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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백인82]근 반세기 교육사업에 종사해온 교육자ㅡ리희일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4.05.30일 14:31
《리희일선생님께서 혁명에 참가하신 이후의 경력은 기본적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빛나는 력사와 일치되는바 혁명사업의 수행과정에 표현된 높은 정치적 안목, 풍부한 리론실천적 경험 및 고상한 인간적덕성은 우리 모두가 따라배울바이다. 특히 리희일선생님은 우리 당의 훌륭한 교육가이며 어문사업지도일군으로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교육사업과 어문사업의 발전을 위하여 혁혁한 기여를 하시였다. 리희일선생님은 신념과 지조의 화신이다.》

- 장덕강 《신념과 지조의 화신 – 리희일선생님》에서

1997년 11월 6일

리희일선생은1918년 1월 12일, 조선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풍애라는 두메산골의 가난한 농가에서 둘째아들로 고고성을 울린다.

그로부터 11년후 리희일선생은 어머니와 형님과 함께 7년전에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찾아 중국 할빈으로 들어온다. 어렵사리 아버지와 만난 그는 여기저기 옮겨다니다가 12살에 화피전자에 금방 선 조선족소학교에 입학하여 가, 갸, 거, 겨와 1, 2, 3, 4를 배운다. 비록 늦깍기 학생이였지만 어려서 고향의 락동강에서 쏘가리, 뱀장어를 잡을 때보다도 더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하였다. 하지만 계속 부모를 따라 떠돌다보니 열다섯살에야 할빈 도리에 있는 할빈 금강소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을 마치고 《9.18》사변후 일제가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꾸린 《안전농장》 하동 11계의 6년제 보통학교 3학년에 입학하여 보습과까지 마치고나니 어언 열여덟살이 되였다.

소학교를 졸업한후 갈 곳이 없어 방황하던 그는 심양에 가서 대만측량학원에 입학한다. 졸업때 학교에서 소개해준 직업ㅡ일본군통역을 단연히 거절하고 하동에 돌아와 측량사, 가게, 책장사를 시도했으나 다 실패하고 다시 농사일에 들어선다. 이런 역경속에서도 그는 공부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의 교육학강의록을 받아서 열심히 자습한다. 스무살나이에 아이 하나까지 딸려가지고 이렇게 자습한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때의 정신세계를 그는 이렇게 개괄한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ㅡ마음만 먹으면 못해낼 일이 없다.》

이러한 그였기에 급기야 교원시험에 합격되여 1939년 9월부터는 주하현 모아산국민학교에서, 1년후에는 하동국민우급학교에서 우수교원이라는 평가까지 받는다. 1945년 3월 그는 졸업생들에게 마음이 바른 사람으로 되라는 뜻에서 자기의 반신사진 뒤면에 붓으로 마음 《심(心)》자를 써서 한장씩 나누어주었다. 그해 8월 일제가 망하자 위만시대 6년간의 그의 교원생활은 끝을 보게 되지만 미래의 훌륭한 교육가로서의 기반은 이미 다져지기 시작했고 성숙의 발걸음은 빨라지게 된다.

그는 8월말부터 하동조선소학교를 회복시키라는 과업을 맡고 반달여의 고심과 노력끝에 9월 15일에 6년제 12개 학급에 학생은 500여명, 교직원은 10여명, 교장은 리희일이 하동조선소학교를 정식으로 창립한다.

《그때로부터 혁명에 관한 서적들을 학습하면서 차츰 눈을 뜨기 시작한》 그는 《조선독립동맹》에 가입하며 동맹 하동총지부의 조직위원, 주임위원(서기)직을 맡고 이듬해에는 상지현 조선학교 교원련합회의 주임까지 하면서 2년 남짓 하동조선소학교에서 사업하다가 북만의 유일한 조선족중학교인 상지조선중학교에서 조선어문교원을 담임하고 불철주야로 일한다.

1948년 6월 그는 여덟식구(어머니, 안해, 아이 다섯)를 거느리는 무거운 짐을 안해 량순희에게 맡기고 할빈 동북행정위원회 민정부 민족사무처로 가게 되며 거기서 처장인 주덕해동지를 처음으로 만난다. 교육간사직을 맡은 그는 《북만지구조선인간부훈련반》에서 배운것을 밑천으로 조선인간부학교에서 《사회발전사》를 강의하면서 주덕해동지의 신변에서 사업하다가 이듬해에는 아예 주덕해동지를 따라 가족을 여직 상지 하동에 남겨둔채 연변으로 아주 온다.

리희일선생이 간사로 배치받은 중공연변지위 선전부는 시초에 인원이 셋이였는데 부장에 항일간부인 최채동지였고 배재화동지가 선전과장이였다. 줄곧 로농간부문화교육사업을 책임졌던 그는 1951년에 지위선전부 간부교육과 부과장을 맡으며 그해에 동북국당학교에 가서 1년간 학습한다.

드디여 1952년 9월, 5년간이나 갈라져있던 가족들을 조직의 배려로 연길로 데려오는 일로 바삐 돌다보니 연변조선족자치구 창립경축대회에 참가할수 없었던 평생 유감을 남기기도 한다.

1952년 10월 리희일선생은 《연변일보》의 전신인 《동북조선인민보(전신은 원래 동북에 있은 <길림일보>, <신민보>, <단결시보> 등 세개 조선문신문이다) 》에 제3임사장으로 부임된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34 세. 1954년 5월, 리희일선생은 신문사업경험을 총화하고 금후 신문사업을 강화할 대책을 강구하는것을 중심의제로 한 제2차전국선전사업회의에 참가하여 모주석, 류소기 등 중앙지도자들을 만나고 그이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긴다. 약 5년동안 신문사업을 하는 사이에 리희일선생은 주당위의 여러 가지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한편 중요한 원고를 심열하고 중요 론설문도 써야 했는데 그가 심열한 중요원고는 1000여편, 친히 쓴 론설문은 100여편에 달한다.

