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자 앱 | | 모바일버전
뉴스 > 사회 > 사회일반
  • 작게
  • 원본
  • 크게

어버이날에 올리는 편지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20.06.22일 10:08



  (흑룡강신문=하얼빈) 아부지 엄마, 안녕하세요? 전 셋째 아들 꼬매예요. 우리 집에서는 나를 그저 꼬매, 꼬매 했었거든요. 옳죠? 그랬었죠?

  엄마를 여읜지는 57년, 아부지를 여인지는 55년 되는군요. 그러니까 꼬매도 이젠 머리 흰 할배로 둔갑했지요. 우습죠? 허나 이건 속일수 없는 진실이라구요. 물같은 세월은 정말 어쩔수 없이 잘도 흐르는군요. "인간 칠십 고래희"라는말 아시죠? 이 말은 아부지 엄마가 생존했을 때의 말인데 지금은 이 말을 뜯어 고쳐야 할것 같아요. 왜 그런가 하면 말이죠. 지금은 백세 시대로 들어섰으니까요. 그러니까 아부지 엄마는 억울하게도 너무 일찌기 세상을 떠난 셈이죠. 인간 70은커녕 50대도 아닌 40대에 세상을 하직하셨으니깐요. 난 래일 모레면 "인간 칠십 고래희에 들어설거라구요. 어때요, 세월이란 확실히 잡아둘수 없는거란 말 그른데 없죠? 셋째 아들 꼬매는 가끔씩 아부지 엄마랑 같이 살던 재빛 과거로 달려가군 하지요.

