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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녀걸9]3군 재봉대 제2임 대장 장의숙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5.05.07일 12:22
항전승리 70돐 기념 특별기획-항일련군의 20명 조선족녀걸들(9)

■리 함

1
1935년 9월의 어느날 조선사람 장의숙(张义淑, ? ㅡ1937)의 시아버지가 손자를 껴안고 찰떡꾸레미를 가지고는 말없이 며느리를 안내하여 산기슭수수밭으로 갔다. 장의숙이 어린애를 안은채 땅거미 질때까지 기다리노라니 수수밭속에서 무슨 자취소리가 났다. 이윽고 수수잎사이로 군모를 쓴 사나이가 머리를 내밀었다. 항일유격대원이 틀림없었다. 장의숙은 가슴이 막 튀여나올것만 같았다.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였다.

유격대원은 셋이였다. 그들은 어린애를 품은 녀인이 과시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짐작이 가던지 경계를 늦추었다. 이때 시아버지가 뛰여와서 반색을 했다.

《여기로 오시오. 내 소개하지. 이 사람이 상룡의 안해이자 내 며느리되는 사람일세!》

세 유격대원은 장의숙에게 미소를 보내면서 로인님을 나무랐다.

《참 로인님두, 왜 진작 알리지 않았습니까? 상룡동문 오늘…》왕동무가 말을 떼자 송동무가 제꺽 말을 받았다.

《장동문 반의 전사들을 데리고 산남(山南)으로 긴급임무수행에 나섰는데 곧 돌아올겁니다.》

장의숙은 뒤늦게야 남편 장상룡과 그들 부자가 같은 일을 하고있다는것을 알았다. 오늘 일도 그러했다. 시아버지는 수수밭약속을 미리 짜놓고 자기에게만 알리지 않았었다.

들은 구면이기라도 하듯 쑥대를 깔고 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왕동무는 장상룡이 유격대를 찾아온 경위를 자상히 소개하고는 몸성히 잘있으니 근심말라고 덧붙이였다. 밤이 퍽 깊었다. 작별의 시각에 송동무가 괴춤에서 돈을 꺼내여 로인에게 맡기였다.

《로인님, 소금과 간에 절인 고기 그리고 고약을 부탁드립니다. 아무튼 조심하세요.》

《걱정들 말게!》

다음에 만날 시간을 약속하고 서로 자리를 떴다. 유격대원들이 몇발자국 발을 떼서야 장의숙이 입을 열었다.

《장동무한테 전해줘요. 아이가 컸구, 저도 유격대에 들어가련다구요.》

그럼 장의숙이란 누구이고, 장의숙의 남편 장상룡(张相龙)이란 누구일까? 이들 부부간을 알자면 지난세기 20년대 중기이후 혁명의 불길이 드세게 타오른 북만의 통하현 청하진(通河县清河镇)을 잠간 들여다 보아야 할것이다.



항일련군 제3군 탕리천밀영(모아산밀영)이 위치한 이춘시 서림구 18킬로메터되는 홍성촌 동남산 기슭.

2
청하진은 소흥안령의 남쪽, 송화강 중류의 북안, 통하현의 최동부에 위치한 고장으로서 그 시원으로 되는 청하촌(清河村)은 원래 이름이 이도하자촌(二道河子屯이)였다. 1920년에 마을이 생겨날 때 인가라야 몇호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해 초에 통하현의 황씨와 로씨 등 지주가 남만의 안동(安东), 료녕 등지에서 조선이주민들을 모집하여 수전농사를 시작하면서 조선사람 동네가 생겨났다. 1921년의 통하현 전소무(田绍武)등 세 대지주들의 조선사람 모집에 이어 1922년에 조선사람인 류동열(柳东悦), 류동공(柳东功, 즉 김동산) 형제가 또 동만과 남만 일대에서 조선농민들을 많이 모집하여 오면서 오늘의 청하진 경내 대고동(大古洞)의 조선족은 200여호로, 서북하 동서 포대(西北河东、西两炮台)의 조선족은 150여호로 대폭 늘어났다. 청하의 대고동, 서북하 일대는 일약 통하 조선이주민들의 집거지구로 번져갔다. 중국 안동 압록강 대안의 신의주 태생인 장의숙일가도 1920년 경에 조선이주민의 모집대렬에 섞이여 통하 청하의 대고동에 옮겨 앉았다.