1956년 주당위에서는 리희일선생을 훈춘현 당위서기로 내정하고 훈춘에 보내기로 하였지만 년말에는 그를 다시 주당위 문교부장으로 배치하였다. 1년후에는 문교부와 선전부를 합친 새 선전부가 나오고 리희일선생은 선전부장 책임을 지고 3년동안 연변의 정치사상사업과 문화교육사업을 주관한다.

1963년, 리희일선생은 예전에 주당위 조직부, 성당위 조직부에서 받던 임명장과는 달리 중앙조직부에서 보내온 연변대학 당위서기 임명장을 받아안는다. 그가 연변대학에서 제일 처음으로 부딪친 문제는 졸업생을 배치하기 어려운것이였다. 전국의 여느 대학과 다를바 없는 이것은 대학의 전공이 사회수요와 맞지 않기때문이였다. 그는 우선 학교지도자들이 조사연구를 한 기초에서 학교의 성격과 방향을 바로잡기 시작한다.

1964년 4월 1일 그는 건교 15돐경축대회에서 개혁방안에 관한 보고를 하였는데 이 개혁방안은 학교 제6차당대회에서 대회결의로 채택되여 실시하게 된다. 1966년부터 그는 학교사업을 좀더 잘해보려고 학생숙사에 내려가 그들과 같이 먹고 자면서 생활하였으며 그해 여름에는 사무실 한구석에 침대를 놓고 자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한다.

하지만 결국 문화대혁명에서 전 5년은 《주자파》, 《그물에서 빠진 우파분자》, 《민족주의분자》, 《조선특무》, 《주덕해의 결사적인 보황파》란 죄명을 들쓰고 주덕해, 요흔, 전인영 등과 같이 《조리돌림》을 당하며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인인 부인을 잃고 가정이 사분오렬되는 처참한 《검은무리》생활을 하고 후 5년은 《시집살이》를 하며 옹근 10년이란 세월을 보내게 된다.

1976년 10월 《4인무리》가 타도되고 10년대란이 끝을 보게 되자 리희일선생은 다시 연변대학의 당위서기사업을 맡게 된다.

10년 내란후 리희일선생은 내란기간에 파괴된 연변대학을 춰세우고저 무진 애를 쓴다. 그는 학교의 규모를 확대하고 학부도 증설하여 민족의 발전과 사회주의건설에 절박히 수요되는 각 방면의 인재를 양성할수 있는 민족대학을 영위할 장기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현하고저 헌신적으로 분투한다.

원래 성소속인 연변대학을 중앙소속으로 되게 하려고 그는 10년간 전국정협위원으로 있을 때 정협회의에 제안을 써내고 흑룡강성과 료녕성의 민족사무위원회와 교육청을 쑤셔 성원서까지 중앙에 올려보내게 한다.

연변대학의 기본건설을 위하여 자치주정부, 성정부, 국무원의 해당 지도자들을 여러번 찾은 끝에 구락부, 도서관, 체육관을 지으며 2000평방메터에 달하는 숙사와 1만 2000평방메터에 달하는 학교청사도 짓기 시작한다.

이 노력과 성과들은 후날 연변대학이 명실상부한 민족종합대학으로, 《211공정》학교로, 교육부와 성에서 합작운영하는 대학으로, 와룡산기슭에 남부러워하는 새 캠버스를 앉히는 등 휘황한 발전일로를 걷는데서 불가결의 요소로, 든든한 밑거름으로 된다.

갖은 풍상고초를 겪고 파란만장한 세월과 동무하면서 근 반세기동안 교육사업에 종사해온 리희일선생은 1984년 9월부터 연변대학 고문으로 계시다가 1986년 9월 20일 68세에 아주 리직휴양하게 된다.

리희일선생은 리직휴양후에도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의 편찬사업을 주관하셨고 1991년부터 연변대학 후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 길림성교육위원회 후대관심사업위원회 위원, 연변조선족자치주 후대관심사업위원회 고문으로 계시다가 2001년 1월 18일 페암으로 별세했다.

신념과 지조의 화신이며 혁명의 영원한 불사조인 리희일선생은 당과 인민에게 유익한 사업에 여열을 쏟아붓는것으로 혁명자의 청춘은 영원한것이라는 진리를 실천하셨다.

리희일 프로필

1918.1 조선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출생

1928년 말 중국 흑룡강성에 이주

1939.5 – 1945.8 주하현 모아산국민학교, 하동소학교 교원

1945.9 – 1947.11 하동소학교 교장

1947.12 – 1948.6 상지조선중학교 교원

1948.7 – 1949.3 동북행정위원회 민족사무처 교육간사

1949.4 – 1951.8 중공연변지위 선전부 간사, 간부교육과 부과장

1952.10 – 1956.12 동북조선인민보사 사장 겸 주필

1956.4 중공연변주위 제1기위원

1957.1 – 1960.6 중공연변주위 문교부장, 선전부장

1962.11 중공연변주위 제2기위원

1963.7 – 1966.8 중공연변대학 당위서기

1971.12 – 1972.4 연변자치주 로임개혁판공실에서 사업

1972.5 – 1974.6 중공연변대학 당위부서기 겸 혁명위원회 부주임

1974.7 – 1983.11 연변대학 혁명위원회 주임, 중공연변대학 당위서기

1978.11 중공연변주위 제4기위원

1978 – 1988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5기, 제 6기 전국위원회 위원

1983.12 – 1986.8 연변대학 고문

1986.9 리직휴양


참고문헌: 《숨차게 걸어온 길》 리희일 저

편집/기자: [ 량은실견습기자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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