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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좇아” 70성상, 그 걸음 멈출줄 몰라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5.12.31일 11:25
-음악거장 최창규옹이 추구한 “가장 아름다운 화음”을 들어본다



이제도 소망하나...“한 10년만 더 살수 있다면...”

주말산책길에 연길부르하통하 빈하공원의 보행교구간에서 마주치군 하는 한 어르신이다. 내가 어르신과 처음으로 마주친 때가 지난해 동지 전날 일요일이였다. 오후 2시무렵 보행교에서였는데 매서운 서풍을 가르며 어르신은 보행보조차에 의지해 한발작씩 내딛고있었다. 신체단련의 의미를 초월한, 바로 그 한발작 앞을 향해 꿋꿋이 도전하는 모습이였다.

바람이 너무 세서 도와드리려고 다가섰지만 움츠린채 좀은 다급해져보였을 나한테 로인은 오히려 안심시키려는듯 따뜻이 미소지으시며 “괜찮아요. 나는 단련하러 여기로 다니군 합니다. 고맙습니다. 어서 가보세요.”라고 차분히 말씀하시며 손저어주신다. 화애롭고 조용한 분이시며 완강한 의지의 소유자임을 느낄수 있었다.

겨울은 가고 록음이 짙어진 초여름의 한 일요일날 역시 오후 2시무렵, 어르신이 보행교 남쪽 다리목언덕길을 “톺”고 있는 모습이 눈에 안겨와 달려갔다. 함께 언덕길을 올라가고나서 나는 어르신에게 문안인사를 드리고 어르신과의 대화를 이어갔다.

어르신은 바로 그 보행교로 통하는 언덕길 아래 신원아빠트에 사신다. 눈, 비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나오시는것을 장년 견지하신단다.



어르신이 아빠트를 나서서 보행교까지 올라가시는데는 100메터 안되는 거리이지만 횡단길을 건너야 하고 경사도가 20도는 더 될 그 언덕길을 넘어야 하는데 그 언덕길에는 차량들의 통행을 막느라 가름대가 2중으로 설치돼있어 어르신한테는 극한과 같은 어려움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르신은 올해 81세, 뇌중풍 후유증으로 오른쪽 반신이 마비돼 거동이 불편하고 언어장애도 겪고 있는데 올해 19년째 난다고 한다.

“처음엔 서지도 못했지요... ‘걸음마’를 다시 타서 이렇게 걷고 있지요. 집사람도 많이 고생시켰습니다. 오른쪽 손발이 말을 잘 듣지 않으니 왼손 사용을 대신 개발했지요. 보조차 없이도 다닐수 있었댔는데... 그래도 매일 도전하는거지요.”하신다.

“도전”, 그리고 “19년”!

어르신이 극복해낸 어려움과 고통을 상상할수가 없었다.

빈하공원의 싱그러운 수목향기를 실어오는 강바람을 만끽하시듯 보행교에 올라선 어르신은 걸음을 멈추고 물길따라 저 멀리로 바라보시는데 그러는 어르신의 표정에 아련한 서정이 비낀다.

“어르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제일 많이 하시게 됩니까? ”

“내가 이제 한 10년은 더 살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 하하하, 욕심이겠지요? 그런데 계속해 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까 ...”

어르신은 이내 또 “나는 지금도 만족합니다. 하고싶은 일을 하고 있고 근심걱정 없이 살고있으니 ...”라고 하시는데 어르신의 표정은 행복해 보였다.

“만족하시다는 말씀을 행복하다고 리해해도 될가요? 행복은 어떤것일가요? ”

“글세요, 행복은 하고싶은 일을 할수 있다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래서 행복합니다!”라고 어르신은 확고히 말씀하신다.

그리고나서 어르신은 이어“부부로 만나 50년을 같이 살아온다는것도 행복한 일이지요”하면서 바로 2일전 부인과 결혼 50주년 금혼기념일을 맞았다는 행복한 메세지도 전해주시며 회심의 미소를 지으신다.

