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일,연길시 건공가두 연화사회구역에 거주하는 김순자할머니(84세)댁은 노래소리, 박수소리에 환락으로 들끓었다. 김순자할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한족녀성 리문영이 자기가 직접 지은 《조선족어머니》라는 노래를 불러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던것이다.
《그리운 어머니/ 산과 들에 진달래가 필 때마다 한없이 그립습니다/ 조선족 어머니/ 먼곳에 계시는 어머니 몸은 건강하십니까/ 어머니는 얼었던 나의 손발을 품에 안고 녹여주었습니다/ 아~ 어머니 그리운 어머니/ 아~ 어머니 사랑합니다/ 나의 어머니》
참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을 걷잡을수 없어 눈시울을 적시는 노래를 들으면서 기자는 한 조선족어머니의 뜨거운 사랑의 사연을 들었다.
1985년의 어느날이였다.
연변위생학교부근에서 자그마한 식료품가게를 꾸리고 영업을 하던 김순자어머니는 그날 한 한족처녀애에게 측은한 마음이 쏠리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람루한 의복에 가냘픈 몸매, 우울하고 그늘이 비낀 얼굴, 당시 리문영씨는 집이 돈화시 사하연진에 살았는데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장애자인 아버지와 함께 오빠가 일해 번 얼마 안되는 수입으로 근근득식하며 살았다.
가난한 가정형편에서도 문영이는 공부를 잘해 19살 때 연변위생학교 의사반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가정형편이 째지게 가난했던 연고로 문영이는 상점에 올적마다 다른 애들처럼 간식도 사먹을수 없었고 그저 필요한 학용품이나 일용품이나 겨우 사는 처지였다.《엄마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문영이는 얼마나 불쌍한가!》문영이의 불행한 처지는 김순자할머니의 선량한 마음에 뜨거운 모성애를 불러일으켰다. 이때로부터 김순자어머니는 리문영이를 자신의 친딸처럼 보살펴주었다. 엄동설한에 홑옷만 입고 다니는 문영이에게 두터운 솜옷도 사주고 용돈도 쥐여주고 먹을것을 주었으며 앓으면 약도 사주고 병치료도 해주었다. 그리고 김순자할머니는 어릴 때 배운 일어 기초를 바탕으로 문영이에게 일본어를 열심히 가르쳐주었다. 하루도 아니고 한달도 아닌 춘하추동 사시절 문영이에게 온갖 정성을 쏟아부었다.
김순자어머니에게서 친어머니의 사랑을 깊이 느낀 문영이는 그를 어머니라 부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김순자어머니의 품속에 얼굴을 묻었다. 김순자어머니도 문영이를 양딸로 받아들이고 끝없는 사랑을 베풀어갔다. 문영이가 위생학교를 졸업하고 돈화의 한 병원에 배치받아 갈 때 김순자어머니는 기어어 따라가 그녀가 일할 직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시름을 놓았다. 그후에도 문영이가 결혼하고 이사를 하고 임신을 하고 해산을 하고 병들어 눕고 아들이 대학에 가고 … 그럴때다 꼭꼭 찾아가서 어머니의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이렇게 조선족어머니와 한족딸지간의 끈끈한 모녀정은 28년동안이나 어어져왔다. 사실 김순자할머니도 슬하에 아들 셋, 딸셋 여섯자식을 두고있는 힘든 형편이지만 리문영이에 대한 사랑은 친자식보다 더욱 지극하였다. 이외에도 김순자할머니에게는 또다른 한족양아들 정수금, 중경림과 한족 양딸 장려 등이 있다. 김순자어머니는 문영이에 못지 않게 이들이 위생학교 시절부터 생활난에 모대기자 친자식처럼 여러모로 돌보아주었다. 현재 이들은 모두 사회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있다.
김순자할머니가 한족자식들을 자기의 친자식처럼 보살펴준 공로로 하여 일찍 1991년도에 연길시 민족단결 선진개인으로 당선되였고 1992년7월에는 전주민족단결 진보선진인물의 영예도 안아왔다. 현재 김순자할머니는 84세의 고래희의 나이지만 연변애심어머니협회에도 가입하여 지팽이를 짚고 딸의 부축을 받으면서 사랑을 베푸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 하고 있다.
/강동춘 특약기자
편집/기자: [ 박금룡 ] 원고래원: [ 길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