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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인물들의 인생을 드라마로 체험하다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3.10.09일 09:14
—연변라지오텔레비방송예술단 리창균감독을 만나다

드라마와 리창균

  드라마는 등장인물들의 대화와 행동을 통하여 이야기를 엮어가는 종합표현예술의 한 형태로 주인공과 기타 인물들의 극적사건을 다양한 영상으로 담아내는 텔레비전드라마와 영상은 사용하지 않고 음성만으로 표현하는 라디오드라마 등이 있다.

  현대와 같이 복잡다단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모두다 각자가 자기자신의 드라마를 엮어가고있는데 그속에서 자아를 실현하기 위하여 여러 대상과 마주하고 질문을 던지거나 대답하기 마련이다. 그 물음과 대답이 극에 있어서의 다이알로그(대화)의 기초이며 그 사색의 긴장과 행동과정에서 생기는 감동은 시적이라고 할수 있다. 여기에 바로 대중들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리유가 있다.

  연변라지오텔레비방송예술단 리창균감독은 세상의 다양한 인물들의 인생을 드라마로 체험하면서 자신의 인생도 드라마틱하게 엮어가고 있다.

  일찍 1980년대초에 텔레비드라마 '갈망'이 전국을 들썽케 할때 연변라지오텔레비전방송국에서는 이 드라마를 조선말로 배음제작하여 방송하였고 이어 일본텔레비드라마 '오신'도 조선말로 방송하였다. 그후 '뉴욕에서의 북경사람',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 '대가정' 등 500여부에 달하는 우수 텔레비드라마가 련달아 조선말로 배음제작되였다. 당시 방송예술단 업무단장을 맡았던 리창균감독은 상기 대부분 작품의 연출을 담당하거나 주요배역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1994년 텔레비전련속드라마 '갈꽃'(15부)에서 그는 극무주임 겸 주인공인 화가 허근역을 담당하였고 1998년에는 연변라지오텔레비전예술단 창립 20돐 헌례작품으로 제작된 텔레비전드라마 '녀자는 무엇입니까?'(상하집)의 감독을 맡았다.

  리창균감독은 이처럼 자신의 모든 정력을 중국조선족인민들의 주요한 문화생활의 한부분으로 되고있는 라지오와 텔레비전의 드라마예술을 발전시키는데 이바지 하여왔다. 아래에 그 실적을 대략적으로나마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1993년 라지오련속드라마 '청춘극장'이 전국 라지오텔레비조선말 우수종목평의 연출 1등상을, 1996년 텔레비드라마 '뉴욕에서의 북경사람'이 전국소수민족번역영화 준마상을, 1997년 텔레비드라마 '할빈에서의 로씨야 처녀'가 중국번역가협회 문예계렬 1등상을, 2000년 텔레비드라마 '대가정'이 전국라지오텔레비조선말방송 우수프로그램 1등상을, 2002년 텔레비드라마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가 전국소수민족번역영화 준마상을, 텔레비드라마 '충성'이 전국소수민족번역영화 준마상을, 2006년 라지오다큐멘터리 '소리의 인생'이 한국 KBS프라이즈 1등상을, 2012년 텔레비드라마 '홍콩자매'와 '장백산아래의 나의 집'이 중국라지오텔레비전협회 소수민족우수종목평의에서 각각 1등상과 3등상을 수상했다.

멈춰선 무용수의 길

  소년시절의 창균은 꿈이 많았다. 연길시2중에 진학하면서 그의 꿈은 무용에 남다른 재질로 피여났다. 청수한 용모, 균형잡힌 몸매, 훌륭한 절주감각이 무용에로 그의 꿈을 불렀다. 그는 1970년 2월 화룡현 덕화 집체호로 내려 갔다가 4개월만에 그의 남다른 재질을 알아본 화룡현문공단에 뽑혔다. 그의 삶의 길에는 이로써 새롭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반, 화룡현문공단은 창작 및 공연에서 항상 문예단체의 선두를 달렸는데 여기엔 수많은 잠룡들이 모여 있었다. 작곡 김봉호, 작사 한윤호, 지휘 리하수, 안무 리분선, 녀성독창 황인순, 연출 김흥빈… 이런 훌륭한 인재들이 만들어내는 참신한 종목들은 대중들의 호평을 받았다. 그는 묵묵히 머리를 숙이고 허심하게 배우기 시작했다. 매일이다싶이되는 농촌순회공연은 그한테 좋은 기회였다. 무용수였던 그는 포만된 정서, 끈질긴 노력과 훌륭한 표연력으로 항상 주요배역을 맡았다. 무극 '첫 발자국'에서 군의역, 바레무극 '홍색랑자군'에서 홍상청역이 그의 몫이였다. 그러던 그에게 공연무대를 리별하고 무용수의 길을 접는 고통이 닥쳐왔다.

  1974년 봄의 어느 날, 길림시에서 무극 '첫 발자국' 공연도중 도돌이로 극정을 절정에 이끌어내는 관건적인 순간에 그는 현훈증으로 무대에 쓰러졌다. 하루에 두차례씩 공연을 하다보니 주역을 맡은 그가 너무 피곤했던것이다. 그 당시 그들의 공연은 늘 초만원을 이루었는데 어떤 관중은 몇번이나 다시 관람하기까지 하였던것이다. 그가 무대에 쓰러지는 순간 온 극장은 조용해졌다. 막이 서서히 내리자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지면서 관중들이 다투어 무대에 뛰여올랐다.

