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 "제일 처음 일본에 증거 수집을 떠난 때로부터 계산해면 이미 16년이 됩니다. 그간 20여차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731죄증진렬관 김성민관장(조선족)은 이같이 말한다.
김성민관장은 국내에서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 731부대의 일부 상황을 료해하게 되였다. 하지만 피해국 국민의 진술은 다만 증거의 일부분이 될 뿐이다. 가해자측의 증언을 수집해 731부대의 진상을 더 정확하게 환원하기 위해 그는 긴 세월동안의 일본 방문 증거 수집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의 일본 방문 증거 수집은 1998년부터 시작된다. 당시 731부대의 로병은 나이가 가장 적은 사람도 70여세였다. 핵심 대원의 년령은 더 많았다. 그가 만난 증인 중 년령이 가장 많은 사람은 당시 이미 95세였다. 그러므로 일본 로병들의 증언, 사진과 영상자료 취득이 매우 긴박함을 느끼게 되였다.
일본에서 로병을 탐방하고 증거를 수집하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731부대의 상황은 일본군국주의가 "반드시 무덤으로 가지고 가야 할 절대 비밀"이라고 엄명을 내린적 있었으므로 대부분의 일본 로병들은 침묵을 지켰다.
"경비 부족 외에도 당시 제가 직면한 가장 큰 어려움은 소통의 장애였습니다. 그들을 설복하고 그들의 협력을 받는것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이때문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16년간 김성민관장은 70~80명의 중국 침략 일본군의 퇴역 로병을 만났지만 최종 증거를 제공한 사람은 40여명뿐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또 일부 사람들은 만나주기는 했지만 말을 아꼈습니다. 과감히 중국 침량중 범한 죄행을 승인하고 당시의 상황을 환원시켜 보인 사람은 4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다년래 김성민관장과 그의 증거수집 대원들은 일본 로병들을 추적방문 하는 과정에서 일부 로병에게서 증언을 취득할수 있었다. 731부대 하이라얼 분대 성원이였던 와노 다케오는 대형 포르말린 병속에 들어있는 잘려진 시체를 본적 있다고 말했다. 당시 그의 상급은 본것들을 절대 말해서는 안된다고 했다는것이다.
731부대 보충병이였던 오하라 오치쿠젠은 "실험을 받는 사람들을 말뚝에 묶어놓고 비행기로 세균 폭탄을 투하했다. 우리는 피실험자의 상황을 똑똑히 볼수 있었다"고 말했다.
올해 4월에 그들이 증거를 취득했던 731부대의 제일 마지막 대원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최성민관장과 그 대원들의 증거 수집은 결속되지 않았다. 올해 8월 김성민관장은 또 한차례 일본을 방문해 원 731부대원이 남긴 유물을 가져왔다.
김성민관장은 앞으로도 계속 증거 수집을 할것이며 일본 로병의 가족과 련계를 취해 더 많은 문물과 자료들을 수집할것이라고 말했다.
/흑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