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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전 항미원조전선에 가던 나날들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2.14일 16:27

1951년 3월 연변에서 참군한 조선족전우들과 함께(두번째 줄 오른쪽으로 두번째가 필자).


1951년 2월 23일은 내가 혁명사업 즉 중국인민지원군에 입대한 날이다. 60년이 지난 오늘도 나의 머리속에는 항미원조 전쟁터에 가던 그때 그날의 기억이 감돌고있다.

나의 고향은 시소재지와 140리나 떨어진 두메산골 지금의 화룡시 숭선진 고성리이다.

아버지는 부지런하고 의지가 강건한 농민이였다. 농번기에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가며 3, 4헥타르나 되는 밭을 다루었고 농한기에도 쉬지 않고 일했다. 소수레로 숭선-화룡을 오가며 짐실이를 했다. 한번 오가는데 보통 6일 걸렸고 소골령을 오갈때는 천길 깊은 골짜기에 떨어질 위험이 있는 아주 가파로운 구간을 거쳐야 했다. 이런 위험도 마다하고 아버지는 숭선과 화룡을 오가는 숭선공급판매합작사의 짐실이를 도맡아싶이 했다.


1950년초에 나는 화룡중학교 3학년에 다녔다. 당시 온 숭선진에서 화룡중학교에 다닌 학생이 3명뿐이였다. 두메산골이라 수입이 적어 화룡시내에 와서 공부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동학들이 많았다.

1950년 6월 25일, 조선내전이 폭발했다.

전쟁초기 승승장구로 남진하던 조선인민군은 미군의 인천상륙으로 부득불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38》선을 넘어서는 안된다는 중국정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맥아더가 지휘하는 《련합군》은 《38》선을 넘어 계속 북상하였다.


미국전투기는 두만강, 압록강을 넘어 우리 나라 령공을 빈번히 침범폭격하여 우리 나라 인민의 생명재산을 위협하였다. 잠시적인 승리에 도취되여 리성을 잃은 맥아더는 전쟁에 국경선이 없다고 역설하면서 계속 북진하려 획책했다. 10월초에는 압록강변까지 쳐들어와 우리 나라 동북의 평화적건설을 엄중히 위협하였다.


이런 위기에 모택동주석은《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기치를 높이들고 전국 군민들이 이 운동에 뛰여들것을 호소하였다.

중국인민지원군은 락후한 무기로 강대한 미군과 용감무쌍하게 싸워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으며 후방에서는 증산절약, 자금의연 등으로 전선을 지원하는 운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그 당시 우리 고향에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발생했다. 모교인 숭선구 고성리중심소학교가 폭격 당하여 학생들은 귀중한 배움터를 잃었으며 짐실이를 떠난 아버지는 목숨처럼 여겨오던 소를 잃었다.


나는 11월 28일 《동북조선인민보》에 실린 보도를 보고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였다. 아버지는 하마트면 목숨을 잃을번 했다. 나는 미군에 대한 분노를 참을수 없어 《미군에 대한 철전지 원쑤를 기어코 갚고야 말겠다》는 결심문을 써서 학교의 벽보란에 붙였다.

항미원조전쟁이 심입됨에 따라 우리 중학교에서는 정보원으로 번역원으로 민중공작단으로 때로는 비밀리에 때로는 반공개적으로 몇패가 참군하였다.

1951년 1월에는 140여명에 달하는 졸업반학생가운데 쪼무래기 30여명만이 남아 고중시험준비 복습을 하였다.

음력설을 쉰 뒤의 어느날 학교 신민주주의청년단 총지서기인 엄태준선생님이 복습반 단소조회의를 소집하는것이였다. 당시 청년단원으로 나를 포함하여 6명이 있었다. 엄태준선생님은 엄숙한 표정으로《우리 학교에 지원군에 가는 명액이 40명이 떨어졌소. 나라의 부름이고 인민의 부름이요, 우리 학교의 명예에 속하는 일이요, 임무를 꼭 완수해야 하겠소》라고 말씀하시는것이였다.

나라의 부름, 인민의 부름, 학교의 명예… 당시 단소조장인 나는 두말없이 먼저 참군하겠다고 자보했다.

단소조회의에서 단원들이 솔선수범하고 한명 단원이 5, 6명 동학들을 설득시켜 40명 임무를 꼭 완수하자고 결의하였다.

