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 요즘 KCNTV한중방송에 정기출연하면서 제2의 방송인생을 펼쳐가고 있는 나는 참된 방송인으로 성장하도록 나를 이끌어주셨던 직장 동료이자 스승인 홍인표선생님을 가끔 떠 올리군 한다.
1979년 3월, 흑룡강성 아성현방송국에서는 조선말방송을 창설하기 위해 조선족 직원 3명을 모집했는데 나는 공채를 거쳐 그중 일원으로 되였다.
출근한 첫날, 보통 키에 눈빛이 날카로우면서도 약간 슬픔이 엿보이고 조금은 랭정해보이는 30세 좌우의 남자가 조선어부 홍인표주임이라고 소개했다.
홍선생님은 시와 문학에 재질이 있었고 방송기사는 흠 잡을데 없이 깔끔하였다. 우리들에 대한 요구도 높았다. 조선족 학교는 4년밖에 못 다니고 한족학교 고중을 나온 나는 조선글 기사를 다루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한번은 할빈제약공장의 모범간부로 이름난 아성분공장 기계수리작업장의 안정복주임을 취재하여 밤새 장편기사를 써서 홍선생님에게 바쳤다. 칭찬을 기대하는 나에게 "수고가 많았소. 그런데 묘사가 많고 실질적인 내용이 부족해 인물이 생동하지 않소. 취재 내용이 좀 부족하단 말이오 " 하면서 인물기사를 어떻게 쓸것인가에 대해 자상히 가르쳐 주시며 "성실한 로동은 덕이 되여 돌아오니 열심히 쓰다보면 훌륭한 기사가 꼭 나올거요."하며 용기를 돋구어줬다.
홍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나는 눈뜨이게 성장해 갔다. 지난 80년대부터 2008년 퇴직하기전까지 내가 쓴 기사는 본 방송국외에도 흑룡강신문사, 흑룡강조선말방송, 중앙방송국 등 언론매체에 륙속 나갔는데 1998년에는 흑룡강신문에만 67편의 원고가 실리는 최고 기록을 내기도 하고, 련속 상급 언론매체의 우수 통신원, 특약기자로 활약했다. 그리고 중앙조선어방송국과 흑룡강조선말방송, 흑룡강신문사 및 한족매체인 흑룡강텔레비전방송, 할빈텔레비전방송 등 우수 원고 평의에서 십여차나 1등상을 받았다.
1984년, 아성방송국에 텔레비전방송이 탄생, 홍선생님은 스스로 비디오를 구입해 아성시 조선족사회의 뉴스를 촬영해 텔레비전프로에 동참하자고 했다. 홍선생님은 이 제안을 상급부문에 보고하는 동시에 아성시 조선족 지명인사들을 초청하여 도움을 청했다.
1994년, 아성시방송국에서 주최하는 조선말방송창설 15주년 경축행사가 있었다. 경축행사에서 아성의 조선족지명인사들은 고급 비디오 한대를 충분히 구입할수 있는 성금을 내놓았다. 하여 아성시방송국 조선말방송은 흑룡강성에서 가장 먼저 비디오를 갖춘 조선말방송이 되여 조선족들을 영상으로 홍보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1996년 10월 6일, 홍선생님의 안색이 흐리고 몹시 지쳐 보였다. 할빈의과대학제1병원에 검사받으려 가야 한단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사모님이 동반해가지만 무작정 따라 나섰다.
검사결과는 오후에야 나왔다. 초보적인 진단은 간암말기같은데 정확한 결과는 일주일후에 나온단다. 이게 무슨 청천병력인가! 아무리 참으려해도 샘솟듯 나오는 눈물은 억제할수가 없었다. 한참 울다가 마음을 다잡고 문밖에 나오니 홍선생님이 서 계셨다. "솔직하게 말해봐, 화실이가 우는걸 보고 나도 짐작이 갔소." 선생님은 내가 나오지 않으니 궁금해서 왔다가 문틈으로 내가 우는걸 보았던것이다.
일주일후의 최종 진단을 내가 가지러 나섰다. 처음의 진단이 오진이였음을 간절히 빌었지만 결론은 똑 같았다. 진단서를 든 나의 마음은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1996년 11월 23일, 48세의 한창 나이인 홍선생님은 아쉽게도 세상을 떠났다.
홍인표선생님이 타계하신지도 어언간 19년이 되였다. 그간 나는 홍인표선생님의 뒤를 이어 조선민족을 위한 방송을 끝까지 지키며 어엿한 방송인으로 성장했으며 퇴직후에도 한국에서 성실한 로동으로 보람찬 새 삶을 열어가고 있다./리화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