투병 19년 세월동안에도 당신이 하고싶은 일을 할수 있는데는 당신을 부추켜 이르키고 당신의 생각을 속속들이 읽어주신 부인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국가와 조직의 덕”으로 량주가 퇴직금을 둔둑히 받을수 있어 보장이 든든하기에 가능한것이라며 어르신은 진정 감사한 마음으로 사신다고 말한다.

헌데 어르신이 종사했던 직업이며 하시고 있는 일, 계속 하시고 싶은 일도 음악창작이라 하실줄이야?

련상이 안되여 감히 존함을 여쭛고보니 내가 마주한 어르신은 연변가무단의 전직 창작원으로 사업하시다 정령 퇴직한 국가1급작곡가, 연변가무단 및 민족음악창작계의 “거장”(안국민, 최삼명,허원식, 최창규를 “음악계 4대거장”이라 존칭)최창규선생님이실줄이야! 내가 “태산을 알아보지 못한것”이였다.

작품으로 만나보는 최창규선생



평생 음악창작외길을 걸어온 선생은 관현악곡, 명상곡, 무용음악, 가극, 성악작품, 영화음악, 화극음악 등 다종 쟝르의 우수한 작품을 200여곡 내놓았다. 선생은 특히 무용음악창작에 많은 심혈과 정력을 쏟아부어 민족무용음악창작에서 “오두를 차지했다( 独占鳌头)”는 평이다.

지난세기 70년대, 80년대와 90년대초기는 선생의 음악창작 왕성기였다.

연변가무예술에서의 경전작품으로 꼽히는 무용곡 《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김봉호작곡)는 선생이 김봉호선생의 가곡을 무용곡으로 개편(1970년)한 성공작이다. 그시기 내놓은《군민은 한마음》(1972년), 《벌목공》(70년대 캄보지야인민공화국 시하누크주석 연변방문환영만회에서 공연됨 ), 《논물관리원》(합작,건국30주년경축전국문예콩클에서 1등상 수상), 《분배받은 기쁨》(1980년, 길림성 1등상, 전국소수민족콩클에서 우수상 수상), 《푸른 숲 설레이네》(1982년, 길림성창작극목 1등상 수상), 《춘향과 리몽룡》(1986년, 제2기전국무용콩클 무용곡창작3등상 수상), 《처녀지》(1989년, 길림성 제1기 예술절 음악창작1등상 수상), 《달 따는 소녀》(1990년,전국무용콩클 음악창작 3등상 수상 ) 그외 다수의 아동무용곡을 포괄한 선생의 무용곡들은 전국적인 무대공연에서 높은 인기와 평가를 받았다. 떠올리기만 해도 사람들의 성정을 도야시키는 그 작품들의 음악적감화력은 지금도 의연하다.

가곡작품에서도 선생은 《친구의 노래》, 《일터에 피여난 사랑의 꽃이여》,《황금나락 설레일 때》, 《현대화행진곡》등과 같은 수십곡의 성공작을 내놓았다.

가극작품에서 선생과 작곡가 안국민, 최삼명, 허원식 네분이 공동으로 창작해낸 대형 가극《아리랑》은 1991년 제1회 문화상 신극목대상, 음악상을 수상한 리정비적인 작품으로 가무단에 소장되였고 선생의 명상곡작품《봇나무》는 1994년 제4기 장백산 문예상 및 연변진달래문예상을 수상, 2010년 10월 북경음악대청에서 진행한 “중국조선족작곡가 수상작품교향음악회”에서 연주되였다.

선생이 투병 중 창작한 취주악곡 《연변무곡》은 2003년 한국제주도관악제에, 2013년 4월 로씨야울라지보스또크국제관악예술축제에 가서 연주되였고 또한 취주악곡《경축행진곡》은 200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50돐경축행사에서 특등상을 수상했다.