이튿날 동원대회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와 같이 단원회의에 참가했던 한 단원이 오지 않았다. 사람을 시켜 그가 하숙하는 집에 가 보니 새벽에 짐을 사가지고 집으로 갔다는것이다. 참군열기에 찬바람이 불었지만 예정대로 동원대회를 열기로 하였다. 내가 제일 먼저 일어나 자보하자 나머지 4명 단원들이 줄줄이 자보했다. 이어 동학들이 다투어 자보하는것이였다. 한명 단원의 뺑소니로 참군하려는 열기를 식히지는 못했다. 대부분이 자보하였는데도 40명이 차지 않았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듣고 후배, 선배 수명이 자보하여 40명 명액을 채웠다.

며칠뒤 현병원에서 신체검사를 했다. 의사가 내 가슴에 청진기를 대더니 머리를 기웃거리며 다른 의사를 불러와서 재검사를 하는것이 였다. 심장검사란에 무엇이라고 썼는지는 똑똑히 모르나 아무튼 문제가 있는것 같았다.

《나라의 부름, 인민의 부름, 학교의 명예》라고 말씀한 엄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라 참군하는것만이 철전지 원쑤를 갚는 길이다고 나는 생각했다.

《항미원조전쟁에 꼭 가야 한다》고 결심한 나는《심장검사》란에 무엇이라 적어놓은 검사표를 가만히 찢어버리고 새로 한장을 요구하여 다른 동학들처럼 《심장검사》란에 《정상》이라고 써서 신체검사관을 무사히 통과했다.


고중공부를 그만두고 항미원조전선에 간다는 소식을 무슨 방법으로 집에 전하겠는가고 고민하고있을 때 아버지가 내 앞에 불시에 나타났다.

구정부와 촌정부 그리고 이웃의 도움으로 죽은 소고기를 팔고 돈을 보태여 조금 작은 황소를 사서 나의 기숙비를 벌려고 짐실이를 다시 시작했다는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강의한 의지와 따뜻한 부애를 또 한번 가슴속 깊이 느꼈다.

내가 아버지에게 항미원조전선에 가기로 한 경과를 알려드리자 아버지는 두말없이 동의하였다.

아버지는 려관에 주숙하면서 화룡을 떠나는 나를 보려고 하였으나 로비가 떨어져 부득불 숭선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버지가 떠나는 날 나는 아버지와 함께 2, 3리 길을 동행했다. 서로 묵묵히 아무 말도 없이…아버지가 이만 하면 됐으니 그만 돌아가라고 몇번 권고하자 나는 그 자리에 못박은듯 서고 말았다. 아버지는 가다가는 뒤를 돌아보고 한참 가다가는 또 뒤를 보군 하였다. 아버지 뒤모습이 보이지 않을때까지 나는 손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

그날 밤, 나는 아버지의 뒤모습이 떠오르고 자애로운 어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사랑스런 동생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샘물처럼 쏟아져 나오는것이였다.

2월 20일의 대보름을 며칠 앞두고 우리 40명은 김재호선생님의 인솔하에 새벽에 화룡역에 나왔다. 나는 아버지가 주는 돈으로 하숙비를 물고나니 한푼도 남지 않았다. 홀몸으로 길을 떠나야 했다. 새벽에 기숙사 할머니가 지어준 밥을 대충 먹고 할머니의 《잘 가세, 잘 가세! 》하는 바램을 들으며 빈몸으로 그것도 친척친우들의 바래움도 없이 전쟁터로 향했다. 나는 차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며 떨어지는 눈물을 참고 또 참았다.

서성중학교, 투도광흥중학교와 다른 현에서 온 학생들이 조양천에 집중되자 정월 대보름 2월 20일에 조양천역을 떠났다. 빈몸으로 떠난 나는 친구들이 주는 김밥, 엿으로 때를 에웠다.

나흘만인 2월 23일 아침 기차는 심양역에 도착했다. 우리가 심양 북대영이란 곳에 이르니 부대에서는 낡은 군복과 새 이불을 발급했다. 일부 군복에는 피묻은 흔적까지 있었다. 진짜 참군한것이다. 그때 내 나이는 16세 3개월이였다.

다른 전우들은 시내에 가 담요를 산다며 야단이였는데 1전한푼 없는 나는 이불 한채로 절반은 담요로 하고 절반을 덮고 지냈는데 몇달뒤에야 집에서 보내온 10원으로 담요를 샀다.

