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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량안에 활짝 핀 진달래, 할빈 조선족의 백년 력사를 말하다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9.09.12일 10:18



  (흑룡강신문=하얼빈) 동북아의 방방곡곡에 벼를 심고 흑토지의 깊은 곳에 김치독을 저장해두는 민족, 그야말로 부지런한 민족이다.

  렬강들의 백년간 침략에도 굴복하지 않고 더욱이 수많은 영웅의사들을 배출한 민족, 그야말로 완강한 민족이다.

  근대 력사상 방랑생활에 온갖 차별과 모욕을 당한 민족, 그야말로 다재다난한 민족이다.

  이들은 동북인 나아가 중국인의 동포형제민족으로, 그들과 우리는 운명을 같이 하고 있다. 이들이 바로 56개 민족중의 하나인 조선족이다. 오늘은 할빈 조선족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흑룡강성의 조선족은 주로 동부지역에 분포되여 있다. 목단강, 계서 일대에 많이 집중되여 있으며 서쪽으로 갈수록 조선족인구가 줄어든다. 현재 할빈시구역 및 린근 지역을 볼 때 조선족은 향방, 도리, 아성, 호란 4개 구에서 주로 살고 있다.



  개혁개방 초기, 할빈에 유명한 조선족기업이 있었다. 바로 할빈금속창틀공장(직원이 거의 조선족임)이다. 전신이 기계리벳용접공장인 이 공장은 한때 도산위기에 처하기도 했었다. 그때 사장 양흥식(조선족)이 직원을 이끌고 기술혁신에 총력을 기울이는 한편 시장개척에 뛰여든 덕분에 할빈 첫 금속창틀 생산라인을 구축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공장의 도산을 막은 것은 물론, 적자를 흑자로 돌리고 룡강 창문업계의 간판산업으로 발전해 할빈상공업계의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족하면 다수 할빈인들은 가장 먼저 조선판점과 한국로무를 떠올릴 것이다.



  양흥식

  조선족은 강한 중화민족 동질감을 갖고 있다. 저자도 조선족 친구가 꽤 많은 편이다. 지난 90년대 한국 경제가 빠르게 발전하고 있을 때 언어상의 우세로 한국 로무에 나선 조선족들이 아주 많았다. 이들은 중국에 있을 때보다 돈을 많이 벌긴 했지만 이국타향에서 로무자들만의 슬픔과 아픔도 감내해야만 했다. 그때 한국에서 할빈으로 오는 조선족친구를 마중하러 공항으로 간 적 있었다. 그 친구가 비행기에서 내려 하는 첫마디가 "그래도 집에 오니 좋다! 우리나라가 좋다! 너희들이 가장 친절하다!"였다. 그후로 그는 다시 도리구에서 조선판점을 개업했는데 장사가 아주 잘 되였다.



  할빈인은 조선족 음식을 좋아한다. 새콤하고 맵고 달고, 담백한 맛이 특징인 조선족음식은 동북인들의 입맛에도 잘 맞는다. 겨울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된장국, 여름에는 시원한 랭면...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지 않는가. 옛 할빈에는 유명한 조선판점이 많았다. 례하면 남강구의 호영과 군래락, 동력구의 천리마와 로아신, 도리구의 한양과 고려원, 향방구의 동문가와 쾌락원, 태평구의 로홍남, 고향의 조선마을 등등이다. 그러나 이런 옛 조선족판점들이 이제는 없어졌다. 현대인들의 입맛이 변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한식을 더 선호한 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음주를 좋아하는 조선족은 술을 마시고 난 후 꼭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그들과 얘기를 나눠보지 않는다면 조선족인지 동북인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조선족이 바로 동북인이다. 언젠가 상해에서 길림성의 조선족 친구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동북 어투로 자신도 동북에서 왔기에 우린 서로 고향친구라며 저자를 살갑게 대했다. 그는 상해에 맛있게 하는 조선판점이 없다고 말했다. 길거리에 한식료리가게가 널려 있지 않냐고 물었더니 동북의 찰떡, 명태, 건두부채무침을 먹고 싶다고 했다. 그래도 고향의 맛이 가장 입맛에 맞아서일지 않을가 생각된다.




