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8년 전, 입사를 축하한다면서 친구가 ‘난데없이’ 팔레놉시스(蝴蝶兰)를 선물했다.
팔레놉시스, 충분히 물과 비료를 줘야 하고 게다가 실내공기가 너무 건조하면 개각충이나 응애가 발생하기까지 하는 이 예민하고 손이 많이 가서
키우기 어렵다는 식물, 그때는 나 자신을 점점 잃어가는 길고 길었던 시험공부 나날을 버티고 어렵게 입사시험에 합격하면서 많이 지쳤던 시기였다.
그런 나를 위해 살아있는 생명을 곁에 꼭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랬다. 나는 ‘흔쾌히’ 팔레놉시스를 받아 해볕이 잘 드는 창문가에 모셔뒀다. 무려 ‘거금’을 들여 너무 화려해서 언뜻
촌스러워보이기까지 한 화분통을 구매하기까지 했다.
나 자신을 돌보듯 섬세하게 다뤄야겠다고 다짐했다. 팔레놉시스가 곱게 꽃을 피우면 나 역시 그렇게 꽃길을 걷게 되겠지, 하지만 사람들은 오며
가며 팔레놉시스를 걱정해줬다.
“키우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네가 키울 수 있겠니?”
당연히 꽃은 피지도 못했고 팔레놉시스는 죽었다. 한달을 버티지 못했다.
밑둥에 곰팡이가 생겼고 물컹하니 썩어버렸다. 기분이 묘했다. 이 사무실 안에서 나도 팔레놉시스와 운명을 같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잎이
누렇게 뜨면서 소멸해가고 있는 건 아닌지.
푸훗, 청승맞은 감정이다.
버려진 팔레놉시스를 사람들은 걱정했고 정작 그들은 난 걱정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몇년 뒤, 나는 이제 관리하기 어려운 식물 대신 작은 선인장을 사 책상 우에 올려뒀다. 한달에 한번만 물을 주고 해빛에 잘 로출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산다는 그 선인장 말이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하면, 그런 선인장까지 죽여버린 사람이다. 그런데 내 사이코 성향이 발현돼서일가? 선인장까지 죽자 팔레놉시스가
죽었을 때와는 다르게 묘한 성취감이 생겼다.
선인장은 죽기도 어렵다는 데, 남들은 그러기도 힘들다는데 그 어려운 걸 내가 해냈으니 말이다.
나는 선인장을 죽였다.
그러자 주변에서 다들 그런다.
“네가 살이 세긴 센가 봐.”
내가 종교는 없지만 렴치는 있다. 기도라도 해야 할 판에 면식도 없는 신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기는 미안하더라. 그래서 사주를 보러 갔다.
올해부터는 운이 철썩 붙을 거라고 했다. 위안 아닌 위안이다.
문득, 지금까지 여럿 식물을 죽인 거 빼고 내가 알차게 나를 위해서 해놓은 건 뭐가 있는지 고민스럽다.
녀자에게는 ‘마의 고비’라는 서른을 넘겼다. 지금보다 많이 어렸을 때에는 압박이 크지 않았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시기이고 앞으로가
기대되니 지금 당장은 많은 걸 못 가져도 괜찮다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나면 세상의 눈은 매정하게 바뀐다.
‘그 나이 먹도록 뭐했니?’라는 식이다.
그러게 나는 과연 뭘 했을가?
애초에 세웠던 계획을 하나도 완성 못했으니 나는 나이값을 못하는 게 분명했다. 이젠 후배들마저 알차게 경력을 쌓아가며 직함 등급을
올려간다. 정작 라태한 나는 괜찮은데 사람들이 나를 불쌍하게, 한심하게 보니 나도 좀 비참해지려고 한다. 아니 확실히 비참하다. 원래는 비참하지
않았는데 남들이 그렇다니 좀 그렇다. 이건 내 삶인데, 내 기분인데 왜 타인의 평가에 따라 괜찮았다가 불행했다가 하는 걸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이 나이에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내 나이에 걸맞은 것들을 소유하지 못한 게 아니라 나만의 가치나 방향을 가지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연변일보 신연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