연변에서 입대한 전우들은 대부분이 한어를 잘하지 못하여 부대에서 한어를 배웠다.

전쟁의 수요에 따라 한패 또 한패의 전우들이 전선에 나갔다. 나는 련대에서 문서로 있었는데 1951년 11월에야 분배되여 포병 21사 주둔지인 료녕성 부신시에 도착했다.

내가 배치받은 부대는 동전서, 동전서의 전우 질순의, 곽준경(녀자가 남자로 분장한 전투영웅, 영화 <전화속의 청춘>의 원형) 등 영웅들이 나타난 이름난 영웅 부대였다.

항미원조전쟁의 수요에 의해 한달간에 보병부대로부터 당시 선진적인 로케트포(카츄사)로 무장한 포병으로 변신한 부대였다.

1951년 11월 내가 부신시에 도착했을 때는 201, 202, 203퇀은 이미 전선에서 싸우고있었다. 나는 사단 사령부 관리과에 배치 받았다.

부대의 로간부들은 중국인민해방군포병창시인인 조선족무정장군을 잘 알고있었다. 그래서 부대에서는 나를 쇼홍( 小洪)이라 부르지 않고 조선족을 존중해서 쇼초 ( 小朝)라 불렀다.

당시 부신시에 207, 208, 301퇀이 있었는데 아무때든 조선에 나갈 준비를 하고있었다.

이 기간 나는《고옥보의 쾌속 식자법》으로 한어, 한자를 더 익혔고 고중과목을 끝마쳤다.

1952년 8 월 말, 명령을 받고 부신시에 있던 사령부는 3개퇀을 거느리고 기차로 안동(지금의 단동)에 도착하였다.

부대에서는 단동에 며칠 묵었는데 조선전쟁의 치렬함을 실감했다. 밤이면 단동쪽은 등불이 환하였으나 조선 신의주쪽은 캄캄야밤이였고 미군비행기소리와 폭격소리가 가끔씩 들려왔다.

저녁녘에 우리 부대는 압록강다리를 건넜다. 조선측 교두에는 미군비행기의 폭격하에 부상당한 아이를 안고 《지원군아저씨 구원해주세요》란 커다란 선전화가 걸려있었다. 그 선전화를 보는 순간 내 가슴이 막 찌저지는것 같았다.


신의주에서 약 30리쯤 가니 논밭에 빠진 미군땅크가 보였다. 3대의 찌프와 7대의 트럭을 가진 우리 부대는 그날밤에 40리밖에 남진하지 못했다. 남진하면 할수록 전쟁분위기가 짙었다.

미군비행기는 수시로 조명탄을《하늘에 걸어놓고》폭격소사하였다. 우리 부대는 낮에는 산골짜기에 들어가 휴식정돈하고 밤이면 길에 나섰다. 나흘만에 한명의 상사자도 내지 않고 목적지인 황해도 곡산의 립암산산골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몇달간 훈련하다가 1953년초에 평안남도 강동군(평양시와 약 70리 떨어진 곳) 문흥리에 사령부를 옮겼다. 원산일대와 진남포일대에 재상륙하려는 미군의 음모를 분쇄하려는 반상륙작전의 수요로 동해안과 서해안에 각기 한개퇀씩 카츄사부대를 배치했던것이다.

1953년 봄에 우리 사령부에는 조국에서 보내온 많은 위문품이 왔다. 운좋게 나는 고향 연변림업계통의 한 《3.8》삼림조사대원들이 보낸것을 받아안았다. 자신들의 작업사진과 치솔, 치약 등 생활필수품이 들어 있었다. 얼마나 큰 기쁨과 고무를 주었는지 모른다.

지원군과 조선주민들간 소통해야 할 일이 있으면 련락원인 내가 맡아 나섰다. 어느날 지원군의 한 전사의 실수로 조선주민과 오해가 생겼는데 그 조해사업을 내가 해야 했다.

나는 《지원군이 왜 조선에 왔는가? 미국이 조선을 침략하였기때문이다. 미국이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더라면 지원군이 조선을 도우러 오지 않았을거며 이런 일도 있을수 없다. 지원군 전사의 책임도 있겠지만 이 사건의 장본인은 미국이다》고 해석했다. 리당위원장이 먼저 우리 측의 립장을 헤아려 주어서 나는 리당위원장과 함께 조선주민과의 오해를 풀고 배상비까지 물어주었다. 이 일로 나는 간부대회에서 구두표창을 받았다.

