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자 앱 | | 모바일버전
뉴스 > 문화/생활 > 문학/도서
  • 작게
  • 원본
  • 크게

[수필]돌절구/김룡운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2.05.08일 11:28
우리 집은 원래 장춘에 살았다. 1958년 전국적으로 강철제련, 인민공사를 하면서 어데나 할것없이 생활이 곤난하였고 특히 식량난에 허덕이였다. 아버지께서는 농촌에 가면 그래도 애들의 배라도 불릴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우리 가정을 데리고 1962년에 하향하였다.

그때 우리는 교하시 오림향 가신자라는 마을에 자리를 잡게 되였다. 이 마을은 한족마을이였는데 아버지는 논물관리원으로 있게 되였다. 그때만 하여도 농촌에 사람이 적었기에 군데군데 화전밭을 일굴 때가 많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논을 일구어 벼농사를 지어 생산대에서 량곡을 분배하는 이외에도 다소 수확을 더 거두었다. 어머니께서는 벼를 석마간에 가서 빻아오군 하셨다. 그런데 우리 집은 마을 맨 서쪽에 있었고 석마간은 마을 맨 동쪽에 있었다. 하기에 무거운 곡식을 이고지고 왔다갔다 하는것도 힘들었고 또한 때론 조금되는 석마감을 가지고 먼곳으로 오가기도 성가시였다. 어머니는 늘 입버릇처럼 《돌절구가 하나 있었으면…》하고 되뇌이군 하셨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씀을 그저 잠자코 듣고있을뿐이였다.


어느날 아버지께서는 북산에 나무하러 가셨다가 큰 돌덩이 하나를 발구에 싣고 오셨다. 우리는 어안이 벙벙하여 《아버지, 이게 무슨 돌덩이예요?》하고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아버지께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였다. 우리 집앞에 정자나무 한그루가 있었는데 절구 앉힐 좋은 자리였다. 온집식구들은 젖먹던 힘까지 다해 그 청석돌을 고정시켜놓았다. 인젠 석공을 들이대여 돌절구를 쫗아내는 작업이 남았다. 석공을 댄다 해도 그 값이 만만치 않았다. 어머니는 직접 석공일에 손을 대기로 하였다. 말이 쉬워 구멍만 뚫으면 돌절구가 될것 같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여기에는 기술과 인내성이 동반해야 한다.

어머니께서는 이른 봄부터 돌절구공사를 시작하였다. 먼저 나무 두대를 콤파스모양으로 고정시켜 한쪽끝에 연필을 매여 몇바퀴 두르니 둥그런 원이 그려졌다. 어머니는 그 원형에 따라 먼저 중심을 잡아 중간살부터 떼내기 시작했다. 왼손에는 정, 오른손에는 망치, 《딱, 딱딱, 딱딱딱딱…》 절주있는 소리에 따라 아무리 청석이라도 살점이 떨어지기는 마련이였다. 하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였다. 하루에 기껏해야 반공기 한공기씩 돌부스레기를 퍼냈다. 석공처럼 하루종일 이것만 붙들고 있을수는 없었다. 농사하고 집일하고 밥짓고 빨래하고 시부모를 모셔야 하기에 어머니는 항상 팽이처럼 돌아쳐야 했다. 기껏해야 비오는 날, 궂은 날, 쉬는 날 그리고 밤, 이것이 어머니께서 석공일을 할수 있는 전부의 시간이였다. 이른봄부터 시작한 일이 그해 가을에야 마무리되였다.

아버지께서는 정자나무에서 벌레나 락엽따위들이 절구확에 떨어지지 않게 천막을 설치하고는 돌절구뚜껑까지 만들어 덮어놓았다. 한족들은 연자를 쓰기 좋아하는것에 반하여 우리 조선족들은 절구를 쓰기 좋아한다. 돌절구 앞쪽 운두는 살짝 낮추고 뒤쪽은 그만큼 높였다. 앞을 낮춘건 아마도 절구공이 부딪침을 방지할 요량같고 뒤쪽을 높인것은 확속에 곡식이나 가루따위들이 넘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배려에서 쫗아낸것 같기도 하였다. 절구를 보고 또 보고 하여도 석공의 걸작은 아닌것 같다. 재주를 날린 화사함도 없고 돈냄새를 풍기는 복잡한 예술도 없다. 그저 수수하게 한쪼각 한쪼각 쫗아서 만들어놓은 소박한 돌절구라는것뿐이다. 대신 펑퍼짐하고 듬직한것이 마음에 들었다.