  겨울철 저녁이면 우리 형제들과 형제의 친구들이 우리 집에 모여 옥수수를 까며 엄마가 들려주는 엄마의 항일구국 이야기를 구수하게 듣던 일이 생생하지요. 엄마는 키가 크고 누르무레한 말이빨에 귀걸이를 걸고 솜을 놓고 누빈 다부산즈를 입었고 늘 잎담배를 말아 피우셨죠. 이야기 할라치면 해설원 못지 않게 구수하게 잘도 엮었어요. 항일전쟁 때 양정우 부대에서 지하 련락원으로 있으면서 숱한 모험과 고생을 격으셨더군요. 일본군에게 쫓기던 일 단포 차고 지주나 잘사는 집에 혼자 들어가 먹을것과 잠자리를 마련하던 이야기는 련 며칠을 들어도 끝나지 않고 련속극처럼 애들의 취미를 불러일으켰어요. 아부지는 동북 해방전쟁에 참가했었다고 알고있고 수박밭에서 국민당군대에 포위당했댔다는것, 총탄이 쉭쉭 지나가는 판에도 수박 먹는 친구도 있더라는 이야기를 들은적 있어요. 아부지의 동북해방기념메달이 궤안에 있었댔는데 어떻게 된 감투끈인지 누구도 모르게 자취를 감추고 말았어요. 아부진 해방후 학강시 동산탄광에서 회계원을 하다가 라북에 산짐승이 많다는 소리를 듣고 회계일을 버리고 라북에 와서 사냥군으로 되였지요. 그러니까 일년 치고 집에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고 거의 산속에서 살다싶이 하였지요. 아부지가 입산할 땐 엄마가 숱한 밀가루 음식을 만들지요. 주로 밀가루를 이겨 기름떡(油饼)을 만드는데 보름내지 이십일간씩 먹을 량을 장만하군 했죠. 아부지가 산에 떠난 후면 엄마는 식구들이 잠든 밤중에 물 한사발을 웃방의 궤우에 놓고 두손 모아 아부지가 무사하기를 신령님께 비는 장면을 내가 몇번 본적이 있어요. 어린 나이지만 나는 아부지를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을 충분히 읽을수 있었죠. 이런 사실을 나는 형제들께도 말하지 않았지요. 간혹 엄마의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올 때가 있었죠. 한번은 내가 이런 얘기를 들은적 있었어요. "성님, 얼마 좋겠슈." 엄마 친구들은 엄마를 "성님"이라구 부르더군요. "아들 셋이니까 큰애는 마차몰이 하고 둘째는 자동차 몰고 셋째는 지식분자 되고......" 이런 부러움 섞인 말이 나올 땐 엄마는 마치 그 말의 내용이 현실화나 되기라도 한것처렴 만족의 웃음을 활짝 지으시던 모습이 생생해요. 엄마 친구의 그 말이 엄마의 속심을 잘 맞추었죠? 엄마, 엄만 성격이 모질고 사나운데가 있어요. 큰누나가 소학교 3학년까지 다니다가 중퇴하여 가무를 도왔는데 주로 저녁 찬거리 장만이 누나의 임무였죠. 콩을 불렸다가 절구에 찧어 시래기를 넣고 죽을 끓여내는데 경험이 없다보니 어떨땐 너무너무 멀건 죽을 만들지요. 그러면 엄마는 "말오줌같은거 어떻게 먹냐" 하며 큰소리로 누나를 욕하죠. 한번 욕하고 그만 두거나 아니면 조곤조곤 좋은말로 타이르면 될텐데 엄마는 한바탕 란리 번져야 그만두죠. 큰형님과 둘째 형님도 엄마한테 혼난적이 많았죠. 두 형님은 거의 날마다 학교에서 이런 죄 저런 죄를 짓고 집에 오는 일은 밥먹듯 했죠. 매양 형님들이 죄를 짓고 집에 들어오면 엄마는 벌써 회초리를 들고 사나운 눈길로 방에 올라오지요. 큰형님이라면 구석에 쪼크리고 앉아 "옴마, 다시는 안 그럴게요."하고 싺싹 빌지요. 그래도 엄만 사정없이 후려치지요. 그러나 둘째 형은 다른 타입이지요. 엄마가 회초리를 준비하는 틈을 타 후닥닥 밖으로 뺑소니치지요. 그렇지만 죄는 더 커지지요. 사건의 엄중성을 감지한 둘째는 저녁밥도 먹지 않고 밤에도 집에 들어오지 않지요. 그러면 누나와 큰형이 나가 둘째형을 찾아 늦은 밤에 집으로 들어오지요. 그땐 엄마도 모른척 묵과하지요. 옳죠? 나는 형님들보다 다른 타입이였죠. 온순하고 말썽 안일으키고 공부에만 열중했죠. 가장회의때면 나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죠. 그래서 엄마의 회초리맛은 한번도 보지 못했죠. 그것이 지금에 와서는 되려 하나의 유감으로 남아있어요. 엄만 성격이 활달하여 노래도 잘 불렀어요. 그때 엄마가 늘 부르던 노래 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죠. "민중의 기 붉은기는 전사의 시체를 싼다. 시체가 식어서 굳기 전에 혈조는 기발에 물들인다. 높이 들어라. 붉은 기발을 그 밑에서 굳게 맹세해 비겁한 자야. 가려면 가라 우리들은 이 기발을 지키리라." 엄마는 이 노래를 거의 매일 저녁 불렀어요. 당시 어린 나임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의 비장함이 그렇듯 잘 안겨오더군요. 그때의 세월엔 식량난을 해결하는것이 엄마의 주업이였죠. 가을부터 겨우내 어디 가서 주어오는지 새벽에 나가 밤에 들어오는 엄마의 등짐에는 언제나 옥수수나 콩 사탕무우 같은것들이 들어있었어요. 그래서 우리 집 식구는 크게 굶지 않고 살수 있었어요. 엄마는 또 밀가루호박밥, 밀밥, 콩죽 수제비 등 여러가지 음식을 만들어 내놓았지요. 엄마, 한번은 국영농장에서 일군을 삯내여 옥수수를 깠는데 엄마는 몸빼 안에다 옥수수알을 훔쳐왔던 일이 생각나요? 엄마도 웃고 온 식구들이 웃은 일 기억나요? 그리고 어느 새벽에 나무꼬챙이를 총처럼 메고 보초군으로 가장하여 이삭군들을 향해 "짠주!" 하고 소리쳐 이삭군들이 보초군인줄로 여기고 이삭을 팽개치고 도망가도록 한후 엄마는 이삭군들이 버린 이삭을 지고 일찌감치 집으로 온적도 있었죠? 어디서 그런 담량이 생겼댔나요? 엄마, 63년도 설 전날 저녁 일을 기억하시나요? 그날 누나, 큰형, 둘째형은 5리 떨어진 국영농장 퇀부에 영화보러 갔어요. 나도 가고싶더라구요. 엄만 나보고 "꼬매, 넌 가지마." 하더군요. 그래서 집엔 나 젖먹이 녀동생과 엄마 셋이 남았지요. 저녁을 치른후 엄마는 젖먹이 동생을 재워놓고 탁상시계 태엽을 주었어요. 그리고 밖에 무져두었던 옥수수이삭을 키에 담아 들여와 구들에 널더군요. 나는 등잔불곁에서 개학하면 쓰려고 사온 련습장들에 나의 이름을 정성들여 써넣고있었지요. 헌데 엄마가 들어올 때가 되였겠는데 엄만 들어오지 않았어요. 이상하기도 하고 무서운 생각도 들어 밖을 향해 "엄마"하고 소리쳐 불렀어요. 그때 밖에서 "끙" 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밖으로 달려나가 보니 엄마는 컴컴한 마당에 앉은 자세로 옥수수 무지에 엎뎌있었어요. 난 그 길로 앞집에 달려가서 이 일을 알렸어요. 사람들이 달려와 엄마를 구들에 눕혀놓았을 때 엄마는 마지막 날숨을 내쉬더군요. 사람들은 엄마의 가슴에 딴딴한 덩어리가 올라와 막혔다고 하더군요. 난 눈앞이 킴캄해나면서 기가 막히더군요. 엄마의 시체를 웃방에 모셔놓고 우리 식구는 비통과 슬픔의 이틀을 보냈어요. 장례 치르는 날 엄마를 관속에 눕혔을 때 엄마의 모습은 그토록 평온하였는데 돌이킬수 없는 완전무결한 삶의 종말을 고하고 있었어요. 상여가 나갈 때 눈가루가 겨울 바람에 쓸리면서 내려앉았다가 다시 날아오르면서 흘러가는 눈의 대오를 따라갔어요. 앞산 공동묘지로 통한 길은 눈에 뒤덮여 잘 알리지 않았어요. 이렇게 추운 겨울 땅에다 엄마를 모신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어요. 하늘은 쏟아내지 못한 눈을 품고 무겁게 내리드리워 있었어요. 젖먹이를 두고 떠나는 엄마의 마음 어떠했나요? 무겁게 드리운 하늘보다 더 무거웠었죠? 엄마가 없으니까 우리 가문은 급작스레 붕괴의 길로 들어섰지요. 누나는 시집갔고 큰형님이 열다섯살에 생산대 일을 해야 했고 둘째형이 열세살에 가무를 돌보았어요. 엄마가 돌아간 이듬해니까 64년도 봄이였죠. 아부지가 갑자기 중풍을 맞고 쓰러졌어요. 할수 없이 나도 열한살에 중퇴하여 잔심부름을 하였어요. 그 때가 우리 가정이 가장 어려운 저조기에 처했을 때였어요. 반년동안 입원했던 아부지가 퇴원했는데 식량난으로 말이 아니였어요. 한번은 한족집에 물길으러 갔다가 돼지죽가마에서 감자 두알을 훔쳐 아부지와 녀동생 나 셋이서 껍질채로 맛나게 먹은적이 있었어요. 감자 두알을 먹고나니 왜 두알밖에 훔치지 았았나하는 후회가 나더라구요. 그번의 감자 도둑질이 아부지에 대한 최후의 효성으로 될줄은 몰랐어요. 그 때로부터 아버지의 상황은 갈수록 좋지 않았고 멸망의 위기에서 허덕이면서 위태로움을 보이시더라구요. "꼬매야, 내가 죽으면 내 오른쪽 눈을 내리 쓸어 눈이 감기게 해다구." 아부지는 이 부탁을 여러번 하더라구요. 아마 눈을 펀히 뜨고 저 세상에 가는걸 매우 꺼리는것 같았어요. 오른쪽 눈은 마비되여 손으로 늘 내리누르고 있어야 했거든요. 65년도 3월달이예요. 밖에 나갔다 들어오니 아부지는 숨을 거두고 있었어요. 날숨만 쉬고 들숨은 없었어요. 둘째 형님을 불러 옷을 입혔어요. 이렇게 아부지도 내가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두었어요. 아부지의 부탁대로 오른쪽 눈을 내리 쓸었어요. 아버지 눈은 잘 감겨지지 않았어요. 아마 가슴속에 이 세상을 향해 아직 쏟아내지 못한 말이 가득한듯 했어요. 그때 엄마의 평온하던 모습과 아부지의 모습이 포개지면서 나의 생애 한복판에 완강히 자리잡았어요. 어쩌면 아부지와 엄마는 동일한 이미지의 맥락으로 이어지면서 내 맘속에 다가와 이어지는것이였지요. 아마 두분 다 내 부모라는 리유때문이였을가요? 이렇게 아부지 엄마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꼬물도 향수하지 못하고 이삭주이와 산속에서 헤메는 생활로 나날을 보내시다가 자식들이 커가는 모습을 얼마간이라도 보지 못하고 부랴부랴 저승길로 향하셨어요. 너무나도 아쉬운 생의 한쪼각만을 맛보셨단말이예요. 그것도 고통쪽으로 말이예요.

