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소제(郑小提, 정률성의 딸).
저의 부친 정률성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게 되였습니다. 저는 그의 일생의 경력을 자주 떠올리곤 하는데 감개가 무량합니다.
1910년 일본침략자가 조선반도에 쳐들어오자 우리 조선민족은 자신의 국가를 잃었고 자신의 정부를 잃었으며 자신의 민족언어를 사용할 권리마저 잃었습니다. 하여 조선의 유지청년들은 중국에 와서 민족해방의 길을 모색했습니다.
성장과정에서 형님들의 영향을 많이 받아온 저의 아버지는 망국노가 되지 않고 민족의 해방을 이루어나가려는 꿈을 시종 잊지 않았습니다. 그가 중국에 온 목적은 바로 일본침략자를 무찌르고 자신의 조국을 해방하는것이였습니다. 그는 음악을 무기로 삼아 항일전쟁을 노래했으며 불후의 명작들인 《연안송》, 《팔로군행진곡》 즉 현재의 《중국인민해방군군가》 등을 창작했습니다.
세계 반파쑈전쟁의 동방에서의 주요 전장인 중국 항일전쟁에서 팔로군, 신사군과 어깨겯고 싸워온 조선의용대가 있었습니다. 조선의용대는 적과의 투쟁에서 매우 많은 일들을 하여 그 위용이 널리 알려졌으며 중국항일전장에서 한갈래의 강유력한 《국제종대》로 되었는데 저의 부친은 바로 이 조선의용대의 전사였습니다.
《정률성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전임 길림성정협 부주임 정룡철이 정소제녀사에게 기념패를 전했다.
부친은 1942년 8월부터 1944년 봄까지 태항산에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대에 참여하여 항일투쟁에 참가했는데 이는 그가 항일전쟁에 참가한 중요한 경력이였습니다.
1945년 8월에 일본이 항복하고 항일전쟁은 승리했습니다. 1945년 9월, 팔로군총부 주덕총사령원의 6호명령에 따라 우리 집 일가족 3명은 조선의용대와 함께 연안에서 출발하여 조선으로 갔습니다. 부친은 매우 흥분해하시면서 《조국을 향해 전진하자》와 《31행진곡》을 창작했습니다. 그는 희망을 안고 새 나라 조선을 건설하는 현장에 뛰여들었습니다.
1950년 우리 집은 중국에 다시 돌아왔으며 부친은 중국 국적에 가입했습니다. 그는 국제주의정신으로 새중국 건설에 뛰여들었는바 일반 문예사업자로 되어 중국의 방방곡곡을 다녔고 공장, 탄광, 군영에 다니며 많은 음악작품을 창작했습니다.
저는 저의 부친을 사랑합니다. 이는 저의 혈관속에서 그의 혈액이 흘러서뿐만은 아니며 그의 작품이 우리의 위대한 인민군대와 운명을 같이 할수 있어서뿐도 아니며 그가 자신의 특정한 생명궤적에서 한단락의 력사를 객관적으로 잊지 못할 기억으로 묘사했기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뿐만아니라 그는 사람들의 운명, 리상, 분투를 시대의 요구에 결합시켜야 생명은 비로소 진솔한 의의를 가진다는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줬기때문입니다.
정소제녀사가 전임 성급 조선족지도자 및 저자 《정률성평전》 리혜선작가와 기념사진을 남기고있다.
/사진 유경봉기자(yujf@jlcxwb.com)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