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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꽃의 소택지에 갇힌 황제의 후예들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7.03.20일 09:43
옛 마을 새 마을, 우리네 전설은 이어진다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옛마을 새마을 제2편]

  뿌리깊은 한족마을을 보며 떠돌이 우리를 생각한다

  (흑룡강신문=하얼빈) 아무래도 먼저 설명을 하고 건너가야 할 것 같다. 아니면 강의 소택지 하택(菏澤)을 연꽃의 소택지 하택(荷澤)으로 잘못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고장은 워낙 선진(先秦) 시기 산동(山東) 남부의 아주 이름난 늪이었다. 일찍 제왕 요(堯)가 양을 기르던 늪이 있었으며 실제 당(唐)나라 때 용의 못이라는 의미의 용지(龍池)라고 불렸다고 전한다.

  "옹정(擁正) 13년(1735) 곽현(郭縣)을 부설(附設), 강역은 주(州)의 옛것대로였으며 하택(菏澤)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청(淸)나라 건륭(乾隆) 21년본(本) 《조주부지(曹州府志)》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택 박물관에 전시된 원나라 시기의 목조선박을 구경하고 있다. 옛날 강은 현재의 하택 시가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훗날 경내에 모란꽃이 많이 난다고 해서 원래의 하택 현성지역을 모란구(牡丹區)라고 개칭했다고 우리 일행을 안내했던 유충(劉忠) 씨가 말했다. "다들 낙양(洛陽)을 모란꽃의 고향이라고 말하는데요, 기실 모란꽃으로 유명한 곳은 바로 우리 하택이지요."

  당(唐)나라의 무측천(武側天, 624~705)이 겨울날 당장 꽃을 피우라는 칙지를 내리고, 나중에 이를 따르지 않은 모란을 전부 뽑아서 추방시켰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고도(古都) 낙양은 '낙양화(洛陽花)'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모란의 재배면적이 제일 크고 품종이 제일 많은 곳은 낙양이 아닌 이 하택이라는 것이다.

  "모란의 품종은 1천여 종이나 되는데요, 해마다 곡우를 전후로 뇌택호(雷澤湖)에 만발하지요."

  뇌택호는 하택이라는 이름을 만든 호수인데, 팔괘(八卦)에서 천둥 뇌(雷)는 동쪽을 뜻하며 소택 택(澤)은 서쪽을 뜻한다. 마침 뇌택호는 하택에 두 개 있는데 각기 시내의 동서 양쪽에 위치한다. 꽃이 피는 4,5월이면 뇌택호는 금세 붉고 희고 검고 푸르며 노란 꽃으로 뒤덮인다. 당나라 때의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읊조리듯 "꽃이 피고 꽃이 지는 20일, 성의 사람 모두 미친 듯 즐긴다."

  하필이면 섣달 그믐날에 우리 일행이 하택을 찾은 것은 뇌택호가 아니라 초하룻날 새벽의 마을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하택 시내의 남쪽 교구에 있는 옛 마을 유성촌(劉城村)은 마을이 생긴 지 벌써 5백년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한다.


유성촌 석비의 소개물을 살펴보고 있는 일행.

  사실상 대륙에서 옛 촌락은 하루 밤 사이에 꽃이 지듯 소실되고 있다. 국가통계국의 수치에 따르면 2000년 중국에는 무려 360만개의 자연촌이 있었지만, 2010년에 270만개로 줄어들었다. 그동안 단 하루 사이에 옛 촌락을 망라하여 약 300개의 자연 촌락이 유실된 것이다.

  그러나 하택 외곽의 유성촌은 아직도 흥성하고 있다고 유충씨가 말하고 있었다.

  "우리 마을은 옛 풍속이랑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데요. 설 명절이면 집집마다 새벽에 문을 열고 사람을 기다려요."

  유충 씨는 초하룻날의 이른 새벽에 호텔에 와서 일행이 주숙한 방의 초인종을 눌렀다. 설날은 중국의 제일 성대한 명절이다. 섣달 그믐날 한족들은 자시(子時) 즉 밤 12시에 물만두를 먹는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의미로 물만두를 '교자(交子)'라고 부른다. 이 물만두를 유성촌은 그믐날이 아닌 초하룻날 아침 6시에 밥상에 올리며 뒤미처 이웃 어르신에게 인사를 다녀온다는 것.


옥수수가 주렁주렁 달린 농가, 시골정취가 추녀 아래에 달려있다.

  유충 씨는 산동무용대학의 교원으로 있는데, 이번에 설을 쇠고자 미리 고향마을로 돌아왔다고 한다. 처마 밑에 옥수수가 주렁주렁 걸리고 툇마루에 옥수수의 자루가 더미로 무덕무덕 쌓인 그의 고향집은 시골의 정취가 다분했다. 객실 정문 맞은쪽의 벽에 집안의 가계도가 걸려 있었고, 가계도 앞의 제사상에 향불이 피어나고 있었다. 마을의 집집마다 모두 이런 가계도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에피소드가 하나 생겼다. 유충 씨의 모친이 손님에게 교자 즉 물만두를 올리면서 '밴새'라고 말했던 것. '밴새'는 연변의 조선족들이 물만두를 이르는 말로, 실은 중국말 '편식(扁食)'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 '편식'은 대륙 남부 복건성(福建省)의 특유한 어휘이다.