1928년 3월에 공산당원이고 남녘땅 광주봉기참가자인 조선인혁명가 최용건(崔镛健)이 중공만주성위의 파견을 받고 통화현 청하 서북하에 나타났다. 그는 김지강(金志刚)이라 변성명하고 교원신분을 음페로 혁명활동을 시작하였다. 그해 1928년 가을, 황포군관학교 출신 조선인혁명가 김재연(金在渊)과 장세진(张世振)도 서북하에 이르러 김지강과 손을 잡았다. 김지강은 황포출신 중공당원들을 토대로 투쟁속에서 당원들을 발전시키니 1929년에 이르러 당원은 20여명으로 늘어나 이도하자에 중공통하현지부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1930년 초에는 통하현지부가 중공통하특별지부로 되여 중공북만특위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았다. 따라서 반제대동맹, 농민협회, 부녀회, 소선대 등 반일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섰다. 장의숙 부부가 혁명에로 강단하는 력사적 계기가 주어졌다.

1935년 봄에 이르러 통하현 청하 서북하의 30여호 조선족들과 대고동의 장상룡, 리충희(李忠喜), 김대홍(金大洪), 리봉빈(李凤斌 )등 20여호 조선족들이 통하일대에서 활동하는 동북반일련합군 조상지부대에서 입대함이 알려진다. 대고동에서는 1928년에 20살이고 대지주 리가놈의 소작살이를 하던 정병삼(郑秉三)이 선참 혁명활동에 나서며 탕원현유격대에서 활동하자 그의 영향으로 두 남동생과 장상룡 등이 뒤를 따라섰다.



탕리천 밀영 옛터비



24세 시절의 조상지 사진. 장의숙 소속 동북반일련합군과 동북항일련군.

제3군 군장인 조상지장군의 지금까지 알려지는 생전 유일한 사진 (자료사진)



1932년 24세 시절의 조상지가 파언(巴彦)유격대 전사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앞줄 중간 말채찍을 손에 쥔 분이 20대 중반의 조상지. (자료사진)

대고동사람 장상룡은 동북반일련합군ㅡ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의 항일전사로서 안해는 장의숙으로 알려진다. 1935년 이전 시절 장의숙에 대해서는 알려지는 바가 없지만 북만의 통하현 청하진 대고동 일대에서 이주살이를 하다가 장상룡과 백년해로한 녀인이였다. 그러던 녀인이 남편 장상룡을 따라 동북반일련합군에 참가함을 보이였다. 장의숙 부부 소속 동북반일련합군에는 사문동(谢文东), 리화당(李华堂),기명산(祁明山) 등 반일의용군이 망라되였다지만 기실 반일련합군의 핵심은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이였다.

제3군의 기초는 1933년 10월 10일에 흑룡강성 주하현에서 건립된 주하반일유격대인데 유격대 대장은 후날 항일련군 제3군 군장으로 활동한 조상지이고 유격대정위 겸 당지부서기는 후날 항일련군 제3군 제1사 정치부 주임 겸 합동유격사령으로 활동한 조선족 리복림이다. 주하유격대는 1934년 6월 29일에 동북반일유격대 하동지대로, 1935년 1월 28일엔 지방의 청년의용군과 더불어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으로 발전하였다. 이해 3월에 제3군은 사문동, 리화당, 기명산 등 반일의용군과 함께 《동북반일련합군 총지휘부》를 건립하였다. 장의숙은 바로 이 반일련합군에 입대한후 부대에서 입당하고 후날 반일련합군 재봉대에서 항일녀전사로 활동하게 되였다.

동북반일련합군은 밀영을 통하현의 대고동과 소고동 산속에 설치하였다. 대고동밀영은 1936년 정월 초7일, 조상지(赵尚志)와 리연록(李延禄), 하운걸(夏云杰), 사문동, 리화당 등 200여명이 친일적인 목재소와 그 보호대들을 짓부신후 그 자리에 일떠섰고, 소고동밀영은 그에 앞선 1935년 11월에 조상지와 리연록이 소속부대를 이끌고 소고동골에 오면서 세워졌다.

