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북한이 국제사회를 향해 핵무기 개발 야욕을 드러낸 지 12일로 정확히 20년이 됐다.
북한은 비밀리에 진행해 오던 핵무기 개발 작업이 들통나자 1993년 3월12일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성명을 발표하며 벼랑끝 전술을 폈다. 한·미 양국은 그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막기 위해 화전(和戰) 양면의 외교적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북한은 3차례 핵실험으로 ‘실질적인 핵파워’로 떠오른 반면 한국은 핵능력의 비대칭으로 안보위기를 맞았다. 동맹국 미국은 북한의 핵보유가 아니라 핵확산을 더 걱정해야 할 판이 됐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20년 전과 오늘, 미국이 새겨야 할 교훈’이란 기사에서 “지난 20년간의 북·미 핵대결 과정은 미국의 군사적 압력과 경제적 제재의 화살이 결국은 조선의 핵미사일로 되돌아오게 됐다는 논박할 수 없는 진실을 낳았다”며 의기양양해했다.
북한은 NPT의 허점을 교묘히 악용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NPT 가입국은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는 대신 원자력 관련 기술을 제공받는다. 북한은 1985년 이 조약에 가입해 기술 지원 혜택을 누린 뒤 김영삼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핵무기 개발을 위해 임의탈퇴했다. 단물만 빼먹고 책임은 회피한 것이다.
당시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북·미 회담이 난항을 거듭하자 영변 핵시설 폭격까지 검토했으나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의 방북을 계기로 북·미 제네바 합의가 타결되면서 1차 북핵 위기는 해소됐다. 한·미는 북한에 경수로 발전소를 지어주는 대가로 북한의 핵(플루토늄) 동결을 이끌어냈으나 북한은 비밀리에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진행시켰다.
제네바 합의로 미봉됐던 북핵의 진실은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북한은 2002년 10월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특사로 방북한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의혹을 제기하자 뜻밖에도 이를 순순히 시인하며 제2차 북핵 위기 국면을 조성했다. 2차 북핵 위기 와중에 출범한 노무현정부는 6자회담을 통해 북핵 9·19공동성명을 이끌어내며 북핵 폐기 목표를 달성한 듯했지만 북한은 그 이듬해 1차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공동성명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북한의 3차 핵실험까지 이뤄진 지금의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북한은 처음부터 핵 보유국이 되겠다는 야망을 단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다.
NPT 체제 밖에 있으면서 ‘사실상(de facto)’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고 있는 인도나 파키스탄 같은 지위를 얻겠다는 전략이다. 김씨 왕조가 3대에 걸쳐 핵개발에 몰두하는 동안 우리 정부는 냉·온탕 북핵 정책을 반복하며 북핵 폐기라는 허망한 희망을 붙들고 있었던 셈이다.
장용석 서울대 평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북한의 NPT 탈퇴 후 20년에 대해 “북핵 협상과정에서 북한의 내부사정과 미국 내 정치일정 등이 겹치면서 여러 번 불신의 사례가 쌓이는 바람에 향후 북핵 협상 자체가 매우 어려워진 상황이 됐다”면서 “그러나 비핵화는 결코 포기할 수 없으며, 제네바 합의나 9·19성명처럼 원대한 목표보다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사안부터 협상을 벌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동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