선생이 중앙민족음악학원을 졸업하면서 창작한 관현악조곡《림해의 노래》(4악장)는 중앙민족음악학원악단에서 연주되였고 중앙인민방송에 방송되였으며 2015년중국인민항일전쟁 및 세계반파쇼전쟁 승리 70돐기념 연변대형교향음악회에서 연주되였다.

취주악곡《경축행진곡》,《연변무곡》 등 작품들은 투병생활을 하면서 선생이 미디창작을 결부하여 내놓은 작품들이다.

민족의 음악예술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온 최창규선생의 공로를 인정해 2004년 11월 13일에는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연변음악가협회, 연변가무단, 연변대학 예술학원, 《예술세계》잡지사의 공동주최로 “최창규음악작품연구토론회”가 열렸는바 그 토론회에서 박서성, 안국민, 최삼명, 신호, 김덕균, 리훈, 황성렬 등 중국조선족예술계의 지명인사들이 론문을 발표해 최창규선생의 사업정신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동안 쌓아온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도 했다.

사명감 안고... “이건 내가 당연히 할 일”

컴퓨터배우기는 퇴직을 림두하면서부터 선생이 스스로에게 정한 퇴직후의 첫 숙제였다고 한다. 당시 연변가무단 전업인원들에게도 실무 공구로는 컴퓨터조작을 상상할수 없었던 때였는데 선생은 퇴직한 이듬해로 컴퓨터를 사서 동네 타자부에도 찾아다니면서 타자부터 배워 컴퓨터악보제작을 “힘들지만 재미있게 배우다가” 그만에 뇌출혈로 쓰러졌던것이다.



그때까지만도 모든 악보들은 작곡인들이 필로 수제(手作)한걸로 돼있었다. 뇌출혈로 쓰러진 때가 선생이 퇴직한지 1년뒤인 1996년 12월 초였는데 발병시 선생은 안국민선생의 작곡집 전자악보제작을 시작해놓은 상태였다고 한다. 병상에서 일어난후 선생은 왼손으로 건반을 조작하여 그 안국민선생의 작곡집과 자신의 작곡집 악보제작을 완성했는데 그뒤로 그 많은 전자악보들이 손생의 손에서 만들어졌다는것은 상상할수가 없다.

선생한테는 집은 예이제 다를바 없는 “창작실”이라 한다. 피아노외 미디음악제작 기본 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선생이 퇴직한후, 투병생활을 하면서 수만원을 들여 마련한것이라고 한다.

“컴퓨터로 이제는 미디음악창작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선생이 다시 “걸음마를 떼”고 재활치료와 운동으로 일상을 보내면서 스스로에게 정한 또 하나의 숙제였다고 한다.

선생은 “창작실”에서 지금은 두손으로가 아니라 왼손 한손으로 피아노키보드를 다루면서 음감을 찾고 컴퓨터로 타자를 , 악보제작 및 미디음악제작을 하나하나 완성해내고 있었다.

진정 선생의 건강이 념려되고 또 그만한 업적과 명예를 누리실만 하게 정령퇴직하신 몸이기도 한지라 가족과 선생을 아끼는 음악계계 친인들은 선생의 음악작업을 만류해보기도 했지만 선생의 “고집”을 꺽지 못했다고 한다.

컴퓨터악보제작은 전문인들에게 있어서도 보통으로 품이 드는 일이 아니라고 한다. 투병생활을 하면서 선생은 그 불편한 몸으로 우리말 작곡집, 연변음악간행물들을 위해 “악보컴퓨터설계인”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선생은 1999년부터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격분기 음악정기간행물《연변음악》( 제1기부터 20기까지)의 악보컴퓨터설계제작 , 2004년부터 4년간 《예술세계》잡지의 가곡부분 악보컴퓨터설계제작을 담당했고 9년간 조선족가사전문지 《해란강여울소리》신문의 악보제작을 무료로 맡아해주셨다.

