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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 조선족가요계에 떠오른 새별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0.03.31일 16:07

(흑룡강신문=하얼빈) 우리 민요를 불러 묵직한 상을 수차례 수상한 연변가무단 가수 강화 ― 어려서부터 음악에 싹수를 보이기 시작한 그는 4살때에 이미 바이올린을 배우며 음악에 접근하였고 소학교에서 가수의 꿈을 가지게 되였으며 부모의 지지로 연변대학 예술학원 6년제 중등전문반에 입학하여 12년간 공부함으로써 성악전업 본과까지 무난히 마쳤다. 지금 그는 연변가무단에서 전직가수로 활약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있다.

1982년 7월 9일, 연길시 한 보통로동자가정의 둘째로 태여난 강화는 부모와 형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강화가 네살나던해 전 주 유치원어린이문예콩클이 있었다. 그가 다닌 뻐스공장유치원에서는 연변가무단의 바이올린수를 청해 바이올린중주를 표현하게 되였다. 어린 강화는 바이올린수로 뽑혀 여간 기쁘지 않았다. 당시 바이올린에 푹 빠진 강화는 콩클이 끝난후에도 유치원을 졸업할 때까지 계속 바이올린을 배웠다.

3학년때 중앙소학교에서 태평소학교로 전학한 강화는 음악을 가르친 하미자선생의 눈에 들어 학교의 각종 문예활동에 참가하게 되면서 차츰 노래에 재미를 붙이게 되였고 그 선생님의 소개로 방학마다 소년궁의 김해월선생한테서 성악을 배웠다.

강화는 각 학과목성적이 우수한편이였지만 유달리 공부를 잘하는 형님때문에 집에서 공부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수 없었다. 승벽심이 강한 강화는 형님처럼 공부를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싶었지만 얼마나 해야 될지 아득했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노래만큼은 자신이 있었고 배울수록 재미가 났다. 그래서 5학년때 앞으로 성악을 하고싶다는 꿈을 갖게 되였고 더욱 열심히 성악을 배웠다.

그러던중 그는 연변TV방송국에서 조직한 “어린이가요콩클”에 참가하였는데 예선에서 그만 탈락했다. 관람석에서 다른 애들이 부른 노래를 들은 강화는 강신자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애들이 노래를 잘 부르는것을 보고 강신자선생한테서 배우고싶다며 어머니를 졸랐다. 그날 저녁 그는 어머니를 따라 강신자선생을 찾아갔고 만난 자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강화한테서 싹수를 보아낸 강신자선생은 노래를 배워주겠노라고 기꺼이 대답했다.

당시 아버지가 정리실업을 당한데다가 형님이 여러 과목의 보충수업을 받았기에 가정의 경제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그럼에도 아들의 요구라면 어떻게든 만족시켜주는 어머니는 강화를 강신자선생으로부터 개별지도를 받게 하였다. 한 5개월정도 배웠을 때 연변예술학교에서는 소학반을 모집하였는데 강화는 우수한 성적으로 예술학교 소학반에 입학하였다.

예술학교 소학반에 갓 입학하여서 모든것이 신기하고 새롭기만 했던 강화는 부지런히 공부하여 연변대학 예술학원 중등전문반에 입학하였다. 중등전문반에서 강화는 강신자선생을 지도교원으로 모시고 남도민요와 판소리를 배웠다. 그런데 깊이있는 판소리나 민요가 자신한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서 취미를 느끼지 못한 강화는 수업도중에 달아나기도 했다. 하지만 강신자선생은 수업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고 대화를 많이 나누면서 강화의 의욕을 북돋아주었다. 선생님의 바른 인도로 그는 다시 배움에 취미를 가졌고 차츰 판소리나 남도민요만이 갖고있는 풍격과 빛갈을 느끼게 되였다.

