연길1퇀은 이미 미혼진에 진출하여 밀영생활을 하고있었다. 처창즈 동남차의 병기공장, 재봉대, 병원 등 후방기관도 륙속 내두산으로 전이하였다. 2퇀 퇀부와 병기공장, 재봉대 등은 당시의 내두산 마을, 지금의 내두산 첫 마을에서 수림속으로 약 3리 떨어진 곳에 귀틀집을 짓고 주숙하였다. 가까이에는 넓은 훈련장도 번듯하게 닦아놓았다.



1991년 11월 15일 내두산 왕덕산 중턱에서 바라보는 내두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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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두산은 안도현 송강에서 100여리, 장백산에서 70여리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산간마을이다. 마을에서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들어온 스무서너세대의 조선족농민들이 살고있었다. 그들가운데는 한때 무기를 들고 일제와 싸웠던 독립군전사들도 있었다. 조선사람들이 대부분인 제2퇀은 내두산에 자리잡은후 주민들속에서 군중정치사업을 활발히 벌리였다. 그때면 인민혁명군 녀전사들이 박수환 등이 선두에 나섰다.

박수환과 녀전사들은 군중들앞에서 선동강연을 할 때면 일제의 침략죄행을 폭로규탄하면서 백두의 심산속에서 마음놓고 살자면 일제침략자를 쳐부셔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한편 부대는 야외무대를 꾸미고 무기탈취투쟁, 녀성해방,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는 다양한 내용으로 연극을 공연하였다. 연극의 배우들은 박수환과 재봉대의 녀전사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아동유희대도 연예공연에 참가하여 내두산군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그 인상가운데서도 보다 깊은 인상은 아동유희대가 부르는 조선민요 아리랑 합창이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열두 구비

마지막 고개를 넘어간다

청천하늘에는 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수심도 많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동유희대의 아리랑노래에 성수난 박수환 등 근거지군민들은 노래자락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어느덧 흥겨운 춤은 공연장을 메우며 번져갔다.

1935년 이해 11월의 어느날 부대에서는 100여명 군중대회를 소집하였다. 박수환과 녀재봉대원들도 군중대회에 참가하였다. 대회에서는 위만주국이 설치한 구장제도를 페지하고 정권의 직능을 가진 농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농민위원회는 중공안도공작위원회의 지도밑에 부대의 량식조달과 운수, 땔나무해결 등 후근사업을 주로 맡아보았다. 부녀회와 아동단 조직도 마을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내두산항일근거지는 동만으로 불리운 연변 최후의 근거지로서 천고의 밀림으로 뒤덮힌 장백산 고산지대에 거연히 일어섰다. 적들은 새로 일떠선 근거지를 하루 빨리 없애버리려고 은근히 벼르고있었다.

1935년 음력 11월 20일, 일본수비대와 위만군 100여명이 박격포까지 끌고 내두산근거지를 치러왔다가 우리 군민의 반격을 받고 쫓겨갔다.

1936년 1월 중순, 몇백명의 일본군과 위만군이 내두산근거지를 재차 대거진공하였다. 당시 근거지에는 40여명의 혁명군전사들과 후방기관, 부상병들, 박수환 등 녀전사 약간명 밖에 없었다.

가렬한 싸움은 내두산에서 벌어졌다. 40여명 혁명군전사들은 포대를 진지로 하여 결사적으로 반격하였다. 전투는 3일동안 지속되였지만 적들은 내두산근거지를 점령하지 못하였다. 대신 아군진지에는 희생자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탄알도 별반 남지 않았다. 이럴 즈음에 마을쪽에서 박수환 등 재봉대원들과 작식대원들이 앞장서며 아동단원들, 부상병들과 같이 싸우는 고지에 올랐다. 박수환과 여러 녀전사들 그리고 아동단원들은 앞뒤로 뛰여다니며 바위돌을 맹렬히 굴리면서 부대의 한쪽팔이 되여주었다. 그들은 가끔 멸적의 함성을 지르며 싸우는 혁명군들을 고무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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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지 마을사람들은 비발치는 탄우속을 헤치며 고지에 탄약을 날라갔고 더운물과 식사를 마련해주었다. 조선독립군에서 싸운적 있었다는 한 로인은 탄알을 지고 고지에 오른후 총 한자루를 얻어들고 전투에 나섰다. 그에 크게 고무된 박수환 등 녀전사들은 싸우는 한편 처창즈근거지에서 넘어온 아동단원들과 함께 조선민요와 혁명가요를 힘차게 불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