최삼명, 동희철, 김종화 등 작곡인들의 개인 가곡작곡집과 기악곡 교본 등 컴퓨터악보제작을 담당했다.

2012년 연변조선족자치주60돐을 맞으며 세워진《자치주성립 경축의 노래》비의 악보도 선생이 자진해 만들어주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매체에 전해지기도 했다.

음악인의 책임감, 사명감으로 잃어졌던 교성곡 《장백의 노래》(정진옥작곡)1,2악장 총보를 안국민선생과 두분이 퇴직전 함께 정리, 가미하여 복원해 가무단에 바친것외에 선생은 퇴직후에 자신의 여러수의 무용곡총보를 만들어 연변가무단에다 바쳤다.

또한 가극《아리랑》(5개 악장으로 됨) 총보전부의 악보제작을 3년만에 완성하여 연변가무단에 바쳤다.

올해 1월 9일 연변가무단에서는 전체 임직원대회에 선생을 모시여 이에 특별히 감사를 표했다. “이는 중국조선족음악발전에 대한 크나큰 공헌”이라면서 선생의 “한 예술가의 덕예와 정신가치는 영원한 향연으로 후세에 남겨질것”이라고 “공로패”에 담아 기리였다.

한송이“꽃”을 피우기 위해 ...“나의 지식은 나만의것이 아니다”

편곡을 음악창작에 있어서 개념적으로 쉽게 리해하자면 기존의 멜로디에 음악적 다양성을 제공하는 작업이다. 혹은 노래를 바꾸는 작업이다. 특정 악곡을 다른 형식으로 바꾸어 꾸미거나 원곡 형태 이상으로 표현하여 원하는 음악의 효과를 얻기 위해 음악리론, 성악, 기악등에 관한 지식으로 목소리, 악기, 화음, 리듬, 박자 등의 조화를 재구성하고 전개하는 작업인바 이는 전문적인 음악지식을 필요로 하는 재창조공사라고 할수있다.

그런 의미에서 편곡은 작곡에서의 경지로 된다고 할수있다.

국가1급작곡가이시며 연변가무단 단장으로 사업하신 적 있는 전임 연변문련주석 박서성선생은 한 음악프로그램에서 최창규선생에 대해 “화성사용, 종횡진행, 악기대비법 등 면에서 재주적이고 독특한 풍격을 지니신 분으로서 편곡대가로도 불리울수 있는 위대한 작곡가”라고 하였으며 연변가무단예술발전에서의 선생의 공로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하였다.

연변가무단음악창작실주임이고 선생의 제자이며 후배동료인 황기욱선생은 “‘음악거장’이신 대선배님으로서, 그것도 투병 중임에도, 예순, 칠순, 팔순...년세가 무색하게 허다한 시간을 옛동료, 후배동료, 업여 창작인들의 작품을 수정, 편곡, 지도해 주고 악보제작을 해주는데 할애해오고있는 사실은 음악계서는 다 아는 사실입니다. 같은 창작을 하는이의 립장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며 불과 2년전 연변가무단관악이 로씨야로 처음으로 진출시에 취주악곡으로 《 연변무곡 》을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악대총보제작을 선생이 다 맡아주셨다고 한다. 그는 “선생님은 평생 음악창작에서의 새로운 기법을 연구해 창작수준을 시대에 발맞추어 승화해오셨다”고 말하면서 “선생님은 음악사업에 지닌 사명감을 안고 철저한 직업정신을 실천해오신 분”이라고 공경하신다.

워낙에 말수가 적으신 선생님께서 기자한테 편곡에 대해 “꽃그림”으로 형상적으로 리해시켜주신다. 꽃만 그려질것이 아니라 꽃잎과 배경도 있어야 하는 “꽃그림”. 당신의 손에 팔순이 되도록 음악창작후배들과 업여창작인들을 돕는 일감을 놓지 않으신데 대해서는 “나의 지식은 나만의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조직에서 배양한 덕입니다. 내 도움이 필요되고 내 지식이 필요된다면 당연히 나서서 도와야지요. ”라고 하실 따름이다.

