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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69)—단풍현 전적지 답사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3.03.21일 12:12
2009년 2월 13일 오전,《영원한 기념비》답사팀은 호북성 황강시 단풍현을 찾아보았다. 뿌연 안개가 채 가셔지지 않은 단풍현에는 단풍전역에 참가했던 156사 렬사들을 위해 세운 커다란 기념비가 있었으며 새롭게 만든 도강전역 전적비가 있었을뿐만아니라 유채꽃이 만발한 장강연안에는 156사 466퇀 퇀부가 있었던 반석교가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1970년에 세운 단풍현 영웅기념비는 《인민영웅은 영원불후하리》라는 글이 새겨져있었고 기좌에는 《1949년 4월 23일,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은 단풍을 해방하기 위해 장강을 강행 도하하여 국민당과 영용히 싸웠다. 전투에서 43명 렬사들이 영광스럽게 희생되였다. 황강현혁명위원회 인민무장부 1970년 10월》이라고 새겨져있었다.

기념비곁에 렬사릉묘가 있었는데 그앞에는 《도강전역 렬사공묘》라는 작은 비석이 있었다. 연변의 156사 로전사들이 회억한데 의하면 단풍전역에서 희생된 43명 렬사는 모두 조선족이라고 한다. 답사팀은 단풍렬사기념비를 향해 묵도를 드린후 부근의 반석교를 찾아보았다.

벽돌로 축조된 다리는 40~50메터 길이의 작은 다리였고 낡을대로 낡아 잡초와 작은 관목이 삐죽삐죽 자라고있었지만 지금도 다리우로 이따금 행인들이 다녔다. 도강작전시 156사의 선봉을 맡은 466퇀은 바로 이곳에 퇀지휘부를 정하고 신속히 여러 작전목표로 달려가 단풍나루터 습격작전을 성공시켰던것이다.

도시확장계획에 따라 옛날의 단풍진은 지금 단풍현으로 확대발전되고있었다. 단풍현인민정부에서는 도강작전 전적지라는 우세를 리용하여 장강북안에 커다란 도강전역 전적비를 세우고 기념비를 새롭게 만들어놓았다. 전적비에는 《5월 11일 4야전군 선견병퇀 156사, 전신은 길림독립사단으로서 대부분 조선족장병이였다. 156사 466퇀은 명령에 따라 단풍을 해방하고 단풍을 돌파구로 장강강행도하작전을 펼쳤다…해방군은 전투에서 115명이 희생되거나 부상했으며 희생자는 43명인데 모두 조선족이다.》라는 글들이 새겨져있었다.

돌비석에 정교하게 새겨진 붉은 글발들을 읽고있는 답사진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선량한 이곳 인민들은 민족을 가리지 않고 단풍해방과 도하작전을 위해 희생된 조선족렬사들을 저들의 은인으로 생각하고있었고 그들의 공적을 잊지 않고있었던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43명 렬사중 9련 련장 차춘모, 경위련 지도원 박량호, 반장 림수현을 비롯한 몇명 렬사들의 이름만이 생존한 로전사들에 의해 기억되고있을뿐이다.

단풍현 렬사기념비.

기념비에 새겨진 비문(43명 렬사임을 밝혀주고있다).

퇀지휘부가 있던 반석교.

단풍의 도강작전 기념비.

도강작전 비문.

비문은 43명 희생된 렬사들이 전부 조선족임을 밝히고있음.

단풍진의 장강입구.

1949년 5월초, 중국인민해방군 백만대군이 도강작전을 시작해서부터 각 부대는 신속히 남경, 항주, 남창, 상해를 점령함으로써 동부와 중부전선에서 국민당의 방어진을 헤치고 신속히 전과를 확대해나갔다. 한편 서부전선에서도 제4야전군 43군과 40군이 무한주변에 포진하고있었다. 43군 156사가 단풍을 해방하자 43군 대부대는 단풍진을 돌파구고 장강도하를 시작했다.

5월 15일, 43군은 호북성 단풍진으로부터 전가진(田家镇)사이 약 200여리 구간에서 156사를 선봉으로 도강을 시작했다. 156사 장병들은 단풍전투에서 로획한 68척의 크고작은 돛배에 모래주머리를 싣고 기관총과 대포를 설치한후 앞장서 대안으로 공격해갔다. 156사는 역시 466퇀을 선봉에 세워 장강을 건넌후 남안의 적을 소멸하고 300여척의 선박을 확보하여 43군 주력의 도강을 담보해주었다.

5월 15일, 국민당군 화중군정장관공서(华中军政长官公署) 부장관, 하남성 정부주석이며 제19병퇀 사령이였던 장진(张轸)이 무창이남 하승교(贺胜桥), 금구(金口) 일대에서 기의를 선포함으로써 백숭희는 할수 없이 무한을 버리고 도주했다. 이튿날 제4야전군 40군은 순조롭게 한구, 한양, 무창을 해방하였다.

한편 제4야전군에서 가장 먼저 장강을 건넌 43군 156사는 대량의 선박을 로획해 대부대의 도강을 보장한후 억수로 쏟아지는 큰비를 무릅쓰고 계속 도주하는 적을 추격했다. 5월 17일, 156사 466퇀은 강서성 무녕현(武宁县)에서 국민당군 304사의 한개 영과 무녕현 보안퇀 전부를 소멸하고 무녕을 해방했다. 이 전투에서만 하여도 466퇀은 700여명 적을 생포했다. 156사는 중부전선에서 도강작전을 마치고 강서성 경내로

남진하고있는 제2야전군에 협동해 강서 각지를 해방하는 전투를 진행하였다. 그후 제2야전군 진갱(陈赓)병퇀이 남창을 해방하자 156사는 상급의 명령에 따라 남창수비임무를 맡고 강서성 남창시에 들어갔다.