아리랑노래에 이어 “총동원가”가 울려 퍼지였다.

나가자 나가자 싸우러 나가자

용감한 기세로 어서 빨리 나가자

제국주의 군벌들은 죽기를 재촉코

강탈과 학살을 여지없이 하노라

왔고나 왔고나 혁명은 왔고나

혁명의 기세는 전세계를 덮었다

돈 없은 로동자 망치메고 나오고

땅 없는 농민은 호미메고 나오라

밥 짓던 누나는 식칼 들고 나오고

글 짓던 오빠는 붓대 들고 나오라

아세아 무산자 구라파 로동자

전세계 무산자 총동원 하여라

… … …

우리 부대는 사기충천하였다. 용맹한 화룡2퇀 장병들과 혁명군중들앞에서 적들은 쩔쩔 매였다. 부대에서는 밤마다 야간습격조를 조직하여 적들의 주숙지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근거지군민들이 한마음으로 싸운데서 적들은 끝내 숱한 살상자를 내고 패주하고말았다. 박수환 등 녀전사들과 아동단원들은 내두산보위전에서 마멸할수 없는 공훈을 세웠다.

내두산근거지군민들은 적들의 “토벌”을 물리쳤지만 식량난에 부딪쳤다. 마을의 식량으로는 이어대기 어려웠다. 내두산 농민위원회에서는 매일 곡식을 방아에 찧어 부대에 공급하는 한편 건장한 사람들을 량강구와 조선의 혜산에 수차 식량구입을 내보냈다. 부대가 두달동안 먹을수 있는 식량과 기타 필수품이 마련되였다. 이 기간에 박수환은 재봉대녀전사들과 아동유희대를 이끌어 근거지군민들속에서 경상적으로 연예공연을 펼치면서 혁명가요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들이 부르는 “아리랑”과 “결사전가”는 보다 인상적이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

착취받고 압박박던 무산대중아

혁명의 전선에 달려나가세

다달았네 다달았네 온 천지에

무산혁명 시기가 다달았네

여지없이 부셔내자 부르죠야사회를

낱낱이 박멸하자 제국주의아성을

농민은 호미와 괭이를 메고

로동자는 망치를 둘러메고

부르죠아 박멸하는 최후결전에

활발발 나는듯이 달려나간다

… … …

하면서도 내두산은 부대가 오래 머무를 곳이 못되였다. 다른 마을과 멀리 떨어져있어 운수선이 먼데다가 적들의 봉쇄까지 심하여 말이 아니였다. 동만특위와 군부, 2퇀 퇀부는 토의를 거쳐 내두산근거지를 떠나 남만에 진출하기로 결정하였다.

1936년 2월 21일, 2퇀 퇀부는 군중대회를 열었다. 농민위원회산하의 140여명 군중이 참가하였는데 2퇀 퇀장 장천옥이 연설하였다.

《…우리는 식량난에 부딪쳤습니다. 여러분들은 친척들을 통해 일찌감치 식량을 마련하기 바랍니다. 다른곳으로 이사가려는 분들은 이사가도 됩니다.…》



1983년 11월, 화룡현 항일전사좌담회에 참가한 김선(오른쪽 첫번째) 녀전사.

