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매거진 esc] 이대리의 직장생태보고서
“유에스비(USB) 메모리를 어디 뒀더라? 잠깐 빌려 쓸 수 있을까?” ㄱ대리의 부탁을 받고 메모리를 찾아 여유 저장공간을 확인해 보았다. 16기가바이트 용량의 메모리스틱에는 노래파일 몇 십 개와 발표에 쓸 문서파일들, 금융거래용 공인인증서가 4기가바이트 남짓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사무실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나 가정의 데스크톱 컴퓨터에 중복 저장해둔 파일을 삭제했다면 대부분이 비었을 공간이다. 내친김에 회사와 집에서 사용하는 저장매체의 잉여공간을 계산해봤다. 굴러다니는 유에스비와 스마트폰의 메모리를 합하니 테라바이트 규모를 훌쩍 넘어섰다.
국가 통계에 나타난 우리나라의 경제활동인구가 2400만명 이상이고, 가구당 컴퓨터 보급률이 80%를 넘는다고 하니 한국에 남아도는 데이터 저장 공간을 끌어모으면 우주 정복이라도 도모할 수 있지 않을까?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을 도운 것이 진공관 컴퓨터라는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문득 두번째 피시를 갖게 됐던 20여년 전 봄날이 떠올랐다. ‘진돗개’라는 이름의 그 컴퓨터는 1기가바이트급 하드디스크의 위용을 뽐냈다. 최신 모니터와 4배속 시디롬 등의 사양을 자랑하던 그것들을 합한 가격은 200만원 남짓이었다. 구경 온 학교친구들은 연신 엄지를 치켜세웠고, 나는 인체공학적으로 꺾어진 전용 키보드를 두드리며 우쭐했다. 우주선 몇 십 개를 발사하고도 남았을 그 컴퓨터로 내가 주로 한 것은 피시통신과 게임이었고, 몇 년이 지나 아무도 갖고 싶어하지 않는 쓰레기로 변했다.
농업과 공업의 시대에 잉여생산물은 물물교환의 대상이 되거나 교환가치를 증명하는 화폐가 됐다. 즉 사회적 가치를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디지털 사회의 잉여 저장공간은 사용하지 않으면 어떤 가치도 창출할 수 없다.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값은 떨어진다.
사무실의 컴퓨터를 관찰해본다. 임원에서 팀장, 막내사원에 이르기까지 사양은 차례로 낮아진다. 모니터 크기나 해상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하위 직급일수록 다중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고, 힘에 부친 노역을 감당 못한 컴퓨터는 솜을 등에 지고 강을 건너는 당나귀처럼 너부러지기 십상이다. 역설적으로 ‘진돗개’ 정도면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분들 앞에는 우주전쟁이 가능한 단말기들이 네모난 녹색창의 포털화면을 하루 종일 깜빡이고 있다.
‘출장비를 정산받을 개인 계좌를 이번 주말까지 이아르피(ERP) 시스템에 등록하세요’라는 공지문이 떴다. 3.3기가헤르츠 중앙처리장치(CPU)를 장착한 컴퓨터를 쓰는 몇몇 분이 막내사원에게 도움을 구했다. 접속 아이디(ID)와 비밀번호, 등록 요령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연초가 되면 많은 기업들이 ‘노후 피시 교체작업’을 한다. 한계치의 1할이나 제대로 썼을까 싶은 컴퓨터들은 ‘정보화 소외계층을 위한 사랑의 피시 기증’이나 ‘아프리카 정보격차 해소를 위한 희망의 피시 전달’ 같은 이름을 달고 팔자에 없는 천사로 변신한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같은 돈으로 조금 낮은 사양의 컴퓨터를 장만하고 남는 예산을 모아 정보격차 해결을 위해 새 컴퓨터를 보내주는 건 어떨까? 고사양 컴퓨터에 눈이 휘둥그레져 엄지를 치켜세워줄 친구들이 줄을 서는 시대도 이미 지나갔으니 말이다.
H기업 이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