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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붕 동지 생애

[인터넷료녕신문] | 발행시간: 2019.07.31일 13:22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이며 오랜 시련을 겪은 충성스러운 공산주의 전사이며 걸출한 무산계급 혁명가, 정치가이며 당과 국가의 탁월한 지도자이며 중국공산당 제12기 중앙정치국 위원, 중앙서기처 서기이며 제13기, 제14기, 제15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며 원 국무원 총리이며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인 리붕 동지는 병환으로 치료에 효험을 보지 못하고 2019년 7월 22일 23시 11분에 91세를 일기로 북경에서 서거했다.

리붕 동지의 원래 이름은 리원봉이고 사천 성도 사람이며 1928년 10월 20일 상해에서 태여났다. 그는 혁명가정 출신으로서 유년시기에 부친이 정의를 위하여 용감하게 희생되였고 소년시기에 가정의 영향을 받아 주동적으로 혁명사상을 접수하고 혁명사업에 투신할 뜻을 세웠다. 1939년 하반기부터 1940년 상반기까지 중경육재학교 사회과학조에서 학습했다. 1941년 3월에 연안으로 가 혁명사업에 참가하여 혁명리론과 과학문화지식 교육을 받았으며 선후하여 자연과학원 보습반, 연안중학, 자연과학원 본과반에서 학습했다. 1945년 11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연안시기에 그는 정풍운동, 대생산운동에 참가하여 로세대 무산계급혁명가들의 가르침을 받고 맑스주의세계관과 혁명의 승리를 위해 분투하는 인생관을 확립했다.

해방전쟁시기에 리붕 동지는 당조직의 호소에 호응하여 전선으로 달려갔다. 1946년 1월부터 9월까지 장가구공업전문학교에서 학습하였고 1946년 9월부터 진찰기 전업회사 기술원, 할빈유지공장 부책임자, 당지부 서기를 력임했다. 1948년 9월에 당조직의 배치에 따라 쏘련에 가서 류학했으며 모스크바동력학원 수력발전학부에서 학습하면서 쏘련류학중국학생총회 주석을 담임했다. 1955년에 귀국한 뒤 그는 주동적으로 기층에 내려가 사업할 것을 요구했으며 선후하여 풍만발전소 부공장장, 총공정사, 동북전업관리국 부총공정사, 지령국 국장, 부신발전소 공장장을 력임했다. 1966년부터 1979년까지 북경전력공급국 당위 대리서기, 혁명위원회 주임, 북경전업관리국 국장, 당조 서기를 력임했다. ‘문화대혁명’기간에 충격을 받았으나 그는 당성원칙을 견지하고 실사구시했으며 투쟁을 진행했다.

1979년 4월부터 리붕 동지는 전력공업부 부부장, 당조 성원 겸 화북전업관리국 당조 서기, 전력공업부 부장, 당조 서기, 수리전력부 부부장, 당조 부서기를 력임했다. 그는 안전생산을 잘하고 전력발전 전망계획을 편성하며 전력건설 템포를 다그치고 전력체제 개혁을 추진하며 기업자주권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외 선진기술을 학습하고 도입할 것을 주장하면서 여러차례 고찰단을 거느리고 외국 전력공업 상황을 고찰하여 국내 발전소 건설을 추동했다. 그는 창조적으로 당중앙의 ‘전력선행’ 전략을 관철하였는바 전력을 적당하게 앞서 발전시킬 것을 제기하고 전력발전의 기본방침을 명확히 하고 전력망운행 법칙을 총화하고 보다 높은 등급의 전력수송 전압을 채용하여 전국전력망과 련결할 것을 제창하였으며 여러 부문에서 전력을 취급하고 여러 경로를 통해 전력을 취급하는 것을 추동하고 삼협, 소랑저 등 대형 수력발전소와 진산, 대아만 등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참여하여 지도함으로써 우리 나라가 발전소건설과 전력생산, 전력망관리 등 면에서 거족적인 진보를 이룩하도록 추동했다. 리붕 동지는 장기적으로 전력계통에서 사업했는바 그는 우리 나라 전력공업의 걸출한 지도자이고 원자력발전 사업의 중요한 개척자이다.