민요의 매력속에 빠져 한창 신나게 배울 때 또다른 시련이 그를 찾아왔다. 변성기가 오면서 잠시 노래를 부를수 없게 된 강화는 전업시간을 보지 못했다. 날마다 문화과시간외에 피아노를 배우고는 일찍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그는 웃학급 선배들이 변성기때 성악을 포기하는것을 보고는 많은 회의를 느꼈다. 명랑하고 쾌활하던 성격도 과묵해졌고 자신한테 신심도 잃어갔다.

고민끝에 성악을 포기하기로 한 강화는 부모한테 다시 중학교에 가서 공부하고싶다고 여쭈었다. 아버지는 흔쾌히 동의하였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꿈을 접는것이 걸려서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바로 그때 담임교원이였던 정인숙선생이 그를 찾아 근 세시간이나 담화를 나누었다. 선생님은 강화한테 쉽게 포기하지 말라고 극구 만류하였다.

담임선생님의 설득으로 하여 강화는 흔들렸던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그는 전업과를 보지 못했지만 다른 학생들이 배우는것을 참답게 들었고 또한 악리와 피아노를 비롯한 타악기를 배우는데에 모든 정력을 기울였다. 그때는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배웠지만 실상 사회에 진출해서 보니 그때 배웠던 피아노와 타악기를 익힌것이 너무나 큰 도움이 되였다.

그렇게 2년이란 시간이 흐른 어느날 강신자선생이 “인젠 변성기도 지났으니 다시 전업과를 시작하는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첫 전업과시간에 강화는 너무 행복했다. 오랜만에 하는 노래가 그렇게 좋을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노래할 때만이 제일 행복하다는것을 깨달았다.

2002년에 강화는 무난히 연변대학 예술학원 본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에 입학하여서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각종 노래콩클에 참가하였다.

강신자선생은 “인젠 배운것을 나타내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너를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하며 각종 노래콩클에 추천해주었고 그에 알맞는 강의도 해주었다.

2002년 7월 17일, 강화는 제4기 조선족민요콩클대회에서 1등상을 수상하였다. 처음으로 규모가 큰 콩클에 참가하여 생각지도 못했던 상을 받은 그는 날아갈것처럼 기뻤다. 또한 “나는 할수 있다”는 신심도 생겼다.

그해 9월 5일, 그는 중국조선족과외가수콩클에서 민족창법 우수상을 수상하면서 다시 한번 신심을 굳혔다.

2003년 9월 3일, 강화는 강신자선생의 추천으로 한국 국립국악원에서 열린 세계한민족 “제3기해외동포전통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하여 민요 《상주아리랑》을 불러 쟁쟁한 가수들을 제치고 성악부분 금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받아안았다. 수상자의 명단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강화는 온몸에 전률이 흐르는것만 같았다. 긍지감에 벅차 어머니한테 전화로 이 기쁜 소식을 알리자 어머니는 깜짝 놀라면서 믿기 어려워하였다. 하기야 시합을 앞두고 감기에 걸려 하루에 두번씩이나 점적주사를 맞으며 포기할가고도 생각해보았던 강화였다. 어머니가 “지금까지 어떻게 련습해왔는데 포기하려는거니? 상을 못받아도 괜찮으니 단련삼아 해보거라”고 힘을 북돋아주어 결국 참가하였던것이다.

2003년 12월 5일, 강화는 CCTV서부민요콩클에서 우수민요가수상을 수상하였고 이듬해 6월 10일에는 제11기 전국청년가수TV콩클 “적수하”컵 길림성지역선발대회에서 직업조 통속창법 1등상을 수상하였으며 2005년 10월 7일에는 한국에서 주최한 제30기KBS정선아리랑경창대회에서 특별상을 수상하였다.

이렇게 크고 많은 콩클에 참가하여 여러가지 상들을 수상하면서 자신을 한층 더 높은 경지에로 끌어올린 강화는 “이 모든 상들은 강신자선생님의 옳바른 지도와 갈라놓을수 없다.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양성한 선생님은 매 학생들에게 알맞는 창법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인도해주는 좋은 스승이다. 나만의 빛갈이 살아있는 민요를 부를수 있었던것도 선생님의 훌륭한 가르침이 있은 덕분이다”고 스승에 대한 고마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외 강화는 “무대에서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수 있었던것은 몇년래 밤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무대경험을 많이 쌓았기때문”이라고 당당히 밝혔다.