  아부지, 엄마,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아부지 엄마랑 살던 세월과는 판판 달라요. 이삭주이하는 사람은 찾아볼수가 없어요. 모든 일은 다 자동으로 해내는데 단추만 누르면 모든 일이 척척 이루어지거든요. 그리고 아부지 엄마의 후손들은 열명이 훨씬 넘는데 그중에는 간부도 있고 대학생도 있어요. 한마디로 아부지 엄마의 후손들은 훌륭한 인재들이랍니다. 난 가끔 아부지 엄마가 머리속에 떠올라요. 내가 아부지 엄마 생각을 끄집어낸것이 아니라 아부지 엄마가 내 맘속으로 쳐들어오군하지요. 그럴 때마다 이런 멋진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존재의 가치를 음미할수 있고 행복을 향수할수 있도록 이 내 생명을 낳아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솟구쳐남을 어쩔수가 없어요. 가령 아부지 엄마가 나를 낳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무존재지요. 무존재란 아무것도 보이지도 감지할수도 없는 무가치의 지속이 아닐가요? 반대로 나를 낳아 길렀기에 나의 세상이 존재할수 있었고 나의 세상에서 자유로이 숨쉬며 삶의 가치를 과시할수 있었던거지요.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아부지 엄마는 후손들에게서 가장 뜨겁고 열렬한 축복을 받아야 마땅하지요. 아름다운 이 세상에 보귀한 생명을 남겨놓았다는 한가지 리유만으로도 열광적인 축복을 받고도 남는것이지요. 아부지 엄마, 이제라도 이 꼬매가 드리는 뒤늦은 축복이나마 받아보세요. "아부지 엄마, 부디 편안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아부지 엄마, 이젠 이삭주이 할념도 산속 생활할념도 마시고 편히 주무셔요. 후손들은 더는 배곯는 일이 없을 터이고 행복이 샘솟듯하니까 아무 걱정 마세요. 아부지 엄마, 고이고이 잠드세요.