1983년 6월, 리붕 동지는 국무원 부총리직을 맡고 에너지, 교통, 중점건설 프로젝트 등 사업을 분관했다. 1985년 9월, 중국공산당 12기 5차 전원회의에서 중앙정치국 위원, 중앙서기처 서기로 보선되였다. 그는 ‘7.5’계획 에너지, 교통 면의 발전방침 연구에 참여하고 쥰가르화력발전 개발과 신부동승탄전 건설을 추동하고 석탄 생산, 분배, 운수의 한개 장부를 강력히 추진하여 석탄자원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던 국면을 개변시켰다. 그는 교통운수 발전의 출로는 개혁에 있다고 강조하면서 종합적이고 통일적인 교통운수체계의 구축을 추동하고 항구의 하방, 민항관리체제의 개혁, 철도의 도거리책임제 등 중요임무를 틀어쥐였다. 그는 기본건설 규모를 통제하는 것을 견지하고 투자방향을 지도하고 기본건설체제 개혁을 추동하여 우리 나라 건축업에 대하여 중요한 영향을 일으켰다. 그는 중대한 기술장비의 연구제조 템포를 다그치고 중대한 장비의 국산화를 다그쳐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선진적인 전자정보기술로 전통산업을 무장하고 개조할 것을 제기했고 ‘자체 생산으로 수입을 대체하고’ 외국자본을 리용하여 철강산업을 운영하는 7가지 정책을 제기했으며 자동차공업은 련합발전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1987년 11월, 리붕 동지는 중국공산당 13기 1차 전원회의에서 중앙정치국 위원, 상무위원으로 당선되였으며 같은 달에 제6기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제23차 회의에서 국무원 대리총리로 임명되였다. 1988년 4월, 제7기 전국인대 1차 회의에서 국무원 총리로 임명되였다. 1988년부터 1990년까지 국가경제체제개혁위원회 주임을 겸임했다. 국제 국내 복잡한 형세에 직면하여 그는 정리정돈과 개혁심화 방침을 견결히 관철했다. 당중앙의 령도하에 국민경제 및 사회발전 10년 전망계획과 ‘8.5’전망계획의 제정을 주관하여 여러 면의 건설을 적극 추동하고 국민경제에 대하여 거시적 조정을 하는 새로운 수단과 새로운 방법을 탐색하여 정리정돈 임무를 비교적 훌륭하게 완수했으며 우리 나라 경제가 곤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발전시기에 들어서도록 추동하고 20세기 90년대 경제가 지속적이고 안정적이며 조화롭게 발전하는 데 조건을 마련했다.

1989년 춘하지교의 정치풍파 속에서 등소평 동지를 대표로 하는 로세대 무산계급 혁명가들의 견결한 지지하에 리붕 동지는 기치가 선명하게 중앙정치국 대다수 동지들과 함께 과단한 조치를 취하여 동란을 제지하고 반혁명폭란을 평정하여 국내 정세를 안정시켰으며 당과 국가의 전도, 운명과 관계되는 이 중대한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발휘하였다.

1989년 6월, 중국공산당 13기 4차 전원회의 후 강택민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중앙지도집단의 중요성원으로서 리붕 동지는 등소평리론과 ‘세가지 대표’ 중요사상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들고 당의 11기 3차 전원회의 이래의 로선, 방침, 정책을 깊이 관철하였으며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네가지 기본원칙을 견지하고 개혁개방을 견지하며 사상을 해방하고 실사구시하고 시대와 더불어 발전하면서 당과 국가 사업 발전을 위해 정력을 쏟아붓고 자신의 지혜와 심혈을 기여하였다.

1992년 10월, 리붕 동지는 중국공산당 14기 1차 전원회의에서 재차 중앙정치국 위원, 상무위원으로 당선되였다. 1993년 3월, 8기 전국인대 1차 회의에서 그는 재차 국무원 총리로 임명되였다. 등소평 동지가 남방담화를 발표한 후 그는 등소평 동지의 개혁개방 사상과 주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선전, 관철하였으며 중국공산당 제14차 전국대표대회 정신을 견결히 관철하여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개혁의 발걸음을 다그치고 대외개방을 확대했으며 거시적 조정통제를 강화, 개선하고 당중앙의 령도하에 국민경제 및 사회발전‘9.5’전망계획과 2010년 전망목표의 제정을 주관하여 일련의 국가 중대 프로젝트를 배치 및 건설하여 국민경제의 지속적이고 쾌속적이며 건전한 발전을 추동했다.