강화가 처음에 밤무대에서 노래를 부른것은 가정형편이 어려워서였다. 형님의 대학공부 뒤바라지를 하느라고 어머니는 활동실을 꾸렸다. 말이 활동실이지 주로 마작을 놀아서 집은 온통 마작을 젓는 소리와 담배연기뿐이였다. 어떤 때에는 손님이 많아서 그의 침실에서까지 놀았다. 그래서 학교수업이 끝나도 집에 들어가기 싫었던 강화는 늘 친구집에서 놀다가 밤중에야 집에 들어왔다. 아무리 창문을 열어놓아도 담배연기가 푹 배여서 퀴퀴한 냄새가 쉽게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한테 그만두라고 사정하였지만 어머니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지라 “너희들 학비를 벌려면 다른 방법이 없으니 리해해달라”고 하였다.

강화는 형님이 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이 대학 본과에 붙은후 첫학기 입학금만 대주면 나머지 학비나 생활비는 집의 돈을 쓰지 않겠으니 그때면 활동실을 그만두어달라고 어머니와 합의를 보았다. 어머니는 강화가 본과에 붙은후 약속대로 활동실을 그만두었고 강화는 약속대로 돈벌이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7시반부터 11시반까지 밤무대를 뛰여도 겨우 600원을 받았지만 자력갱생한다는 마음에 기쁘기만 했다. 반년후에 인기가 올라가자 여기저기서 불러서 몸값도 껑충 올리뛰였고 수입도 짭짤했다. 자신의 소비돈은 물론 집생활에도 많은 보탬이 되였다. 돈때문에 뛰기 시작한 밤무대였지만 시작하여 4년간이나 서다보니 큰 단련이 아닐수 없었고 콩클이나 공연에서의 무대발휘에도 많은 도움이 되였다.

그리고 강화는 또 자신만의 풍격을 가진 노래를 부르기 위해 2003년부터 평양예술쎈터에서 선후로 정정애선생한테서 통속가요를, 배윤희선생한테서 서도민요를, 김귀녀선생한테서 벨칸토창법을 배웠다. 다양한 쟝르의 노래를 배우는 과정에 자신의 미숙한 부분을 채우면서 기술면에서 많은 제고를 가져왔다. 특히 김귀녀선생을 만나 벨칸토창법을 배우면서는 새롭게 태여난 느낌이 들었다.

2006년 5월에 졸업식을 마친 강화는 그해 7월 10일, 연변가무단에 면접시험을 보러 갔다. 벨칸토를 전공한 6명과 민요를 전공한 4명이 면접시험에 참가하였는데 가무단에서는 벨칸토가수 2명만 모집한다는것이였다. 그래서 별로 희망을 품지 않았지만 이미 갔던지라 가무단의 단장, 부단장을 비롯한 이름있는 가수들앞에서 시험을 보았다. 노래를 부르려니 어지간히 떨렸다. 안될거라고 단정짓고 집에 돌아왔는데 며칠후에 가무단측에서 합격통지전화가 왔다. 깜짝 놀란 한편 하늘을 날아갈듯 기뻤다.

2006년 8월 14일, 강화는 전국조선족성악콩클에서 통속창법 2등상을 수상하였다. 이는 그가 연변가무단에 배치받은후의 첫 시합이였다.

가수로 활약하면서도 계속 배움에 목말랐던 강화는 중국음악학원에서 석사공부를 할 계획을 세우고 시험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어머니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는 바람에 부득이 포기할수밖에 없었다. 큰며느리가 출산하여 그 뒤바라지를 갔던 어머니가 2007년 11월에 상해에서 쓰러졌던것이다. 한국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육체로동을 하면서 아글타글 모은 돈을 상해에 발을 붙인지 얼마 안된 형님이 결혼식을 올리고 상해에 집을 마련하는데 거의 다 쓴 어머니가 학비를 대줄수 없었던것은 물론 상해의 모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의 치료비도 만만치 않았기때문이였다. 온집식구가 합심하여야 될판에 석사공부는 진작 물건너갔다.

