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쁜 남자'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선화(서원 분)를 성노동자로 만드는 한기(조재현 분)/ 사진=영화 '나쁜남자' 스틸컷
"때린다는 것을 제외하면 꽤 괜찮은 연인이었다."
A씨(여)는 대학 내 소문난 CC(캠퍼스 커플)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자신만 바라보는 남자친구에게서 A씨는 진정한 사랑을 느낍니다. 불편하기도 했지만 "나를 정말 사랑하는구나"하는 생각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곧 집착이 됐습니다. 남자친구는 A씨의 동아리나 친구 모임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고 늦게 끝난다고 해도 집앞으로 찾아와 몇시간씩 기다리기 일쑤였습니다.
또 연락이 닿지 않으면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피곤함에 일찍 잠들었던 날. 휴대전화에는 대화형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수백건과 부재 중 전화 수십통이 남아있었습니다. 끝내 A씨는 이별을 결심하기에 이릅니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던 A씨는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를 보고 화들짝 놀라게 됩니다. 게시판에 올라온 글에는 전 남자친구와의 일들이 고스란히 적혀있었습니다. "생각 같아선 나쁜 짓이라도 저지르고 싶었는데 참았다"는 협박 글을 본 A씨는 섬뜩함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최근 진보논객 한윤형(32)과 박가분(본명 박원익·28) 등이 과거 여자친구를 폭행했다는 의혹에 휩싸이면서 '안전 연애'를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데이트 폭력이 다양한 양상을 띄면서 연애기간 폭력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 보호하자는 것입니다.
이 때 새로운 유형의 폭력이 눈길을 끕니다. 한국여성의전화 산하 안녕데이트공작소는 "구타나 성적인 학대만 폭력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괴롭히거나 폭언하는 것 역시 폭력"이라며 '정서적 데이트 폭력'의 위험성을 강조합니다.
이 단체에 따르면 큰 소리로 호통치기나 헤어지면 죽어버리겠다고 하기, 만날 때마다 스킨십과 성관계를 요구하기 등이 폭력이라고 언급돼 있습니다.
또 하루종일 전화와 문자하기, 연인이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을 싫어하기, 기다리지 말라는데도 기다리기, 과거를 끈질기게 캐묻기 등 우리사회 흔한 술자리에서 나올 법한 사연 역시 일종의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강조하면서 연애 초기 정서적 폭력을 인지하고 거부 의사를 뚜렷하게 밝혀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화영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장은 "뉴스에서 다루는 폭행이나 살인 사건 등은 데이트 폭력의 일부"라며 "대부분의 데이트 폭력은 일상생활에서 이뤄지는 만큼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어 "사랑이 폭력 방식으로 이뤄질 때 '아 이거는 폭력이구나' 인지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본인이 모른다면 주변에서라도 이건 폭력이라고 얘기해줘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 다수는 당시 피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남자친구가 나를 너무나 사랑했다"는 A씨는 정신적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이미 전 남자친구의 집착 정도가 과도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한윤형의 전 여자친구 역시 "나는 전형적인 데이트 폭력 피해자의 심리 상태에 처했다"며 "당시에는 맞지 않는 것보다 그를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고 밝힌 바 있다.
"심하게 구속하는 남자가 좋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우리사회 데이트 폭력에 대한 인식은 아직 미비한 편입니다. 유명 예능프로그램에서는 연인에게 집착하고 강요했던 경험이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로 포장됩니다. 벽에 밀쳐 강제로 키스하고 손목을 잡고 끌고 가는 장면 등은 멜로 영화나 드라마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합니다.
데이트 폭력과 사랑을 구별하지 않는 사회. 당신의 연애는 '안전'하십니까.
이원광 기자 demian@mt.co.kr, 백지수 기자 100jsb@mt.co.kr
머니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