1997년 9월, 리붕 동지는 중국공산당 15기 1차 전원회의에서 또다시 중앙정치국 위원, 상무위원으로 당선되였다. 1998년 3월, 9기 전국인대 1차회의에서 그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으로 당선되였고 같은 달부터 제9기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당조 서기를 맡았다. 그는 확고부동하게 인민대표대회제도를 견지하고 보완하였으며 사회주의 민주법제 건설을 강화하고 의법치국과 사회주의 법치국가 건설 행정을 추진하며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사업의 순조로운 진행을 보장하고 촉진하는 면에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

중앙에 와 사업하게 된 후 리붕 동지는 중앙의 요구에 따라 국가교육위원회 주임, 국무원 환경보호위원회 주임, 중앙전문위원회 주임, 국가과학기술지도소조 조장 등을 겸임하고 과학기술, 교육, 환경보호와 국방공업 등 분야에 대량의 심혈을 기울였는바 과학교육에 의한 국가진흥전략과 지속가능한 발전 전략의 중요한 지도자이다. 그는 네가지 현대화를 실현하는 데서 관건은 과학기술이고 교육은 기초라고 강조했다. 그는 ‘과학기술은 제1생산력’이라는 사상을 견결히 관철하고 과학기술체제 개혁을 대대적으로 추진했으며 지식인정책을 참답게 시달하고 ‘국가 중장기 과학기술 발전 강령’의 반포와 실시를 추동했으며 ‘863’계획, ‘973’계획을 조직, 실시하고 특허제도와 기술시장을 구축, 보완했으며 중국공정원 설립과 남극 과학고찰사업 전개를 지지하고 광범한 과학기술사업자들의 적극성과 창조성을 남김없이 동원하여 기초연구, 첨단연구에서 일련의 중대한 과학기술 성과가 배출되고 국가의 총체적 과학기술 실력이 일층 증강되도록 추동하였다. 그는 교육사업에 대한 당과 정부의 령도를 강화할 것을 제기하고 교육 우선 발전 전략을 계속 관철하고 교육체제 개혁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의무교육법의 제정과 실시를 추동하고 직업기술교육과 성인교육을 개혁, 발전시키고 대학교 관리권한을 확대하고 대학교육 ‘211프로젝트’, ‘985프로젝트’의 실시를 추동하고 대학교 사상정치사업을 강화하고 파견류학생 사업을 개진함으로써 개혁개방의 여러 분야에 대량의 인재를 수송하였다. 그는 유인우주비행프로젝트의 중요한 결책자로서 프로젝트 전기의 조사연구와 기술, 경제의 실현 가능성 론증을 전개하는 것을 령도하여 유인우주비행프로젝트의 실시를 추동하였다. 그는 경제건설과 환경보호의 관계를 정확히 처리하는 데 중시를 돌려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환경관리를 강화하고 ‘중국 21세기 의정’ 출범을 추동하고 ‘3개 하천(해하, 회하, 료하), 3개 호수(태호, 전지, 소호), 2개 통제구역(이산화류황통제구, 산성비통제구), 1개 바다(발해), 1개 도시(북경시)’ 프로젝트 실시를 지도했으며 실천 속에서 환경보호 기본국책과 ‘세가지 동시화’, ‘세가지 통일’ 전략방침을 완벽화하여 중국특색의 환경보호의 길을 초보적으로 개척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리붕 동지는 장기적으로 중앙외사사업지도소조 조장을 담임하였는데 당중앙의 령도하에 대량의 사업을 하였다. 20세기 80년대말, 90년대초 서방국가의 련합 ‘제재’, 쏘련 해체, 동유럽 격변 국제정세에 직면하여 그는 독립자주의 평화외교정책을 견결히 관철, 집행하고 평화공존 5대 원칙의 기치를 높이 추켜들고 국가주권, 안전과 존엄을 확고부동하게 수호하였으며 원칙을 견지하고 압력을 이겨내면서 대량의 성과가 탁월한 량자, 다자 외교 활동을 조직하고 해당 활동에 참여했다. 그 기간 우리 나라는 대 중국 ‘제재’를 점차적으로 돌파하고 서방나라의 반중국 책동을 좌절시켰으며 세계 여러 나라, 지역과의 실무협력, 친선협력 관계가 부단히 공고, 발전하고 국제 지위와 영향력이 날따라 높아졌으며 전방위적 외교의 새 국면을 개척하여 개혁개방과 현대화 건설을 위해 량호한 외부환경을 형성하였다. 그는 중공중앙의 통일전선과 인민정협에 관한 방침, 정책을 견결히 관철하고 ‘한개 나라 두가지 제도’ 방침을 견결히 관철했으며 당중앙의 령도하에 향항, 오문 회귀 관련 제반 사업에 참여하고 지도를 했다.