많은 조선족장병을 포함한 제4야전군 40군은 화중의 중심도시 무한을 해방한후 43군과 함께 황강, 단풍부근에서 장강을 건너 계속 남진했다. 40군 119사와 153사는 악성(鄂城), 하승교을 거쳐 함녕(咸宁)으로 진격해 5월 17일에 보안(保安), 대야(大冶)에서 적 두개 영을 소멸하였다. 120사는 함녕을 해방하고 통성(通城)에서 적 800여명을 생포하였다.

40군은 장강천험을 돌파한후 250여킬로메터를 맹추격함으로써 무한, 황강, 악성, 함녕, 대야를 비롯한 10여개 크고작은 도시를 해방함으로써 승리적으로 도강전역을 마쳤다.

수많은 조선족장병을 포함한 제4야전군 47군은 뒤늦게 남진작전을 펼쳤다. 이들은 북평을 출발한후 5월 6일에 하남성 신향을 수비하는 국민당 40군의 투항을 접수한후 42군과 함께 하남성 안양을 해방하였다.

47군은 1949년 6월상순에 호북성 양양(襄阳), 번성(樊城) 부근에 집결한후 도강작전을 준비하였다. 6월 5일, 무한이 해방된후 제4야전군은 47군을 포함한 25만 병력을 집중해 호북성 서부로 진격할 준비를 하였고 호남호북 수비를 책임진 국민당 송희렴(宋希濂)은 약 30만 주력을 집중해 의창(宜昌)과 사시(沙市)를 중심으로 아군의 도하작전과 남진을 막아보려고 했다.

7월초에 국민당군 송희렴은 의창으로부터 나와 량곡을 확보하고 아군의 동정을 살피려 하였다. 이를 감안한 지휘부에서는 송희렴의 주력이 더 나온 다음 4야전군 주력을 집중해 적을 포위, 소멸하려 했다. 하지만 국민당군 선봉이 당양(当阳)부근의 관음사에서 뜻하지 않게 47군 선봉과 마주쳐 격전을 펼쳤다. 아군 주력이 이미 주변에 도착했음을 간파한 송희렴은 급급히 부대를 철수시켜 아군의 포위권을 빠져나갔다. 그리하여 38군과 47군 주력은 적을 추격해 의창과 사시에 이르러 공격준비에 들어갔다.

7월 13일, 송희렴은 해방군 4야전군의 막강한 공격을 막아낼길이 없다는것을 판단하고 의창을 수비하는 동시에 주력을 강남으로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적이 도주할 기미가 보이자 4야전군 지휘부에서는 47군과 38군 주력으로 의창을 포위, 공격하게 하였다. 아군은 정확한 포사격으로 나루터를 통제하는 한편 38군 주력을 신속히 도하시켜 당계산(唐鸡山) 일선에서 적의 퇴로를 차단하게 했다. 그리고 39군과 49군 주력으로 강릉시(江陵市)를 공격하게 했다.

7월 14일 황혼부터 47군은 의창을 공격하였다. 47군 149사 416퇀 3영은 유명한 흑산전투에서 대백태자를 수비했던 강철 8련이 소속된 부대였다. 강철8련의 박영선련장은 수영에 능한 33명 전사를 뽑아 《수상결사대》를 조직해 20여일간 간고한 훈련을 진행했다. 이들은 공격개시 직전에 적진에 잠입해 적의 배를 탈취해왔다. 공격이 개시되자 이들은 적들한테서 로획한 배를 타고 부대의 가장 앞에서 도강하기 시작해 의창해방에 큰 기여를 하였다. 적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국민당수비군은 필사적으로 반항하였다. 47군 장병들은 이틀간의 간고한 전투를 거쳐 16일 오후 의창을 해방하였다.

한편 원 동북인민해방군 12종대였던 49군은 7월 15일에 강릉시를 공격하였다. 장강연안에 설치한 국민당군의 방어시설은 아주 견고하였다. 49군 5퇀의 장병들은 세차나 폭파조를 파견했지만 적 중심보루를 제거하지 못했다. 이때 길림성 안도에서 입대한 김학영이 나섰다. 그는 포병부대를 거느리고 정확한 사격으로 적의 보루와 방어시설을 하나하나 까부셔 아군의 진로를 개척했다.

이윽고 49군 주력은 신속히 강릉으로 진격해 강릉시를 해방하였다. 전투에서 김학영이 소속된 5퇀은 적 400여명을 격살하고 1000여명을 생포하였다. 그리하여 김학영은 사단부로부터 전투영웅칭호를 수여받았고 모택동메달을 수여받았다. 전투영웅 김학영은 1973년 고향에서 세상떴다.

장강도하작전 서부전선에서 43군, 40군, 47군, 49군, 38군을 비롯한 각 부대의 맹활약에 힘입어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은 순조롭게 장강도하적전을 완수하고 무한을 해방했으며 국민당 백숭희집단과 송희렴집단을 물리쳤다. 4야전군 각 부대의 조선족 장병들은 용감히 싸워 김학영과 같은 많은 전투영웅들이 나타났고 또 희생자들도 적지 않았다.

단풍렬사기념비에 새겨진 비문과 함께 장강도하작전에서 영용히 싸운 조선족렬사들의 빛나는 업적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을것이다.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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