  할빈의 조선족은 교육을 아주 중요시한다. 여기서 도리구 경위 4도가에 위치해 있는 할빈조선족중심소학교를 얘기하려고 한다. 이 학교의 력사는 1909년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 할빈의 첫 조선족소학교로서 처음에는 동흥학교(현재의 홍만가에 위치함)라 불렀다. 훗날 '영실학교', '보통학교', '금강소학교'로 개칭하기도 했다. 전쟁의 포화가 지속되던 위만시기 일본의 거듭되는 박해속에서도 여전히 수업을 견지했다고 한다. 해방후의 1956년 조선족중심학교에서 분리되여 나온 초중부는 조선족이 집중되여 있는 향방구 공빈로 일대로 옮겨 할빈시조선족제1중학교를 설립했다. 할빈의 조선족들이 교육을 중요시하는 우수한 전통은 가장 먼저 할빈으로 들어온 조선인들의 구성 특징과 밀접한 련관이 있다고 본다.







  일찍 할빈으로 온 조선인들을 보면 그중 일부는 조선반도가 아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할빈으로 건너온 사람들이였다. 이들 조선인은 중일 '마관조약'이후 고향을 떠나 러시아에서 여러가지 직종에 종사하면서 차츰 중산계급으로 되였다. 중동철도가 건설된 후 할빈 경제가 빠르게 발전함에 따라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러 살던 조선인들이 현지 중국인들과 함께 할빈으로 건너와 사업을 발전시켰는데 이를 '위자방(崴子帮)'이라 불렀다. '위자방'의 조선인은 할빈 도리구의 서8도가(당시에는 고려거리라 부름)일대에 집중되였는데 당시 268명 정도로 통계되였다.




  비교적 부유한 조선인의 다수는 상인, 로동자, 직원들이였다. 그들은 할빈에서 약방, 도박장, 담배공장과 술공장을 차리거나 번역 및 교육사업에 종사했다. 이들 다수는 조선어, 한어,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그들의 자녀 또한 비교적 높은 문화자질을 가진 신세대 할빈인이였다. 이들외에 상당 규모의 가난한 조선인들도 중도철도의 건설이 추진됨에 따라 할빈으로 건너왔다.

  해방전 가난한 조선인의 다수는 목단강, 길림 등 지역에서 할빈으로 이주해온 것이다. 이들중 다수는 오늘의 향방구 성고자(成高子)와 도리구 고향(顾乡)일대에 집중되여 있다. 이들중 일부는 중동철도를 건설하는 로동력으로, 조선반도에서 이곳으로 건너왔고 나머지 일부는 조선의 3.1운동 이후 어쩔수 없이 조선을 떠나 온 가난한 농민들이였다. 여기서 고향(顾乡)의 조선마을(오늘의 군력신구 려강로 이서)을 얘기하려고 한다. 1923년, 정씨와 류씨 성을 가진 두 조선인이 목단강일대에서 이곳[당시에는 하전자(下甸子)라 불렀음]으로 왔다. 그들은 현지인으로부터 토지를 임대받아 벼를 심었다. 일손이 부족한 탓에 그들은 더 많은 조선인 동향을 불러왔다고 한다. 하전자는 하가구(何家沟), 송화강과 가까워 물자원이 풍부했다. 그래서 그들은 댐을 세우고 물을 비축해 벼를 재배했는데 이를 고려댐(高丽坝)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의용군이 고향(顾乡)에서