리붕 동지는 장기적으로 국무원 삼협공사준비지도소조 조장, 삼협공사건설위원회 주임을 담임하였고 선후하여 삼협에 가 19차의 고찰을 진행했으며 공사의 과학적, 민주적 결책과 건설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각측의 력량을 조직해 공사와 관계되는 이민안치, 생태환경보호, 토사침적 등 중대한 문제에 대해 반복적으로 론증하여 당중앙의 결책을 위해 과학적 의거를 제공했다. 그는 삼협공사를 세계 일류 수준의 공사로 건설할 것을 제기하고 시장경제 법칙으로 공사건설을 조직해야 함을 명확히 했다. 그는 개발식 이민방침을 견결히 관철하고 중경 직할시 설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며 삼협저수지구역 이민이 이사를 하고 안정정착을 하고 점차 치부할 수 있도록 추동하였다.

리붕 동지는 우리 나라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중요한 개척자이고 충실한 실천자이며 적극적인 추동자이다. 그는 시종일관하게 중국 실정으로부터 출발하여 개혁, 발전, 안정의 관계를 정확히 처리하였고 계획경제체제로부터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에로의 전환을 안정적으로 추진하였으며 20세기말 우리 나라가 초보적으로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구축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재정세무체제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는 분세제를 핵심으로 하는 새로운 재정체제와 부가세를 주체로 하는 새로운 세금제도를 구축할 것을 제기하고 재정분배 관계를 일층 합리하게 조절하고 중앙의 거시적 조절통제 능력을 증강했다. 그는 금융체제 개혁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국무원 증권위원회, 중국증권감독관리위원회 설립을 추동하고 정책성 금융과 상업성 금융의 분리를 강력히 주장했으며 환률의 단일화를 순조롭게 실현하여 우리 나라 경제가 아시아금융위기의 시련을 이겨낼 수 있게 했다. 그는 가격을 일층 활성화시킬 것을 주장하고 가격체제 개혁을 심화시켰으며 자원배치에서 시장의 기초성 역할을 충분히 발휘시켰다. 그는 대외무역체제 개혁을 적극 추진하여 관세를 낮추고 대외개방 수준을 더한층 높였다. 그는 사회보장제도 개혁을 계속 심화시켰다. 실업보험과 산재보험을 건전히 하고 양로보험과 의료보험 사회화 정도를 높였으며 우리 나라 생산력수준에 부응하는 사회보장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추동했다. 그는 국유 대중형 기업의 활력을 증강함에 있어서 근본출로는 개혁을 심화하는 데 있다면서 기업이 법에 따라 자주경영하고 손익을 자부담하며 스스로 발전하고 스스로 단속하는 활력이 넘치는 경제실체로 성장하도록 인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농업, 농촌과 농민 문제를 아주 중요시했다. 농업을 강화하는 것을 경제사업의 첫자리에 놓을 것을 강조하면서 가정도급경영을 토대로 하고 집중경영과 분산경영을 결합시키는 이중경영체제를 지지하고 보완했으며 가정별 생산량 도급책임제를 헌법에 써넣을 데 대한 사업을 추동하고 량식류통체제 개혁과 농부산물 수매제도 개혁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국가 특별식량 비축제도와 ‘쌀독’ 성장책임제, ‘남새바구니’ 시장책임제를 구축하고 농업 기초시설 건설을 강화하고 농업 생산구조를 조절했으며 향(진)기업 발전을 지지하고 전통농업이 현대화 농업에로 전환하는 것을 유력하게 추동하였다. 그는 대외개방 정책을 견결히 관철하였다. 경제특구의 발전을 지지하고 상해 포동신구의 건설을 지지했으며 외향성 경제를 발전 시키는 것을 고무격려하고 산업정책을 제정해 외자투자 방향을 인도했으며 전방위, 다차원, 넓은 령역의 개방구도를 형성하는 것을 추동하였다.