“음악을 할수 있어 행복한 사람”과“속상했던”그 때 그사람



두 딸이 올리겠다는 잔치상도 마다하고 금혼기념일에 연길인민공원에서 소박하게 금혼기념사진을 남겼다는 “지음반려”.

선생의 부인은 연변가무단의 첼로연주자(국가2급연주원)로 무대를 빛냈던 리가자선생이시다. 두분은 음악꿈을 품은 청년남녀로 만나 한분은 음악을 창작하고 한분은 음악을 연주하는 일을 하는 동지로, 동료로 부부로 50년넘게 함께 해온 지음반려(知音伴侣 )시다.

50여년간 선생은 악상에 빠질 때면 밤새 재떨이에 담배재꽁초리를 수북하게 쌓던 재직시의 습관이 개변된것외엔 달라진것이 없다고 부인은 말한다. 재직시엔 가무단에서는 창작임무가 수시로 내려졌고, 선생은 그 임무를 “군사명령”으로 받들어 가차없이 리행했다며 침식을 잊으리만큼 창작작업에 몰입하던 일본새는 지금도 그대로라고 한다. 워낙에 책임심이 가하고 섬세한 분이신지라 누구한테서든 청만 들었다면 선생은 밤낮을 잊는 노력을 경주하시여 당신의 마음에 가득하고 청든이의 마음에 만족하시게끔 편곡지도 혹은 수정해 주신다고 한다. 선생님의 뛰여난 음악지식과 덕예에 퇴직후 “창작실”에는 음악인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당신의 이름석자도 찾아볼수 없는 일에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며 부인은 “솔직히 많이 속상했다”고 하신다.



80년대에 두분이 퇴근길에 연변가무단(옛터)앞에서 남긴 기념사진.

부인은 선생을 “온순한 사람”이라고 표현하면서 선생이 화내는 경우는 오직 한가지, 당신이 창작할 때 무릇 옆에서 “건드리는 일”에 화를 버럭 내신다고 한다. 그렇게 알심들여 창작한 작품이 발표돼 인정 받을 때가 또한 선생이 그만큼 더없이 기뻐하는 때라고 한다.

선생은 빙그레 웃으시며 기자를 보고 “나를 필요로 하고 나의 지식이 필요되는 사람들에게 나는 도와주어야 하고 지식을 배워줘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는거라고 생각합니다.”고 하신다.

부인은 “저분은 음악을 하려고 태여난 사람인것 같습니다. 80평생 음악은 저분의 전부입니다. 저분은 음악사업에 평생을 바친 분이라고 봅니다. 이제와서 생각하니 음악을 할수 있어서 저분은 행복했습니다. 음악을 할수 있어서 저분은 19년간 중풍 후유증을 극복하고 저토록 정신건강을 유지해올수 있었던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속상했던 때를 돌이켜보면 이제는 다 고맙게 생각됩니다...”라고 하신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쌓아온 성과”이제는 사회에 재부로 남기며

작품얘기를 하다가 선생의 관현악작품선집출판준비가 마무리되였다는걸 알았다. 리가자선생은 작품집 하나로 한평생의 창작인생을 대언할수는 없겠지만 음악창작인생을 차분히 정리하는 마음과 또 음악후세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에서 남편과 두분은 작품집출판을 준비하게 되였다고 한다.

선생의 작품집출판을 준비하고있음을 아시고 평생 동지, 음악벗으로 지내온 안국민선생이 2014년 5월 26일 작품집 서두언을 써주셨다고 한다. 그뒤로 얼마후 안국민선생이 그렇게 타계실줄은 몰랐다며 선생은 무척이나 애석해하시면서 그 글을 기자한테 보여주셨다.