  고향(顾乡) 수전농장의 조선인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하전자, 반랍성자(半拉城子) 일대의 조선인이 갈수록 많아지기 시작했다. 좋은 세월은 1932년 할빈이 함락되고 일본인들이 이곳을 점령하기 전까지 줄곧 지속되였다. 정씨 조선인은 그들의 '앞잡이' 행세를 하면서 일본인들이 그들에게 나누어 준 몽둥이(일본인은 조선인들이 배반할가 두려워 감히 총을 나눠주지 못함)를 들고 같은 민족의 조선동포와 중국동포를 억압했다. 그야말로 혐오스럽고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아닐 수 없다. 민족과 국가에 대한 배신은 인성을 배신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이들 조선 '앞잡이' 와 중국 한간들에게는 좋은 결과가 있을지 만무하다. 해방후 인민정부에서 그들의 인간 권리를 박탈했다. 한간이나 앞잡이들은 필경 극소수이다. 할빈 조선족들의 반일활동은 비교적 일찍 전개되였고 상당한 성과도 거두었다는 점은 꼭 알아두어야 한다.

  위만시기의 할빈은 암흑속에서 허덕였다. 조선인과 중국인 모두 일본 침략자를 극도로 증오했다. 1894년부터 조선반도가 일본 식민지로 전락되였기 때문에 조선의 반일인사들이 일찍부터 중국 동북지역에서 활약했었다. 따라서 할빈의 반일투쟁에서 조선족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례하면, 김동삼, 남자현, 한락연 등이다. 당연히 할빈 기차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저명한 반일의사 안중근도 포함된다. 9.18사변 이후 동북 경내의 조선 의용군은 더욱이 동북항일련군과 함께 투쟁에 뛰여들었다. 애국사상을 지닌 조선인은 항일투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안중근의사



  안중근의사 유언장



  할빈 안중근의사 기념관



  어디 그뿐이랴! 1946년의 할빈 해방에도 조선의용군의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조선의용군 3지대 (약 3천 여 명)는 중공 할빈 당위의 지시를 받고 할빈 해방 전투에 참가했을 뿐만 아니라 갓 해방된 후의 할빈 보위임무를 맡았다. 송화강을 건너 강북 선박공장의 토비를 모조리 없애고 '마가구(马家沟)공항'국민당 특무를 체포하는 한편, '황창회(黄枪会)'반혁명기구를 진압하고 아성 사리(舍利)향 토지개혁 가운데서 반동세력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할빈인들은 그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주덕해



  조선의용군 제3지대



  조선의용군 3지대 21렬사묘

  해방후 할빈의 조선인 약 2만명 정도가 조선반도로 돌아간 가운데 약 3천명 정도는 계속 이 도시에 남았다. 필경 이들중 다수는 할빈에서 태여났고 이 땅을 사랑하고 이 도시에 미련이 남았기 때문이다.



  이 도시에 남은 사람들은 건국 후 조선족으로 되여 중화인민공화국 신분을 가졌다. 이렇게 그들은 56개 민족 대가정의 일원으로 되여 이곳에서 생활하게 된 것이다. 1964년의 인구통계에 따르면 할빈의 조선족 인구가 1만 8천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민국시기의 위자방과 조선 난민 수천명에서 위민시기의 2만명에 이르고 또 할빈에 남은 3천명에서 현재 약 10만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조선족은 이미 이 도시의 일원으로 되였다. 이 도시로 온 첫 조선인이 누군지 알고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자가 어렵게 알아봤는데 이 사람이 바로 할빈에 거주한 첫 조선인이라고 한다.



  할빈의 조선족잡지 '송화강'




  1898년 3월, 할빈이 아직은 도시로 형성되지 못했을 때 제정 러시아 중동철도 선견부대가 할빈으로 지형을 답사하러 왔다. 그때 부대를 따라 할빈으로 온 변역관이 바로 이 '조선인'이다. 그의 이름은 초프로브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조선이름에 관한 문자기록이 없어 다만 그가 러시아어, 중국어, 조선어 3개국 언어를 통탈한 조선인이라는 것만 알고 있다. 그는 현재의 향방구 연복가 일대의 중동철도 기숙사에 거주했었다고 한다. 훗날 그가 계속 할빈에서 살았는지, 조선으로 돌아갔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할빈의 조선인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여태까지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앞으로 남방친구들이 할빈으로 놀러와 조선족에 대해 물으면 김치나 랭면만 얘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뉴미디어센터 편역, 출처:年轮上的哈尔滨(作者沙曼赫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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