대고동밀영과 소고동밀영중 소고동밀영이 비교적 큰편인데서 반일련합군의 재봉대와 무기수리소 등 후근기관들이 모두 소고동밀영에 자리잡았다. 그외에도 부대밀영들이 여기저기에 적지 않았다. 장의숙 소속 재봉대의 첫 대장은 진정산(陈静山)이라고 불리우는 30여세의 조선족녀성이였다. 본명은 장정예(张静芝)이고 녀진(女陈)이나 진정예(陈静芝)라고 불리우기도 하였다. 그런 진정산이 1937년 4-5월간에 3군 소년련지도원으로 전근되여가자 장의숙이 제2임 재봉대 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장의숙 소속 동북반일련합군은 1936년 8월 1일에 동북항일련군 제3군으로 개편되고 재봉대는 그대로 3군의 재봉대로 발전하였다. 3군재봉대를 보면 왕정평(王正平),곽숙진(郭淑珍), 등 한족녀전사들이 있는가하면 김옥선(金玉善), 김호련(金浩莲), 김백문(金伯文,본명 金贞顺), 강신옥(姜新玉) 등 조선족녀전사들도 있고 리계향(李桂香, 본명 李桂丽艳)이라는 어룬춘족(鄂伦春族) 녀전사도 있었다. 그야말로 민족대가정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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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룬춘족녀전사 리계향은 1914년생으로서 손극현 송수골(逊克县松树沟)사람이였다. 아버지 리보태(李宝泰)는 지방협령(协领)과 반항하며 싸우다가 그자들 박해로 온가족을 이끌고 이춘의 탕왕하(伊春汤旺河)류역으로 이사하였다가 1935년에 다시 통하현 소고동골로 옮겨앉게 되였다. 그해 11월에 소고동골에 조상지의 부대가 들어서면서 밀영까지 서게되자 리계향의 온가족은 항일부대의 길잡이로 나서기도 하고 정보수집과 통신, 식량조달, 상병원호리 등에도 나서며 아주 열성적이였다.

1936년 초이후에는 리계향과 아버지 리보태, 오빠 리계하부(李桂夏布) 가 제3군에 가입하면서 리계향은 재봉대의 녀전사로 되였다. 장의숙은 재봉대의 여러민족 자매들과 친자매처럼 어울리면서 리계향과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남다른 관심과 사랑을 주었다. 1937년 4월 한차례 전투에서 리보태가 중공북만림시성위 조직부장이고 3군1사 정치부주임, 하동유격지대(哈东游击支队) 사령인 조선족 리복림(李福林)을 구출하다가 장렬히 희생된후 더욱 그러하였다.

리복림은 공도진(公道轸), 최동범(崔东范)으로도 불리운다. 1907년 5월 함경북도 온성군(咸镜北道稳城郡)태생인 리복림이 1937년 4월, 북만림시성위회의로 소속 소년련과 경위련 170여명을 이끌고 이도하자 북산(二道河子北山)을 지나다가 600ㅡ700명에 달하는 일위군과 맞다들게 되였다. 하루동안의 격전을 거쳐 아군은 적들의 여러차례의 진공을 격퇴하였지만 밤에 이르러도 적들의 계속되는 협공을 받으며 탄알이 떨어져갔다.

리복림이 포위돌파를 결단하며 지휘하다가 두 다리에 중상을 입었다. 리복림을 따르던 어룬춘족 리보태는 비발치는 적탄에도 불구하고 리복림사령을 업고달리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경위원이 다시 리복림을 업고 북산으로 움직이였지만 리복림사령은 머리에 적탄을 맞고 역시 장렬히 희생되였다. 리계향의 오빠도 희생되였다. 밀영에서 이 비장한 소식을 전해들은 장의숙과 밀영의 동지들은 모두 비분에 잠기였다.

리계향의 비분은 더 이를데 없었다. 비통한 리계향은 신변의 사랑하는 남자 김영현(金永贤) 앞에서 비분의 눈물을 훔치며 이는 우리 가족만이 아닌 민족의 원한이니 이 원한을 꼭 갚고야 말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러는 리계향 이어룬춘족녀전사를 더욱 아끼며 사랑을 몰부었다. (김영현은 조선사람이였다. 후에 리계향은 쏘련으로 학습을 떠났고, 광복후 남편 김영현과 같이 조선으로 나갔다.)

1937년 겨울, 장의숙 소속부대는 대고동밀영과 소고동밀영을 떠나 다른데로 옮기게 되였다. 장의숙은 식량준비로 잠시 대고동의 집에 와있는데 3군부대의 송동무가 물건구입을 왔다. 다음날 밤에 장동무도 집에 들린단다. 이때 동네개들이 마구 짖어댔다. 장의숙이 금방 송동무를 노전밑 굴안에 숨기자 적들이 우르르 쓸어들었다. 그자들은 한바탕 복새판을 피우다가 장의숙 일가로소를 소학교자리로 끌고갔다.