“최창규작곡가는 전직작곡가로 된후 생활과 민족음악에 깊이 뿌리박고 뼈를 깎는 노력과 참답고 세심한 작업을 거쳐 많은 관현악작품을 창작하여 사명과 기대에 어김없이 성과를 쌓아올렸다. 그는 50여년의 창작생애에서 명상곡‘봇나무’를 비롯한 관현악작품 10여부, 가극 무극 및 연극음악 10여부, 무용음악 50여부, 가요작품 100여수 그리고 소년아동을 위한 무용곡 20여부를 비롯한 여러 쟝르의 우수한 음악작품을 창작하였는데 거이 모든 작품들이 다 관현악과 배합되여있다. 이번에 출판하는 작품집에는 그의 많은 작품 중에서 10여부의 대표적인 작품을 정선하여 묶은것으로써 2부의 취주악곡을 제외한 8부의 작품은 관현악의 제 요소들을 충분하게 적용하고 발휘한 전범들이다....”

안국민선생은 선생의 작품가운데서 각급 수상 작품들에 대해서도 소개하면서 “최창규작곡가의 작품선집의 출판은 연변관현악실태를 여실히 반영하며 관현악사업을 지향하는 후배들에게 보귀한 거울로 될것이며 연변관악의 발전을 추진함에 있어서 적극적인 작용을 일으킬것이리라 믿어의심치 않는다”고 했다.



2010년 10월 북경음악대청에서 있은 조선족작곡가 수상작품교향음악회를 마치고 남긴 기념사진(왼쪽 8번째분이 최창규선생).

작품집은 CD로도 동시에 제작된다고 한다

황기욱연변가무단창작실주임에 따르면 래년, 가무단 창단 70주년 기념 시즌에 선생을 포괄한 “4대음악 거장”의 작품음악회를 가무단에서 처음으로 경봉(敬奉)할 예정이라고 한다.

꿈 좇는 그 소년은...



중앙민족음악학원에서 꿈을 무르익히던 시절.

최창규선생이 음악꿈을 좇던 이야기는 그대로 한폭의 영화같다. 선생의 고향은 왕청현 배초구다. 부모님들은 배초구에서 소상업을 경영하다가 일본놈들의 강탈에 못이겨 후에 귀농했다고 한다. 선생은 형제 4형제 중 막내이다.

배초구에 당시 자그마한 성당이 있었는데 선생의 모친은 성당에서 풍금수로 일한 적 있었다. 7살 나던 동년 최창규는 모친이 백로지에 풍금건반문양을 그려놓고 “풍금”연주련습을 진지하게 하던 모습을 옆에서 본다. 그러는 아들을 모친은 하루는 성당으로 데려간다. 한복차림으로 아들을 위한 특별연주를 시작한다...모친의 풍금소리에 미묘한 음악세계에 빨려든 동년최창규는 장차 어머니처럼 음악연주인이 되리라고 다진다...

그 때로부터 선생은 음악 및 악기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게 된다. 선생이 11살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다나니 어머니의 고생이 막심해졌지만 광복후 모친(력사인물 림춘추와 이모사촌간)이 연변전원공공서 (공산당이 연변에 설치한 초기 정권기구)의 초대소인 “동해려관”을 경영하게 되면서 선생네 가정은 연길로 이주해왔고 선생은 배초구아사히학교(현 왕청소학교)를 다니다가 연길중앙소학교에서 계속 공부할수 있게 된다.

14살나던 해 소년최창규는 당시 연변고급사범학교(중학반, 고중학년반이 있음)중학반에 입학해 다니였는데 학교 취주악대에 든다. 그 때 어머니한테서 소년 최창규는 독일제 바이올린을 선물받는다. 다른 문화과과당에서도 책상밑으로 음악리론 책들을 탐독하리만큼 음악공부에 빠졌던 중학시절을 회상하면서 선생은 학교 때의 그런 “위법행위”에 대해서는 반성하면서 자신의 음악외길에서 음악공부를 자학한 수확이 크다고 한다. 중학시절에 선생은 음악리론을 터득하기 시작했고 모자트음악작품을 비롯한 세계음악작품들에 대해서도 료해하기시작했다고 한다.