  부축하는 사람, 업어주는 사람… 이렇게 그는 몽롱한 의식속에 병원으로 호송되였다.

  진단은 '과로로 인한 순간적 뇌저혈증'이였다. 이 병은 좀 휴식하면 인차 회복되는 것이지만 안과검사에서 '조절긴장증'이라는 또다른 진단을 받았다. 병인은 강렬한 무대조명으로 반드시 빛의 자극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무대공연과 결별하라는 무자비한 선고였다. 비록 무용의 발걸음을 그때 멈췄지만 그날 관중들의 힘찬 박수소리는 지금도 가슴에 남아있다.

쓰러졌던 길림무대로 다시

  1970년대 중반은 대중문화생활이 한창 발랄하게 전개되던 시기이다. 기업단체에서도 문예콩클을 벌리면서 기업형상을 높이기에 힘썼다.

  연변신화인쇄공장에서는 그의 이름을 알고 또 지금 무대를 떠났다는 소식도 듣게 되였다. 1975년 10월 공장에서는 사람을 보내여 전근수속을 밟았다. 당시만 해도 연길로 전근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라 했지만 그는 출중한 재능으로 곧 공장선전과에 오게 되였다. 당시 이 공장에는 연변가무단의 이름있는 배우들이 적지않게 내려와 있어 그들과 함께 문예선전대를 조직하고 공장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성과를 많이 올렸다. 모두 화룡문공단에서 배운 덕이였다.

  1978년의 어느날, 한 지기가 길림시조선족예술관에서 예술단을 꾸리는데 갈 의향이 있는가고 물어왔다. 길림공연무대에서 쓰러졌던 그는 그곳에 다시 가서 예술의 길을 계속 걷고싶었다. 그가 길림시조선족예술관의 위탁을 받고 배우 8명을 모집하여 정작 길림시에 도착해보니 생각밖으로 조건이 형편없었다. 시름놓고 훈련할 장소마저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아침 일찍 송화강반에 나가 란간에서 기본공훈련을 했다.

  그는 또 창작에 몰입하여 가무극 '심청전'에서의 '부녀상봉', 무극 '유혹'을 창작하였다. 전체 배우들의 노력으로 공연은 큰 반향을 보였으며 무극 '유혹'은 한족문예단체에서 배워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 연변라지오텔레비전방송국에서 드라마제작을 시도한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마음이 술렁거렸다. 시종 영화예술을 꿈꾸어 왔던 그는 가슴이 부풀어오르면서 종시 잠을 이룰수 없었다. 그는 안해를 먼저 연길에 전근시키고 자기도 짐을 쌌다.

  드라마예술에 깊이 빠져들다

  연길에 도착한 이튿날로 그는 연변라지오텔레비전방송예술단의 강태억연출을 찾았다.

  그는 자신의 예술경력을 소개하고 영상예술에 대한 애착심과 동경심을 털어놓으면서 예술창작에 관한 리해도 피력했다. 그리고 자기가 미리 준비했던 라지오드라마록음테프를 내놓았다. 그것은 연변연극단의 '장백의 아들' 극본에서 몇개 대목을 취하여 라지오드라마로 개편하여 대사, 음악, 효과를 합성한것이였다.

  원래 무뚝뚝한 성격이여서 별말이 없던 강태억연출은 그 이튿날부터 직접 뛰여다니며 한달내에 그의 전근수속을 마무리했다. 그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잘해보리라 결심하였고 3년만에 연출, 예술단업무단장으로 발탁되였다. 이로써 그는 드라마예술에 깊이 빠져들게 되였다. 그리고 이 문장의 서두에 적은 업적들을 하나하나 이뤄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

  2010년 조선중앙텔레비전방송국 드라마창작단에서는 중국의 문화시장에 진출할 목적으로 력사소재의 30부 장편드라마 '계월향'의 제작을 기획하고 중국측과 합작할 의향을 보여왔다. 이로써 광주모드모아그룹과 연줄이 닿았는데 중국측 연출로 리창균감독이 초청되여 평양으로 날아갔다.

  조선 평양에 도착하여 처음 시작한 일은 극본검토였다. 드라마를 중국 청취자들의 구미에 맞는 스토리흐름과 템포, 캐릭터로 다시 구성하는 것이였다. 그는 일주일동안 극본과 씨름하면서 수정방안을 작성했다. 그는 캐릭터선정에 중국시청자들에게 익숙한 영화 "꽃파는 처녀"에서 꽃분이역을 담당한 홍영희배우를 출연시킬 것을 제안했는데 조선측에서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조선의 예술인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진솔하고 꾸밈이 없는 언행과 높은 실무소질, 샘물처럼 마를줄 모르는 열정에 그는 크게 감복되였다. 이에 자부심을 느끼면서 그들과의 합작에 큰 기대를 두게 되였지만 나중에 여러가지 사정으로 진행은 결국 중단되였다. 그에게는 평생을 두고 아쉬운 일이였다. 그러나 비록 중조합작드라마촬영이 무산됐지만 이것이 그에게는 너무나 아름다운 추억이였으며 그의 예술생애에서 지울수 없는 한페지로 기록되고있다.

  무한한 성취감과 끝없는 아쉬움은 이렇게 수시로 교차되지만 리창균, 그는 오늘도 남다른 자신의 인생드라마를 꾸준히 엮어가고있다.

/흑룡강신문 연변지사 김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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