리붕 동지는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민주법치 건설의 중요한 지도자이다. 1998년 12월, 그는 헌법개정소조 조장을 담임하고 헌법개정안 초안 연구와 작성을 주관하였다. 당중앙의 동의를 거쳐 헌법개정안은 9기 전국인대 2차 회의에서 채택되였고 국가의 근본대법 형식으로 등소평리론의 지도사상 지위를 확립하고 의법치국의 기본 방략, 사회주의 초급단계의 기본경제제도와 분배제도 및 비공유제경제의 중요한 역할 등 내용을 명확히 하였는바 우리 나라 경제, 사회 발전을 추진하고 당과 국가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길을 따라 전진하는 것을 추동하는 데 중대한 현실적 의의와 심원한 력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그는 립법사업에 깊은 중시를 돌렸다. 립법사업을 강화하고 립법 질을 제고시키는 것을 전국인대 상무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로 삼았으며 립법사업은 헌법을 의거로 하는 것을 견지하고 우리 나라 사회주의 초급단계의 기본국정으로부터 출발하며 국가 사업의 전반 국면에 복종하고 봉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의 주관하에 9기 전국인대 및 그 상무위원회는 임기내에 도합 124건의 법률, 법률해석과 법률문제 관련 결정초안을 심의하여 113건을 통과시켰는데 여기에는 립법법, 계약법, 농촌토지도급법, 증권법, 대학교육법 등 우리 나라 경제, 사회 발전에 대해 중대한 영향이 있는 일련의 법률이 포함되며 이는 헌법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법률체계의 초보적 형성을 추동하였다. 그는 인대감독사업에 깊은 중시를 돌려 감독강도를 높이고 감독방식을 완벽화하고 감독의 실제적 효과를 증강시켰다. 9기 전국인대 및 그 상무위원회는 임기내에 선후하여 22건의 법률과 법률문제 결정의 실시상황을 검사하고 국무원, 최고인민법원, 최고인민검찰원의 40개 전문사업보고를 청취하고 심의하였으며 헌법, 법률의 실시를 추동하였다. 그는 인대대표 사업을 강화하고 개진하는 데 깊은 중시를 돌렸다. 대표들이 직책을 더 잘 리행하도록 힘써 조건을 마련해주었고 대표의안을 참답게 처리하였으며 대표사업을 새로운 수준에로 제고시켰다. 그는 인대 및 그 상무위원회의 자체 건설을 강화할 것을 강조하면서 상무위원회 사업제도를 개진하고 상무위원회 사업기구와 사무기구 건설을 강화하고 립법과 법률 실시상황 조사연구를 깊이있게 전개하고 법제 선전교양, 인대 보도, 선전 사업과 래신래방 사업을 강화하고 지방인대와 련계하고 지방인대의 사업 전개를 지도하였다. 그는 전국인대와 외국 의회, 국제회의기구간의 래왕과 협력을 적극적으로 추동하여 중국과 관련 국가의 관계가 더욱 건전하고도 안정하게 발전하도록 추진하였다.

리붕 동지는 인민군중 특히는 빈곤군중에 대하여 깊은 정을 갖고 있었으며 늘 로혁명근거지, 빈곤지역에 심입하여 빈곤군중을 위문하였다.그는 빈곤해탈부축 사업에 깊은 중시를 돌리면서 빈곤지역을 도와 락후한 면모를 개변시키는 것은 당과 정부의 력사적 책임이라고 강조하였으며 개발식 빈곤해탈부축 방침을 견지하고 ‘국가 87 빈곤해탈 부축 난관공략 계획’을 적극적으로 조직, 실시하여 20세기말에 농촌 빈곤인구의 먹고 입는 문제를 기본적으로 해결하는 이 전략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많은 사업을 하였다. 그는 국유기업 정리실업종업원의 일상생활에 깊은 관심을 돌리고 백방으로 정리실업종업원들의 기본생활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였다.