“음악공부를 여기서는 할수 없다”고 생각하고 다음단계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3학년에 올라서니 학교적으로 “앞으로 교원으로 일할 사람은 남고 그렇지 않을 사람은 다른 학교로 갈수 있다 ”는 방안을 내놓아 그때라 소년최창규는 오매에도 가고싶던 평양음악대학으로 지향해 간다. 7월에 즈음해 시험을 쳐야 한다하니 최창규는 두달만에 시험준비를 위해 집으로 돌아왔는데 다시 평양으로 가기전에 그만 “6.25”전쟁이 폭발된 바람에 그의 평양음악대학꿈은 접을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같이 음악을 흔상하는 50여년의 지음반려(知音伴侣)

고민 중 할빈에 로씨야인이 경영하는 사립 고등음악학교가 있다는걸 알고 그해 겨울 이번엔 무작정 그 학교로 간다. 선생의 바이올린 연주기예는 거기서 배워냈고 사립학교에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다시 고민이였다고 한다. 마침 사범학교시절의 스승인 김재천선생이 소개해주어 선생은 1952년 1월부터 연변문예사업단(연변문공단으로 략칭, 연변가무단의 전신)서 바이올린, 손풍금 악사로 출근하게 되였다. “호경은 길지 않다(好景不长)”고 “3반운동”에 띄워 문공단은 원래 33명이던 악대성원을 11명으로 줄이는 바람에 18살배기 청년최창규는 1년만에 거기서 나올수밖에 없었다.

연길에서 “동해려관” 경영을 그만두고 화룡에 가서 려관을 경영하던 모친의 연줄로 그는 이내 화룡중학교에 가서 교도간사로 있으면서 학교 취주악 교원으로 일하게는 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음악청년최창규는 자신의 음악꿈을 그렇게 가두어둘수 없다 생각하고 얼마 안있어 교장을 찾아 사직을 신청한다. 교장은 그 음악청년의 꿈을 읽고 “뜻대로 안되면 다시 오라”하고 놓아준다.

이번엔 전쟁때문에 장춘에 와서 머물고있던(1953년) 조선국립영화촬영소에서 악사를 모집한다는 정보를 얻고 찾아갔는데 시험을 쳐서 거기서 악대성원으로 일하게 된다. 그런데 “6.25”조선전쟁이 끝나면서 촬영소가 조선으로 돌아가게돼 배움에 목말랐던 최창규는 단연 촬영소를 따라 조선으로 간다. 페허가 된 평양에서 반년간 복구사업에 참가하다가 이건 아닌데 싶어 당시 촬영소에 있던 중국인 10여명과 함께 선생은 다시 중국으로 온다.

음악인재가 귀한 때라 귀국한후 선생은 심양에 있는 동북탄광문공단으로 어렵지 않게 가게 된다. 거기서 1년후 동북탄광문공단과 북경탄광문공단이 합병하면서 중국탄광문공단이 설립되였는데 선생은 중국탄광문공단성원으로 북경에 가서 1956년까지 2년간 악사로 있는다. 1957년도부터 선생은 다시 연변가무단에 돌아와 악대성원으로 바이올린, 손풍금 등 악기를 연주하게 된다. 그때 선생은 22살이였다.

선생의 창작생애는 그때부터라고 한다. 가무단의 공연수요로 때로는 간단한 편곡임무도, 무용곡 작곡임무도 무난히 해내면서 음악창작의 웅심을 품는다.. 《3국거중》은 선생이 가무단에 온지 1년뒤에 가무단의 포치로 내놓은 선생의 처녀작인데 저으기 음악계를 놀래킨다. 1959년 동북3성 복건전선(福建前线) 위문공연단에 연변가무단에서도 30명 성원이 참가했다. 연길로 돌아올 때 상해에서 소집된 중앙정치국회의에 참가한 연변조선족자치주 주덕해주장의 요청으로 공연단은 영광스럽게 그번 중앙정치국회의에 연변의 가무예술을 선보였다고 한다. 그중 무용《3국거중》도 들어있었다고 한다. 선생도 손풍금수로 위문단에 갔었다. 그때 주덕해동지한테서 선생은 큰 고무를 받았다고 회상한다.