5
적들은 장의숙의 시부모님에게 혹형을 가했다. 그들이 까무러치자 이번에는 장의숙의 웃옷을 벗기고 난로에 달군 부지깽이로 젖가슴을 지지였다. 이럴즈음에 늙은 량주가 정신을 차렸다. 시아버지는 끔직한 광경에 눈을 감고 시어머니는 부지깽이로 어린것의 엉뎅이를 지지는것을 보고 울음섞인 소리로 사정했다.

《얠 놔주시우다. 곰곰이 생각해 보지유.》

순간 잠간 까무러쳤던 장의숙은 정신을 차리고《무슨 말을 하시려고 그래요. 수치예요. 죽어도 같이 죽자요!》라고 하면서 죽기내기로 적들에게 머리를 들이박았다. 심문은 일단 중지되였다. 이튿날 적들은 왜놈경장 하나에 위만경찰 셋을 붙여 장의숙 등 셋을 수레 세대에 갈라 앉히고 현소재지로 압송하였다.

수레는 얼음강판이 된 소라륵밀강(小罗勒密河)을 따라 움직였다. 다행이라할가, 장의숙과 시어머니는 어린것이 달렸다고 그랬는지 결박당하지 않았다. 어린것이 젖꼭지에 덥석 매달리는 순간 장의숙은 바늘로 쑤시는듯한 아픔을 느꼈다. 그보다도 근심되는것은 앞으로의 혹형이였다. 자기는 물론 시아버지는 믿을만 한데 시어머니는 어떨는지, 송동무는 몸을 뺐는지? 래일 밤 남편에게 위험이 들이닥치면? 근심과 걱정이 수레바퀴의 회전과 함께 지지리 장의숙의 가슴에 굴러들었다. 한편 이렇게 곰상스레 당하기보다 기회를 엿보아야 했다.

몸이 얼어든 놈들은 달팽이 모양을 해가지고 총을 엉뎅이밑에 깔고 팔짱을 낀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웠다. 경장만은 총을 어깨에 멘채 앞만 내다보고 있었다.

장의숙이 머리를 돌리니 시어머니곁에 앉아있던 경찰이 보이지 않았다. 뚱보경찰은 강변에서 뒤를 보고 있었다. 마침 주위엔 근처의 촌민들이 물을 길어먹느라 까놓은 얼음구멍이 군데군데 있었다. 이때라고 생각한 그녀는 수레가 얼음구멍 있는데로 접근하자 젖먹던 힘을 다해 옆에 쭈크리고 앉아있는 경찰을 수레밑으로 밀어뜨렸다. 그리곤 총을 쥐고 수레에서 뛰여내려 앞수레의 왜놈과 경찰을 향해 소리질렀다.

《꼼짝말고 손들엇!》질겁한 놈들은 사시나무떨듯 두손을 쳐들었다.

한편 며느리 웨침소리를 듣고 시어머니가 총을 앗아다가 며느리 발길에 놓았다. 뒤미처 그녀의 시아버지도 수레에서 뛰여내렸다.

바로 그때 뒤를 보고있던 경찰이 바지춤을 추면서 등뒤에서 총을 내리였다. 장의숙은 련속 두방에 그놈을 꺼꾸러뜨렸다. 수레에서 떠밀려 다리갱이 하나가 얼음구멍에 빠졌던 경찰은 전신이 얼음구멍에 밀려들 판이였다.

세 차몰이군이 어인 영문인지 몰라 얼떨떨한 사이 시아버지가 너부러진 경찰의 보총과 탄피를 집어들었다. 왜놈경장과 위만경찰이 숲속으로 냅다 뛰자 시아버지는 그놈을 겨누고 총을 쐈다. 맹랑했다. 헛방이였다. 그는 며느리의 부탁을 명기하고 며느리와 로친한테 손을 들어보이고는 마음을 강하게 먹고 강언덕으로 걸음을 다그쳤다.