어머니께서는 돌절구 시공을 마친 첫날에 수수를 빻아 수수밥을 했다. 그땐 매 사람마다 몫을 지어준 다음에는 남의것을 넘보지 않았다. 어머니께서는 시중을 들다나니 늦게야 밥상에 앉게 되였다. 어머니께서는 밥을 씹으면서 집식구들과 말을 하였는데 그때문에 입술에 붙은 수수밥알이 떼구르르 굴러 밥상밑에 떨어졌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시합도 아닌데 나와 누나는 손이 동시에 그 밥알에 가 닿았다. 나보다 네살 우인 누나는 나에게 양보하였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어머니께서는 많은 먹거리를 돌절구에 빻아냈다. 세월에 쫓긴 우리가 하향한지 어느덧 3년이 된 1965년이였다. 자식들이 학교에 다니게 되자 부모님들은 자식들의 교육을 념려하여 교하에서 60여리 떨어진 전진향 액륵혁이라는 조선족산골마을로 이주하게 되였다. 부모님들은 갈길이 아무리 멀어도 돌절구만은 잊지 않으셨다.


장정들을 모아 그 육중한 돌절구를 트럭에 싣고 새 마을에 이주하니 산골이였으나 조선족들이 많아 마음만은 편안했다. 우리는 돌절구를 출입문옆에 앉혔다. 그 자리가 절구가 차지할 안성맞춤한 자리였다. 거기에다 검정무쇠솥뚜껑까지 씌워놓으니 대문에 들어서면 절구가 보여 조선족집이라는 딱지가 붙은것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우리는 처음 이사왔으나 돌절구의 덕으로 많은 아낙네들이 드나들었고 동네사람들과 인츰 친숙해졌다.


동네아줌마들은 방아감만 있으면 머리에 이고 와서는 빻아가군 했다. 고추요 메주요 찰떡이요 벼요 보리요 심지어 돼지먹이, 소먹이까지 빻아가군 하였다. 항상 우리 집 마당은 주고받는 말, 웃고 희닥거리는 소리로 시끌벅적하였다. 동네사람들이 많다보니 이사람 가면 저사람, 저사람 가면 이사람 오고 우리는 늘 집대문을 열어놓군 하였다. 하긴 돌절구가 우리 집을 지켜주니 걱정이 없었다.

개혁개방문이 차츰 열리면서 절구도 팔자를 고치게 되였다. 그런 고된 로동을 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희미하나 아마도 90년대 초반이라고 생각된다. 어느날 몇몇 아줌마들이 또 떡방아를 찧으면서 한 아줌마가 먼저 말주머니를 꺼냈다.