2008년 2월, 사랑하는 어머니가 쓰러지고 석사공부까지 포기하게 된 강화는 마음고생이 심해서 두눈에 고기가 살아났다. 수술을 해야 되는데 간호할 사람이 없어 의사선생님은 “늦어지면 좋지 않으니 한쪽 눈씩이라도 수술을 하는것이 어떠냐”고 건의하였다. 결국 그는 간호하는 사람도 없이 혼자 쓸쓸하게 수술을 받았다. 한쪽 눈을 수술한후 일주일후에 다른 한쪽 눈을 수술하였다. 일이 안될라구 그랬는지 4월에는 또 맹장수술까지 하게 되였다. 다행히 그때는 아버니가 계셔서 간호해주었다. 4월말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와서야 강화는 차츰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고 자신만의 풍격이 있는 가수로 되기 위해 실무에 대해 더 깊이 연구하였다.

2009년 11월 23일에 강화는 장춘에서 있은 길림성 제1기 새노래콩클(新歌大  )에 참가하여 노래 《화려강산 장백산》(안국민 작곡 최현 작사)을 불러 우수상을 받았다. 이미 무대에서의 자신심이 충족하고 준비를 엄청 많이 했던 노래였던만큼 이전과 달리 상에 대한 욕심이 컸던 그는 우수상을 받은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많구나. 아직 더 분발해야겠구나”하는 겸허한 태도로 자신을 되돌아볼수 있는 계기를 가지게 되였다.

그는 2009년 12월 17일에 다시 노래 《화려강산 장백산》으로 신연변가요창작콩클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강화가 안국민선생으로부터 노래 《화려강산 장백산》을 받게 된데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안국민선생이 가무단에 오셨다. 용기를 내서 안국민선생을 찾아간 강화는 우선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그를 몰랐던 안국민선생은 “누구인가? 무슨 전업인가?”고 물었다. 대선배님앞이라 강화는 조심스레 자기소개를 하고나서 “선생님의 노래를 부르고싶습니다”고 공손하게 말했고 안국민선생은 “우선 전화번호를 적어놓아보라”면서 후에 보자고 하였다.

전화번호를 적어드리고 나왔지만 정말로 련계해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일주일이 지나서 안국민선생이 전화로 “단위에 나와보라”는것이였다. 부랴부랴 단위에 가보니 안국민선생이 노래 “화려강산 장백산”을 넘겨주면서 강화한테 한번 들려주기까지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였다. 그때 강화의 형편이 좋지 않다는것을 안 안국민선생은 반주곡을 만드는데 보태라고 돈 300원을 주었다. 그 돈을 받아든 강화는 눈물이 앞을 가려 어떻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길 없었다.

악보를 받아쥔 강화는 김귀녀선생한테 달려가 가르침을 받았고 많은 련습을 기울였다. 이렇게 공력을 넣고 남달리 련습했던 곡이여서 상에 대해 더 연연했던것 같다.

강화는 “지금까지의 예술길에 더없이 많은 관심과 사랑을 준 부모와 여러 선생님들의 아낌없는 관심과 사랑에 너무나 감사하다”면서 “앞으로 노래를 잘하는것으로 보답하겠다”고 감사의 마음을 표달했다. 또 “어떤 무대나 소홀히 대하고싶지 않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열심히 노력하여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가수가 되고싶다”며 가수로서의 마음가짐을 밝힌 그는 “여러가지 창법의 우수한 점들을 결합하여 나만의 풍격을 살리겠다”고 말했다.

“조선족가수하면 우선 떠오르는 그런 가수가 되고싶다”는 새로운 꿈을 향해 날마다 자신한테 채찍질하는 강화가 가요계의 새별로 떠오르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연변라지오TV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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