  셋째 아들 꼬매가 어버이 날에 삼가 올림.

/마성산

뉴스조회 이용자 (연령)비율 표시 값 회원 정보를 정확하게 입력해 주시면 통계에 도움이 됩니다.

남성 100%
10대 0%
20대 0%
30대 0%
40대 100%
50대 0%
60대 0%
70대 0%
여성 0%
10대 0%
20대 0%
30대 0%
40대 0%
50대 0%
60대 0%
70대 0%

네티즌 의견

첫 의견을 남겨주세요. 0 / 300 자

- 관련 태그 기사

관심 많은 뉴스

관심 필요 뉴스

4월 13일은 제9회 동계아시안게임 카운트다운 300일이다. 이날 오후, 할빈으로 와 관련 경축행사에 참가한 아시아올림픽리사회 부주석 곽진정은 "할빈이 최고의 동계아시안게임을 개최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곽진정이 단체 인터뷰를 받고 있다. "할빈에 올
1/3
모이자114

추천 많은 뉴스

댓글 많은 뉴스

1/3
"내가 때리지 않았다" 김히어라, 학폭 당사자와 만나 '기억 정리' 완료

"내가 때리지 않았다" 김히어라, 학폭 당사자와 만나 '기억 정리' 완료

사진=나남뉴스 배우 김히어라가 학교폭력 당사자들과 만나 가해 의혹 기억 정리를 마무리했다고 밝혔다. 김히어라 소속사 그램엔터테인먼트는 "김히어라가 지난해 불거진 일련의 사안에 대해 당사자들과 만났다. 오랜 기억을 정리하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BTS 이어 걸그룹 최초" 피프티피프티, 또 '음원 신기록' 2기 근황은?

"BTS 이어 걸그룹 최초" 피프티피프티, 또 '음원 신기록' 2기 근황은?

사진=나남뉴스 피프티 피프티의 대표곡 '큐피드' 트윈 버전이 글로벌 음원 플랫폼 '샤잠'에서 K팝 걸그룹 최초로 500만을 달성했다. 이는 K팝 여성 아티스트 가운데 최고이자 최초로 달성한 기록으로, 전체 K팝 그룹 중 500만을 달성한 아티스트는 유일하게 '방탄소년

안도현병원, 인성화 봉사로 시각장애인 진료의 길 밝혀

안도현병원, 인성화 봉사로 시각장애인 진료의 길 밝혀

최근, 안도현인민병원 의료진은 래원한 한 시각장애인 환자의 “눈”이 되여 전 과정을 동행하면서 인성화 봉사를 제공하여 환자의 진료과정을 가볍고도 즐겁게 따뜻이 해주어 특수환자와 사회의 찬양을 받고 있다. 현인민병원 중의과 양옥위의사는 이 환자가 본인과 같은

모이자 소개|모이자 모바일|운영원칙|개인정보 보호정책|모이자 연혁|광고안내|제휴안내|제휴사 소개
기사송고: news@moyiza.kr
Copyright © Moyiza.kr 2000~2024 All Rights Reserved.
모이자 모바일
광고 차단 기능 끄기
광고 차단 기능을 사용하면 모이자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모이자를 정상적으로 이용하려면 광고 차단 기능을 꺼 두세요.
광고 차단 해지방법을 참조하시거나 서비스 센터에 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