김선은 항일련군 2군 6사 녀전사로서 박수환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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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대회후 화룡2퇀 부대는 수림속 병영, 병원, 병기공장, 재봉대 등 귀틀집들을 태워버리고 내두산을 떠났다. 군중들은 눈물을 뿌리며 부대를 바래였다. 박수환 등 2퇀 전사들도 눈굽을 적시였다. 그들은 항일의 승리를 기약하며 내두산 서남쪽에 있는 무송현 마안산일대로 진군하였다. 그해 1936년 3월, 박수환 소속 부대는 항일련군 제2군 3사로 확대개편되였다가 얼마후 다시 2군6사로 재편성되였다. 박수환은 의연히 6사재봉대의 주요 책임일군이였다.

1936년 봄 박수환은 소속 부대를 따라 무송현 각지에서 활동하면서 만강전투, 서강전투 등 일련의 전투들에 참가하였다. 이해 8월의 무송현성진공전투후에는 또 소속부대를 따라 되골령을 넘어 장백현으로 진출하였다. 이해 9월의 장백현 대덕수, 소덕수 등 전투들과 가을이후의 전투들에도 의례 참가하여 항일련군의 녀전사답게 용감히 싸웠다.

1937년 6월 4일 밤, 박수환 소속 항일련군 2군 6사는 장백현 22도구구시골 압록강 대안인 조선 보천보전투를 벌리였다. 보천보전투를 앞두고 6사재봉대에는 6사원정부대가 입을 새 군복 짓기 과업을 맡았다. 그때 6사재봉대 대장 최희숙이 김일성의 파견을 받고 장백현 도천리 일대 정치공작원으로 파견된데서 박수환의 책임이 중하였다.

박수환은 재봉대원과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둑나무와 황경피나무의 껍질을 벗겨서는 흰강목과 함께 솥에 삶아 군복색을 내기도 하고, 군복색으로 물든 천을 꺼내 말리우기도 하면서 주어진 시간내에 많은 여름철 군복을 만들어냈다. 한데서 6사원정부대는 장백현 19도구 지양개에서 모두가 산뜻한 새 여름군복을 갈아입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 보천보전투에 뛰여들수 있었다.

1937년 한해는 2군 6사 부대가 지도한 장백현 항일투쟁의 전성기로서 이해 6사부대에 가입하는 신전사들이 아주 많았다. 이해 가을 6사 사령부에서는 재봉대에 또 신전사들에게 공급할 새군복 100여벌을 일주일안으로 만들라는 새 과업을 주었다. 과업은 곧 명령이였다. 박수환과 그가 이끄는 재봉대원들은 밤잠도 설치면서 또 기일내에 100여벌의 새군복을 지어내는 성과를 올리였다.

1937년 겨울이 되면서 박수환과 재봉대원들은 부대를 따라 몽강현 마당거우밀영에 전이하여 군정학습에 참가하게 되였다. 1938년 봄부터 부대는 압록강연안에서 춘기공세 등을 벌리면서 적들과 싸우다가 겨울을 잡으면서 다시 몽강현 남패자에 들어갔다. 이해 1938년 12월 초에 박수환 소속 2군 6사는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으로 개편되면서 12월 초부터 이듬해 1939년 3월말까지 몽강현 남패자에서 장백현 북대정자에 이르는 고난의 행군을 개시하게 되였다.

새로 개편된 2방면군(총지휘 김일성) 사령부에서는 1938년 12월 초 압록강연안 장백으로의 출발을 앞두고 소속 재봉대에 다음해 부대군복을 지을 과업을 맡기였다. 박수환은 재봉대녀전사들과 더불어 남패자의 산속에서 륜번으로 낮과밤이 따로없이 부지런히 재봉기를 돌리였다. 그러던 어느날 제2방면군 재봉대는 우세한 적들의 불의의 습격을 받았다. 박수환은 재봉대원들을 엄호하면서 선두에서 마지막 탄알이 떨어질 때까지 영웅적으로 싸우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지금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 녀전사 박수환렬사의 유해는 조선 평양의 대성산혁명렬사릉에 묻히였다. 사진까지 박힌 반신상도 세워져 사람들이 박수환임을 알아보게 한다.

2015년 3월 21일 정리

편집/기자: [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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