  정말로 유씨는 이 어휘처럼 복건성에 왔다고 유씨의 제19대 후손인 유한봉(劉漢峰, 78세) 옹이 말하고 있었다.

  유한봉 옹은 초하룻날 아침에 유충 씨가 설 인사차로 일부러 찾은 이웃의 유일한 '형님'이었다. 그는 마을 소학교의 교원 출신으로 옛날의 시골선비처럼 유씨 가계의 역사에 깊은 학식을 갖고 있었다."우리의 중시조는 유언심(劉彦沈)이라고 하는데요, 복건성에서 산동 포태현(蒲臺縣)으로 왔다고 합니다."

  중시조 유언심은 원(元)나라 때 포태현에서 현위(縣衛)로 있다가 그냥 머물렀다는 것. 조주 일대는 요․금(遼․金), 원나라 때 북방민족의 남침 경유지였다. 이에 따라 병란이 심했고 또 황하가 범람하면서 땅이 황폐하고 인가가 희소했다. 명(明)나라 초, 정부는 산동 등 지역의 농부를 이주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게 했다. 영락(永樂, 1403~1425) 연간, 유언심은 세 아들을 데리고 금제(金堤, 하택 남쪽 지역)의 북쪽에 이주하여 그곳에 안착하였다. 이때부터 100여 년 동안 유언심과 그 후손은 촌락을 만들고 성채와 담을 세웠다. 성채는 날을 따라 나무처럼 커지고 높아졌으며 마치 성읍을 방불케 했다. 나중에 촌락의 이름을 유씨의 성곽이라는 의미로 유성(劉城)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마을이 일떠선 후 유씨 집안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한 사람은 적지 않았다. 시조 유씨처럼 관직에 있던 선인(先人)은 가계도에 따로 용머리 모양의 비문을 만들고 있어서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나중에 유충 씨가 가계를 밝힌데 의하면 유씨의 생존하고 있는 제일 윗세대는 제17대이었다. 유충 씨의 부친이 제18대이니, 그의 집안의 윗세대 인물은 단 한명 뿐이라는 것. 그제야 유충 씨의 집안에 설 인사를 오는 마을 사람들이 유독 줄을 잇고 있는 영문을 알 수 있었다.

  와중에 동행했던 지인이 무심코 웃음을 터뜨렸다. "절을 하는 저 코흘리개가 마치 개구리처럼 폴짝폴짝 뛰네요."

  솔직히 그 웃음에는 경이(驚異)가 뒤따르고 있었다. 어른이나 어린이 할 것 없이 슬개골이 깨지도록 텀벙텀벙 무릎을 꿇고 가계도에 큰절을 올리고 있었다. 하늘의 신명(神明)에게 절을 올리면 그처럼 공경할지 싶었다.


이른 아침 마을에 인사를 다니고 있는 촌민들, 신물인 '홰나무 할배'가 길가에 서있다.

  날이 밝자 설 인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길에 꾸역꾸역 모습을 드러냈다. 구경을 나가려는 일행에게 유충 씨의 모친이 문어귀에 있는 홰나무를 다치지 말라고 재삼 귀띔을 했다.

  "우리 딸애가 홰나무의 향로에 무심코 앉았는데요, 까닭 모를 병을 크게 앓았지요."

  유충 씨의 모친은 홰나무가 50여 년 전에 고목에서 새로 움텄다고 하면서 '홰나무 할배(槐樹爺爺)'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홰나무에는 또 누군가 얼핏 홰나무를 다친 탓으로 그 무슨 병을 앓았다는 이야기가 한둘 아니었다.

  마을의 신령스런 나무는 이 홰나무처럼 산 나무만 아니었다. 집마다 문어귀를 가로막는 죽은 토막나무가 있었다. 유충 씨의 말을 따르면 귀신을 쫓는 액막이 나무인데, 음력 그믐날부터 초하룻날까지 사용한다고 한다. 또 이날만은 전기나 가스 대신 풍구를 쓰며 '마디마다 향상'한다는 의미의 '절절승(節節升)'으로 깻잎 대를 아궁이에 태운다. 객당에 들어서는 문설주의 양쪽에는 특별히 문신(門神)을 공양하여 섬기고 있었다.

  유성촌의 제일 성스런 곳은 궁극적으로 마을의 유씨 종묘였다. 동네방네 설 인사를 마친 사람들은 두셋씩 짝을 지어 종묘로 가고 있었다. 길가에는 조선족마을의 전혀 만날 수 없는 풍속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마을에 어린애가 와글와글 하잖아요. 정말 사람이 사는 고장입니다." 일행 중 누군가 저도 몰래 길게 뽑는 탄성이었다.종묘 바로 옆의 소학교에는 유충 씨가 다니던 시절 1학년만 해도 3개 반급이 되었다고 말한다. 지금은 부근 마을의 어린이들까지 이곳으로 다니면서 학교의 규모는 오히려 더 늘어나고 있었다.