2003년 3월, 리붕 동지는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위원장 직무를 더는 담임하지 않았다. 지도직위에서 물러난 후에도 그는 호금도 동지를 총서기로 하는 당중앙을 견결히 옹호, 지지하였고 습근평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중앙을 견결히 옹호, 지지하였으며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위대한 사업을 관심하고 당작풍, 렴정 건설과 부패척결 투쟁을 확고하게 지지하였다.

리붕 동지는 중공 제12기, 제13기, 제14기, 제15기 중앙위원이며 12기 5차 전원회의에서 중앙정치국 위원, 중앙서기처 서기로 보선되였으며 제13기, 제14기, 제15기 중앙정치국 위원, 상무위원이다.

리붕 동지는 70여년의 혁명생애에서 공산주의리상을 동요하지 않았고 당과 인민에 무한히 충성하였으며 중국 혁명과 건설, 개혁 사업을 위해 필생의 정력을 바쳤다. 그는 맑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 등소평리론, ‘세가지 대표’ 중요사상, 과학적 발전관, 습근평 새시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사상을 참답게 학습하고 시종일관하게 사상상, 정치상, 행동상에서 당중앙과 고도의 일치를 유지하였다. 18차 당대회 이후 그는 정치의식, 대국의식, 핵심의식, 일치의식을 확고히 수립하고 습근평 총서기의 당중앙의 핵심, 전당의 핵심적 지위를 확고히 수호하였으며 당중앙의 권위와 집중통일령도를 확고히 수호하였다. 그는 견강한 당성원칙을 갖고 있었으며 정치를 중요시하고 큰 국면을 돌보았으며 당과 인민의 리익을 첫자리에 놓고 확실하게 당에 충성하고 당을 위해 걱정을 분담하고 당을 위해 직책을 다하고 인민을 위해 복지를 마련하였으며 견결히 당의 정치로선에 위배되고 당의 정치로선을 외곡, 부정하며 당의 령도와 사회주의제도를 부정하는 언행과 단호히 투쟁하였다. 그는 모든 것은 실제로부터 출발하고 리론을 실제와 련계시키는 것을 견지하면서 맑스주의 립장, 관점, 방법을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문제를 분석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실천을 지도하고 사업을 추동하였다. 그는 민주집중제 원칙을 견지하고 당의 집단령도를 견지하였으며 군중과 밀접히 련계하고 부동한 의견에 귀를 기울였으며 여러 면의 적극성을 불러일으키고 발휘시켰다. 그는 광명정대하고 부지런하고 성실했으며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원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엄격히 단속하고 청렴결백하고 생활이 검소했으며 가족과 신변의 사업일군들에 대해 엄격히 요구하고 공산주의자의 정치적 본색을 시종 유지하여 전당과 전국 여러 민족 인민의 충심으로 되는 애대를 받았다.

리붕 동지의 일생은 혁명적인 일생이고 전투적인 일생이며 빛나는 일생이고 전심전력 인민을 위해 봉사하고 공산주의사업을 위해 분투한 일생이였다. 그의 서거는 당과 국가의 중대한 손실이다. 우리는 그의 혁명정신, 숭고한 품성과 우량한 작풍을 따라배워 습근평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중앙의 두리에 더욱 굳게 뭉쳐 초심을 잊지 않고 사명을 아로새기며 전면적인 초요사회의 결정적인 승리를 이룩하고 새시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위대한 승리를 전취하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 분투해야 한다.

리붕 동지는 영생불멸하리!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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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룡시 제14회 진달래문화관광축제 5일까지

화룡시 제14회 진달래문화관광축제 5일까지

5월의 첫날, 중화민족공동체의식을 확고히 수립하고 화룡의 ‘붉은 해 변강 비추네’ 문화관광 브랜드를 부각시키며 흥업부민으로 변강의 고품질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화룡시제14회 진달래문화관광축제가 서성진 진달래촌에서 개막되였다. 2006년 제1회 진달래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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