주덕해동지(뒤줄 오른쪽으로부터 아홉번째사람)가 상해국제판점 25층 옥상에서 연변가무단 복건전선위문공연단 성원들과 함께 남긴 기념사진(최창규는 뒤줄 왼쪽 첫사람).

선생의 작품집출판에 관해 써놓은 안국민선생의 글에 의하면 정진옥선생의 교성곡 《장백의 노래》제4악장의 관현악편곡은 선생이 그때에 즈음해 정진옥선생의 위탁을 받고 해낸것이다. “선생의 창작재능은 그로부터 보편적인 인정을 받게 되였고 이윽고 연변가무단 지도부에서는 선생을 더욱 큰 전업적인 인재로 육성하기 위하여 중앙음악학원에 보내여 학습하게 했다”고 한다.

주지하다싶이 《장백의 노래》는 이미 1956년 제1차전국음악주공연에서 일등상을 수상했고 1957년 모스크바세계청년축전에서 은상까지 받아안은 “대작”이였다.

선생은 1959년 정진옥선생으로부터 편곡을 위임받던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저같은 햇내기가 어떻게 이런 ‘대작’을 맡겠습니까?”하며 감히 못받겠다고 뒤걸음질 하는것을 “정진옥선생은 ‘대담히 하라’고 맏겨주셨습니다. 나한테는 더없는 기회를 주신거지요. 조직의 덕분에 나는 그렇게 중앙음악학원작곡계(연수반)서 배울수 있었던것이기에 나는 조직과 우리의 민족음악사업을 위해서 복무를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잊은 적 없습니다...”

《장백의 노래》제4악장편곡을 완성해서 얼마후 조선함경북도방문단이 연변을 방문왔는데 그때 연변가무단에서는 처음으로《장백의 노래》1,2,3,4 악장을 완정하게 연주하였는데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중앙음악학원작곡계서 선생은 저명한 두명심교수의 가르침을 받을수 있었고 음악지식고를 드디여 마음껏 탐닉할수 있었다고 한다. 중앙음악학원에서 3년간을 학습하고 돌아온후 선생은 가무단의 전직작곡직에서 일하게 된것이다. 가무단에 돌아오기전 선생은 졸업작품으로 《림해의 노래》(4악장으로 됨)와 같은 성공작을 내놓았고 그때로부터 선생은 오로지 관현악세계에서 아름아운 화음을 만드는 일에 올인해왔던것이다

취재를 마무리면서

여직 선생은 끼까(Giga)쏘프트웨로 미디음악을 창작해오셨다고 한다. 최신식 로찌끄(Logic)쏘프트웨어에 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이젠 정력과 신체가 자신없어지신다고 한다.

연속된 인터뷰과정에서 기자는 최창규선생의 음악에 대한 절절한 갈구심, 겸손화이(谦逊和易), 고매한 인격, 철저한 직업정신과 무사 공헌, 봉사정신에 세례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글을 마무리면서 나는 정녕 요즘 높은 인기를 누리고있는 노래《꿈을 좇는 사람》(《追梦者》)속의 주인공을 만난것이 아닌가 싶다.

...

창문 열고 샐녁의 태양을 맞이 하네

저 먼곳에 당초 내 꿈이 있었지

꿈이 있는 곳이 천당이 아니더냐

한길에 땀 뿌리며 달리다

해 지면 래일 또 하나의 태양 맞이해

려명이면 난 웃으며 또다시 창문을 여노니

...

편집/기자: [ 김영자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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