종묘의 석비 앞에 모여선 촌민들.

  설 무렵이었지만 종묘 역시 학교의 개학날처럼 북적이고 있었다. 종묘에 우리 일행을 안내한 유술교(劉術敎) 씨는 유씨 마을의 족장 격이었는데, 11년 전 종묘의 제사장이 사망하면서 그 직무를 잇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그 역시 유충 씨의 '형님' 유한봉 옹처럼 마을 소학교의 이름난 전직 교원이었다.

  "오늘 같은 음력설이나 청명 날에는 1만 명이 종묘에 찾아와서 제사를 지냅니다."

  유성촌은 1천여 가구의 3천 3백여 명 상주인원이 있는 마을이다. 마을 가족은 물론 친지 이상으로 종묘를 찾아오는 셈이다. 실제로 유씨의 종족은 유성촌 부근의 50여개 마을에 분포하며, 명절 때면 이런 마을은 대표 등을 종묘에 파견하고 있었다.


종묘에 보존되어 있는 유씨의 옛 족보.

  유술교 씨는 예전부터 종묘가 사람들의 심중에 메카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고 말한다. 종묘에 전시되어 있는 유씨의 제5대 인물 영정은 명나라 때의 유물이며 극좌운동인 '문화대혁명' 때 어느 촌민의 품에 감춰져 보존되었다고 한다. 종묘는 하택시 정부에 의해 올해부터 구급(區級) 문화재로 등재되고 있었다.

  유충 씨는 마을의 자랑은 그뿐만 아니라고 말한다. "노인들이 전하는 이야기인데요, 우리 마을에는 유씨 시조의 전설도 전하고 있어요."

  이야기의 유씨 시조는 유성촌을 만든 명나라 때의 유언심을 앞서 동한(東漢)을 개국한 황제 유수(劉秀)를 말한다. 신망(新莽, A.D.8~23) 말년, 천하가 혼란하자 전 조대의 혈통을 갖고 있던 유수는 고향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이 무렵, 유수는 적군이 뒤쫓자 현 유성촌 부근의 동굴에 몸을 숨겼다. 유수는 동굴에서 잠깐 눈을 붙이다가 문득 벌레 하나가 목덜미에 기어오르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유수는 마음이 언짢아서 냉큼 손가락으로 벌레를 두 동강 냈다. 이때 갑자기 동굴 밖에서 적군의 인기척이 들렸다. 겨우 밖으로 몸을 피한 유수는 그제야 벌레가 위급한 상황을 알리느라고 그의 목덜미에 기어올랐다는 걸 깨닫는다. 나중에 그는 동강난 벌레를 찾아 다시 하나로 붙여놓았다. 그때부터 이 벌레는 몸뚱이의 중간 부분에 엉겨 붙은 마디가 생겼다는 것. 이 벌레는 유성촌의 부근에만 쉽게 만날 수 있다고 유충 씨가 거듭 말하고 있었다.


유씨 종묘의 사당에 모신 '성지', 명나라 때의 옛 건물이 보존되어있다.

  5백년의 마을에 생긴 천년의 전설은 이뿐만 아닌 듯 했다. 그때 유수에게 음식을 공양했던 마을의 처녀가 있었다고 전한다. 훗날 유수는 황제로 등극한 후 그녀에게 상을 내리고자 신하를 마을에 보냈다. 이 시골처녀는 황제가 그녀를 찾는다는 소문을 듣자 너무 놀라서 졸도, 당장에서 숨졌다는 것. 이 처녀를 묻은 홍낭묘(紅娘廟)는 20세기 60년대까지 마을에 잔존했다고 한다.

  "유성촌은 전설이 있고 종묘가 남아 있어요. 또 우리 마을의 풍속이 살아있지요."

  유충 씨의 말에는 이름 못할 긍지감이 흠씬 배어나고 있었다. 전래된 이 마을의 땅처럼 깊은 사랑은 어디서나 황제의 후예에게 숨 쉬고 있는 듯했다.

  문득 나의 슬픈 이야기가 머리에 떠올랐다. "암만 생각해도 이처럼 뿌리가 깊이 내린 근성(根性)의 마을 문화기억이 없어요."

  1세대의 할아버지는 100년 전 두만강을 건너 연변 벽지의 마을에 봇짐을 풀었고 2세대의 아들은 시골을 벗어나 연길 시내에서 안착했으며 3세대의 손자는 연길을 떠나 관내의 큰 도시에서 근무하고 있고 4세대의 증손자는 또 저쪽 유럽의 대륙을 종횡하고 있다.

  정말이지 우리는 왜서 한 마을에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 다녀야 할까. 그렇다면 우리의 종국적인 귀소(歸巢)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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