나는 사령부재건에 필요되는 물자구입 임무를 맡고 동분서주하였다. 낮에는 대충 쉬고 밤이면 물자구입에 나서군 했는데 별 쉴새없이 뛰여다녔다.

한번은 시멘트 실으러 개천비행장으로 가야 했다. 앞당겨 임무를 완수하려고 어둠이 들기전에 길에 나섰는데 그만 미군전투기 F86의 습격을 당했다. 이 전투기는 저공비행을 잘하는데 민간에는 누구네 집에 숟가락이 몇개 있다는것까지 다 안다는 말이 떠돌았고 조선백성들은 《쌕쌕》이라고 불렀다.

트럭을 버리고 사람만 대피하면 그만인데 우리는 트럭을 버릴수 없었다. 《쏘련제 가스 51형 》트럭을 모는 운전수는 국민당부대에서 기의하여 해방군에 참가한 분이 였다. 20여년 운전경력을 가진 그는 아주 령활하게 차를 잘 몰았다.

비행기동향을 알려고 나는 올라가지 말라는 운전수의 말을 마다하고 운전수실에서 제꺽 뛰쳐나와 적재함에 올라탔다.

미군비행기가 기수를 수기고 사격할라하면 나는 자동차를 천천히 후퇴하게 했다. 몇보라도 후퇴하면 생존하는 판이다. 이렇게 가다 후퇴하고 또 가다 후퇴하다 높은 벼랑밑을 찾았는데 트럭을 벼락밑에 딱 붙였다. 우리는 어둠이 깃들때까지 대피해 있다가 미군전투기가 떠난뒤에야 다시 길을 재촉했고 끝내 앞당겨 임무를 수행하였다.

사령부 후근사업에 밤을 이어가며 일하고 또 미군폭격을 교묘하게 대피하면서 훌륭하게 물자구입을 완수한데서 부대에서는 나에게 3등공을 수여하고 트럭운전수에게는 20만킬로메터 무사고운행으로 2등공을 수여했다.

근 1만명을 헤아리는 한개 사단에서 2등공, 3등공을 세운 공신이 500여명 되는데 나는 그중의 일원으로 된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우리 부대에는 항미원조 1등공을 세운 공신이 없었음)


지원군은 제 2 차 전역에서 승승장구로 남진하여 1950년 12월 6일에 평양을 수복하고 《38》선 부근까지 미군을 몰아냈다.

미국은 이기지 못할 전쟁이라는것을 간파하고 《유엔》을 조종하여 1950년 12월 14일에 조선정전 3인 위원회를 내오고 당시 《유엔》 쏘련대사인 마리커를 조해인으로 내세웠다.

그때 우리 나라는 해방초기여서 인민경제복구건설이 아주 긴박하였는바 정전할 의향이 있었다. 제 4차, 5차 전역에서도 엄중한 타격을 받은 미군은 1951년 6월 상순에 담판할것을 또 구걸하였다.

하여 조선전쟁은 싸움하다가는 담판하고 담판하다가는 싸움하는 특수한 전쟁으로 변했다.

1953년 5월에 있은 하기공세에서 큰 타격을 받은 《련합군》의 사령원 클라크는 정전협정에 조인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클라크는 자신의 회억록에 이런 글을 썼다.

《나는 미국력사상 승리를 거두지 못한 정전협정에 조인한 첫 사령관이다 》, 《나는 실망과 고통을 느끼고있다. 나의 전임들도 나와 같은 느낌이 있을것이다》.


이날이 바로 1953년 7월 27일이다.

33개월 진행된 항미원조전쟁은 끝끝내 중조인민의 승리로,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의 승리로 력사를 기록하였다.

나는 조선땅을 밟아서 14개월만에 조국에 돌아오고 1954년초에 전업명령을 받고 고향에 개선하였다.

부모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껴안았으며 동생들은 퐁퐁 뛰면서 기뻐 야단이였다. 내가 전쟁터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마을에 전해지고 큰 경사로 되였다. 나는 더없는 자호감을 느꼈고 이 정신으로 한평생을 살아가리라 다짐하였다.

/ 홍춘식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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