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스포츠 김효경]
OB(현 두산)의 1982년 우승 멤버들이 지난해 4월2일 LG와의 잠실 개막전을 앞두고 한자리에 모여 두산 후배들을 응원하고 있다. 왼쪽부터 82년 한국시리즈 MVP 김유동, 정규시즌 MVP 박철순, 감독 김영덕, 코치 이광환, 윤동균, 주장 김우열. IS 포토
"머리를 들이미는 심정으로 뛴다면 뭔가 해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프로야구 원년 OB(현 두산) 우승의 주역 박철순(56)이 포스트시즌에 나서는 두산 후배들에게 정신력을 강조했다. 상황이 어렵지만 죽을 각오로 뛰면 못 할 것은 없다고 했다.
8일부터 롯데와 준플레이오프(5전3선승제)를 치르는 두산은 걱정이 태산이다. 유격수 손시헌과 외야수 정수빈이 각각 손가락과 얼굴 골절상으로 수술을 받아야 해 포스트시즌 출전이 어렵다. 여기에 이종욱도 왼 발목을 다쳤다. 중심 타자 김동주와 2루수 고영민의 복귀 역시 오리무중이어서 공격과 수비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급기야 김진욱 감독은 "군 전역자(민병헌)를 포함시켜야 할 것 같다"며 부랴부랴 전력을 짜맞췄다. 이 대신 잇몸으로 롯데와 붙어야 할 판이다.
두산의 위기에 대해 박철순은 투지로 이겨낼 수 있고 이겨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그가 우승을 이끈 1982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얘기를 들려줬다. 정규시즌에서 24승을 거둔 박철순은 정규시즌 막판인 9월29일 삼성전에서 번트 수비를 하다 허리를 삐끗해 한국시리즈 1차전과 2차전에 등판하지 못했다. 그는 "던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걸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 김영덕 감독님은 아예 상태를 물어보지도 않았다"고 떠올렸다. 에이스가 빠진 OB는 1무1패로 밀렸다. 박철순의 부상이 심각하다는 걸 알아챈 삼성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박철순은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다. 김영덕 감독의 반대에도 3차전에 구원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5-3 승리를 이끌었다. 4차전에서도 구원 등판해 경기를 매조졌다. 박철순의 2경기 연속 세이브로 전세는 OB쪽으로 기울었다. 박철순은 "약을 먹긴 했지만 주사를 맞지는 않았다. 도저히 그냥 누워있을 수 없었다. 우격다짐으로 등판했다"면서 "내가 죽을 각오로 나선다는 걸 선수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수들이 힘을 냈다"고 말했다.
OB는 5차전도 5-4로 이겨 3승1무1패로 앞서나갔다. 박철순은 6차전 선발로 나서 3실점 완투를 했고, 김유동의 만루포가 터져 OB는 원년 챔피언에 올랐다. 박철순은 "신기하게 아프진 않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던져서였나 보다. 그런데 힘을 못 쓰니까 페넌트레이스 때와는 구위가 전혀 달랐다. 그래도 '이기기만 한다면 죽어도 좋다, 병신이 되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던졌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박철순은 허리 부상으로 은퇴할 때까지 고생해야 했다. 1982년 우승은 그가 야구 인생을 걸고 얻어낸 훈장과 다름없었다.
잠실구장 내 두산 클럽하우스의 한 쪽 벽에는 우승 기념 현판이 세 개 걸려 있다. 82년과 95년, 그리고 2001년 우승의 감격이 새겨져 있다. 맨 오른쪽 현판이 자리한 지도 어언 11년이 지났다. 박철순은 "느낌이 좋다. 롯데, SK, 삼성을 연이어 만나 힘들겠지만 두산이 우승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후배들을 격려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불사조 정신은 여전했다.
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