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한·EU FTA(자유무역협정) 발효 이후 식품·침구류·주방용품 등 유럽산 상품의 가격이 내리고 매출이 늘어나는 'FTA 효과'가 본격화하고 있지만, 일부 고급 제품은 관세 인하분을 아직도 가격에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가격은 안 내리고 관세 인하분마저 이익으로 챙기는 소위 배짱 장사를 하고 있다는 얘기다. 특히 브랜드 경쟁력이 강한 고급 제품들이 관세 인하분을 고객에게 돌려주지 않고 이익으로 흡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지가 지난 15일부터 17일까지 EU산 주요 FTA 해당 제품의 가격을 분석해본 결과 필립스, 브라운, 테팔, 드롱기 등 유럽에 본사를 둔 유명 소형가전 및 주방용품이 관세(8%)가 철폐됐지만, FTA 이전 가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전기면도기 시장의 글로벌 최강자인 필립스의 유럽산 프리미엄급 제품 RQ1250(모델명)은 26만9000원, 브라운의 유럽산 제품 720(모델명)도 26만1000원으로, 지난해 6월 가격과 변함이 없었다. 유통업계는 이들 제품은 1만원 가까운 가격 인하 요인이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한 대형마트 구매팀 간부는 19일 "해당 제품은 한·EU FTA 발효 이후에도 제조업체가 똑같은 가격으로 유통업체에 공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격이 비싼 제품일수록 내릴 수 있는 가격 폭은 커진다. 하지만 일부 제품의 가격은 요지부동이다. 커피메이커의 최고급품인 이탈리아 드롱기 사의 에스프레소머신(모델명 ESAM2600)은 119만원 가격에 변화가 없다. 테팔 스팀다리미(FV9530)도 13만6000원인 FTA 이전 가격을 그대로 받고 있고, 프랑스 에서 직수입하는 테팔의 엘레강스 레드 프라이팬(28㎝)도 2만7800원인 소비자 가격에 변함이 없다. 주방용품 역시 8%이던 관세가 지난해 7월 곧바로 철폐됐다.
소비자들이 '유럽 브랜드 소형가전 제품이 FTA 발효 이후에도 왜 내리지 않느냐' 항의하면 메이커들은 실제 제조는 중국에서 하기 때문에 FTA 해당 품목이 아니라고 변명해왔지만 유럽에서 제조되는 프리미엄급 제품까지 이를 핑계 삼아 폭리를 취해왔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됐다.
기존 8% 관세가 지난해 7월 5.6%로 2.4% 포인트 낮아진 승용차(배기량 1500㏄ 이상 중·대형)의 경우, FTA 발효를 전후해 1~3% 선 가격을 인하했지만 이후 다시 가격을 올린 경우가 많다. 메르세데스 벤츠의 인기 차종인 E330 엘레강스는 기존 6970만원에서 FTA 발효에 맞춰 6870만원으로 인하됐지만 지금은 6990만원으로 오히려 더 올랐다. 또 다른 독일의 프리미엄 브랜드인 BMW는 지난해 12월 출시한 신형 528i 가격을 기존모델(6790만원)보다 0.7% 오른 6840만원으로 책정했다.
공정거래위원회 는 최근 수입차와 부품 가격의 적정성에 대해 조사에 착수했다. 차 값 뿐 아니라 부품 값, 수리비 등 한 번 차를 구입한 이후엔 울며 겨자먹기로 부담할 수밖에 없는 가격도 공정위의 조사대상이다. 보험개발원 자동차기술연구소가 조사한 지난해 외제차 평균 수리비는 1456만원으로 국산차 평균 수리비 275만원의 5배가 넘었다.
대표적인 고가 상품인 명품은 FTA 발효 이후 가격이 오히려 올랐다. 지난해 6월 539만원이었던 샤넬의 빈티지 2.55 가방은 지금 740만원이다. 크리스찬디오르의 향수 미스디오르 블루밍부케(50㎖)도 9만8000원에서 10만5000원으로 올랐다. FTA 발효 이후 가방은 8%, 화장품은 6.5%인 관세가 즉시 철폐됐다.
15%인 관세를 즉시 철폐하도록 한 와인의 경우, FTA 발효 즉시 10% 정도 가격이 인하됐지만 모엣샹동 샴페인 등 일부 제품의 가격은 그대로 유지됐다. 20% 관세가 즉시 철폐된 위스키 가격도 내리지 않았다. 주류업체 측은 "주류는 관세뿐 아니라 내국세 비율이 높기 때문에 가격 인하 요인이 많지 않다"고 해명했지만 한 푼도 내리지 않은 이유는 설명하지 못했다.
오세조 연세대 교수는 "고가품의 경우, 소비자들이 가격 때문에 선택하는 브랜드를 바꾸는 경우가 드물다"며 "이런 제품의 가격이 특히 인하되지 않은 것은 FTA 효과를 마진 확대로만 연결시켰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 김덕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