《저 머꼬 , 쌍둥이 애비 말이다 리혼했단다.》


《뭐—》


《저, 쌍둥이 에미 말이다 한국에 뭐, 사촌동생이 있다고 했잖아. 초청해서 한국에 가서 몇년 있더니 마, 리혼한다고카데.》


《애들이 저리 큰데 리혼은 뭔 리혼이꼬.》


《요즘 사람들은 리혼을 노래처럼 하니까 뭐, 한다면 하는거겠지 뭐.》


《그럼 리혼당한 셈이제.》


《몰다. 당했는지 뭔지. 쯧쯧쯪…》


그후 1995년 나는 도회지 중학교에 전근하게 되였다. 하지만 돌절구로 말하면 어머니의 처녀작이자 우리 가정에 남긴 유일한 유산이기에 나는 버리기 아까와 또 그 육중한 돌절구를 트럭에 실어 이사를 왔다. 그래도 다행히 나는 학교 단층집에 살게 되였기에 돌절구도 그대로 안식처가 있게 되였다. 돌절구는 인젠 력사적사명을 완성한것 같다. 누구도 돌절구를 찾는 사람이 없게 되였으니 말이다. 하긴 요즘 사람들이 게으른데다 시장에 가면 다 있으니 말이다. 뭐 골무떡, 감자떡, 찰떡, 시루떡, 된장, 고추장, 엿…뭐든지 다 있다. 하지만 돌절구에 굴려낸 음식보다 맛이 적은것은 또 웬 일인가. 그러기에 돌절구에 빻아낸 고추가루는 엄청 비싸다. 하긴 그만큼 맛이 있기때문이다.


돌절구는 아량이 넓다. 쓰거우면 쓰거운대로, 짜면 짠대로, 시면 신대로, 매우면 매운대로 그저 짜증 한번 내지 않고 다 받아들인다. 마치 저 넓고넓은 푸른 어머니 품처럼…이제 언젠가 이 주택을 허물고 아빠트단지를 지으면서 돌절구도 요정이 날텐데 참, 생각하면 아깝다.


/(교하) 김룡운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뉴스조회 이용자 (연령)비율 표시 값 회원 정보를 정확하게 입력해 주시면 통계에 도움이 됩니다.

남성 100%
10대 0%
20대 0%
30대 100%
40대 0%
50대 0%
60대 0%
70대 0%
여성 0%
10대 0%
20대 0%
30대 0%
40대 0%
50대 0%
60대 0%
70대 0%

네티즌 의견

첫 의견을 남겨주세요. 0 / 300 자

관심 많은 뉴스

관심 필요 뉴스

트로트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가수 '김호중'이 최근 교통사고를 내고 달아낸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는 가운데, 그의 소속사 대표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매니저에 김호중을 대신해 경찰에 출석하라고 지시한 이가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김호중은 지난 9일
1/3
모이자114

추천 많은 뉴스

댓글 많은 뉴스

1/3
"70년 일했는데 건물 없어" 이순재, 스타병 걸린 후배 '상습 지각' 쓴소리

"70년 일했는데 건물 없어" 이순재, 스타병 걸린 후배 '상습 지각' 쓴소리

사진=나남뉴스 어느덧 70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연기 경력의 대배우 이순재(89)가 다시 태어나도 배우가 되겠다고 고백해 눈길을 끌고 있다. 이날 17일 이순재는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허심탄회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지난 7일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재산 많이 잃었다" 구혜선, 학교 주차장에서 포착 '집도 없어'

"재산 많이 잃었다" 구혜선, 학교 주차장에서 포착 '집도 없어'

사진=나남뉴스 배우 구혜선이 일정한 주거지도 없이 차에서 생활하는 모습이 포착돼 놀라움을 안겼다. 지난 16일 tvN '진실 혹은 설정-우아한 인생'에서는 구혜선이 만학도 대학교 졸업을 위해 학교 주차장에 차량을 주차하고 노숙하는 장면이 그려졌다. 마지막 학기를

습근평, 로씨야 대통령 뿌찐과 회담

습근평, 로씨야 대통령 뿌찐과 회담

5월 16일 오전, 국가주석 습근평이 북경 인민대회당에서 중국을 국빈 방문한 로씨야 대통령 뿌찐과 회담을 가졌다. 사진은 회담전에 습근평이 인민대회당 동문밖 광장에서 뿌찐을 위해 성대한 환영의식을 거행하는 장면./신화사 기자 5월 16일 오전, 국가주석 습근평이

모이자 소개|모이자 모바일|운영원칙|개인정보 보호정책|모이자 연혁|광고안내|제휴안내|제휴사 소개
기사송고: news@moyiza.kr
Copyright © Moyiza.kr 2000~2024 All Rights Reserved.
모이자 모바일
광고 차단 기능 끄기
광고 차단 기능을 사용하면 모이자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모이자를 정상적으로 이용하려면 광고 차단 기능을 꺼 두세요.
광고 차단 해지방법을 참조하시거나 서비스 센터에 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