살아남은 세놈이 언덕의 바위뒤로 기여왔다. 시어머니가 그만 탄띠를 빼앗지 않았기에 탄알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놈들은 알고 있었다. 이윽고 왜놈이 두 녀인에게 돌멩이를 던지고는 날창을 쥐고 한걸음한걸음 기여왔다. 장의숙이 한방을 쏘니 탄알이 떨어졌다. 놈들이 총을 되앗아다가 시아버지의 뒤를 추격한다면 그 후과는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6
어쩔수 없는 순간이였다. 장의숙은 더 고려할 여지도 없이 세자루의 총을 가슴에 안았다. 다음 얼음구멍을 보다가 울고있는 어린애한테로 시선을 옮기였다. 마음을 강하게 먹은 그는 총끈을 자기 목에 걸고 지체없이 얼음구멍으로 뛰여들었다.

장의숙 항일련군 녀전사의 빛나는 발자취와 최후를 알리는 눈물겨운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 볼수있는 장의숙 관련 허다한 글들에서는 장의숙 먼저 재봉대 대장 진경산이 적들에게 체포되여 감옥에서 희생된후 3군 재봉대 대장으로 부임한 것으로 말하는데 이는 력사사실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는 이제 다음기 항일련군의 녀전사들 련재에서 자상히 보여진다.

장의숙의 최후를 두고도 1937년 가을경 식량구입으로 하산하였다가 일제토벌대와 조우하게 되면서 전우를 엄호하기 위하여 싸우다가 체포되였고, 청하에서 배로 통하로 압송되던 도중 배가 소라륵밀강 부근에 이르렀을 때 결연히 사품치는 송화강에 뛰여들어 영용히 희생되였다고 밝히고있다. 여기 최후의 서술역시 력사사실과 빗나가고있다.

장의숙의 항일련군 참가과정과 그의 빛나는 최후를 처음으로 자상히 소개한 글은 말남(沫南)의 정리로 된 《얼음우에서(冰上)》란 한편의 긴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중문으로 된 이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진것은 지금으로부터 근 60년전인 1959년이다. 이해 료녕, 길림, 흑룡강, 연변 인민출판사들에서는 련합으로 동북인민항일투쟁이야기집ㅡ《항일련군 녀전사(抗联女战士)》를 출판하였는데 이책에 말남의 정리글이 실리였다. 그런데 《얼음우에서》 정리자는 글의 주인공 장의숙의 이름을 알지 못하였다.

장의숙을 다룬 《얼음우에서》가 우리 이땅의 우리 조선족사회에 널리 알려진것은 1985년 제4호 《연변녀성》으로 보아진다. 이해 《연변녀성》 제4호에 1959년 말남의 정리로 된 《얼음우에서》가 《이름 모를 그 녀인》으로 번역정리되여 실리면서 필자의 주의를 끌었다. 하긴 《연변녀성》 제4호도 말남의 정리이야기 재판이여서 글의 주인공의 이름을 밝히지 못한 그대로였다.

우리 조선족들 가운데서 장의숙녀전사의 이름이 처음으로 밝혀진것은 료녕인민출판사에서 1983년에 출판한 소책자 《피어린 발자국》의 《항일투쟁의 불길속에서》이다. 이 글의 저자 정병삼은 당년 항일련군 제3군 제6사 사부 교도대 대장 겸 지도원으로서 장의숙 부부 등을 항일무장대오로 이끌었던 분이였다. 했으나 정병삼의 글은 말남의 정리로 된 글과 이어지지 않고 항일련군의 조선족 녀전사 장의숙전기로 이어지지 못하여 사람들은 의연히 장의숙녀전사로 잘 리해할수가 없었다.

필자가 말남의 글과 정병삼의 글에 토대하고 항일련군 제3군 관련 연구자료들에 토대하여 장의숙전기를 정리한것은 1998년 7월 26일의 일이다. 장의숙전기는 그후 필자저서로 된 《겨레 항일지사들》(전4권, 민족출판사, 2007년 10월 출판) 제3책과 역시 필자저서로 된 항일시기 조선족녀당원 90인전ㅡ《피바람속에 우뚝 선 풍채》(민족출판사, 2011년 11월 출판)에 실리면서 해빛을 보게 되였다. 이번에 《길림신문》 련재글로 올리면서 다시 대폭 수정정리를 거치였다.

그러면서 소라륵밀강의 얼음속에 몸을 던진 장의숙의 최후는 력사사실이며 믿을만함을 다시 한번 부언하는 바이다.

편집/기자: [ 리철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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