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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고의 교사가 되고 싶지 않다”

[기타] | 발행시간: 2012.06.04일 10:05
얼마 전 EBS에서 ‘최고의 교사’라는 책을 발간해서 화제가 된 모양이다. 이 책에는 몇몇 훌륭한 교사들을 엄선해서 이들의 수업 동영상을 보고, 또 밀착 취재한 내용이 들어 있다고 한다. 물론 나는 이 책을 사서 읽어보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가르쳐야 할 분야의 학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성실히 활동하고 그 과정을 학생들과 공유하고자 할 뿐, 가르치는 기술 따위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실상 내가 공부하고 학습한 과정이 바로 가르침의 기술의 원천이다. 배움과 가르침은 그렇게 하나인 것이다. 그러니 이런 식의 “가르침의 기술, 비법, 노하우”를 운운하는 종류의 책은 단 한 번도 내 손에 잡히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관심도 받아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내 관심을 끌었다. ‘최고의 교사’라는 제목이 너무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감히 나를 빼먹고 최고의 교사를 운운해서 기분 나쁜 것이 아니다. ‘최고의 교사’라는 말이 사용되는 맥락이 기분 나빠서다. 애당초 교사 앞에 ‘최고의’라는 최상급을 붙인 것 자체가 영 못마땅하다. ‘최고의 교사’라는 말이 사용가능하다면 ‘더 좋은 교사’라는 말도 당연히 정당화 될 것이며, 더 나아가 ‘더 나쁜 교사’, ‘최악의 교사’까지 성립 가능하니 ‘보통 교사’를 가운데 둔 위계서열이 자연스럽게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모든 교사들이 똑 같이 대우받아야 한다거나, 교사들이 이른바 교육의 이른바 퀄리티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교사들은 훌륭한 교육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그 뿐이다. 구태여 다른 교사들과 비교하여 더 좋은 교사, 더 나아가 최고의 교사가 되고자 할 필요는 없으며, 또 그래서도 안 된다.사실 이 책의 이름이 ‘훌륭한 교사들’이기만 했어도 혹은 ‘좋은 선생님들’이기만 했어도 나는 기분 나쁘지 않았을 것이며, 기꺼이 이 책을 참고할 마음을 먹었을 것이다. ‘좋은’이라는 것은 상대적 개념이 아니라 상황적 개념이기 때문에 무수한 교육적 상황에 따른 무수한 좋은 교육이, 그리고 좋은 교사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고의 교사들’이다. 게다가 이 기획자의 전작이 ‘최고의 교수들’이라고 하니 더욱 기분 나쁘다. 내가 최고의 교사들에 들어있지 않고, 내 절친 정 아무개 교수가 최고의 교수들에 들어있지 않아서 하는 말이 아니다. 최고라는 말이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곳에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는 최고라는 말에 중독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디서나 ‘최고’라는 말을 사용한다. 동네 최고, 지역최고, 국내최고, 세계최고. 최고라는 말이 하도 많아서 어지간한 최고로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이는 마치 음식점들이 너도 나도 원조집이라고 우겨대는 것과 비슷하다.

원조 음식점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잠깐 곁길로 빠져 보자면, 마카오 여행 때 에그 타르트의 원조라는 ‘카페 이 나타 마르가리타’인가 하는 곳을 고생고생하며 찾아간 기억이 난다. 아마 우리나라였으면 그리 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100미터 전방부터 ‘에그 타르트의 원조’란 입간판이 서 있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 자그만 카페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가게를 키우지도, 눈에 띄는 간판을 세우지도, 프랜차이즈를 만들지도 않고, 억지로 골목을 뒤져야 겨우 눈에 띄는 작은 점포 그대로였다. 타이페이 명물 국수집인 ‘아종면선’도, 단짜면의 원조인 ‘두샤오웨’도 도대체 최고니 원조니 하는 간판 하나 세우지 않았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이렇게 최고니 원조니 하고 난리를 친다.

물론 최고가 되는 것은 즐거운 일이며,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존경받을만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이 최고라는 말은 쓸 수 있는 영역이 있고 없는 영역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세계 최고의 장신이 누군지는 금방 확인할 수 있다. 키를 재어 보면 될 일이다. 세계 최고의 부자도 확인할 수 있다. 자산 가치를 화폐로 환산하면 되니까. 이렇게 어떤 단일한 척도로 측정하여 비교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우리는 최고를 가려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단일한 척도를 들이댈 수 없는 영역에서는 최고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 다양한 일들은 이렇게 단일 척도로 측정할 수 없는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만약 저 책을 기획한 EBS 기획자가 ‘최고의 어머니’라는 책을 냈다면 상당한 저항감에 부딪쳤을 것이다. 매우 많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어머니는 자기 어머니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과 관련된 일은 단일한 척도로 측정할 수 없다. 저마다의 역사가 있고 저마다의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박태환과 정명훈은 누가 더 훌륭한가라는 질문에 뭐라 답할 수 있겠는가? 물론 분야가 달라서라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럼 박태환과 류현진은 누가 더 훌륭한 스포츠맨인가라는 질문은 어떤가? 종목이 다르다고? 그럼 류현진과 이대호는 누가 더 훌륭한 야구선수인가? 포지션이 다르다고? 그럼 이대호와 김태균은 누가 더 훌륭한 타자인가? 누가 최고인가? 이렇게 같은 분야에서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비교급과 최상급을 사용하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유독 ‘최고의 교사들’이라는 말에는 큰 거부감들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니 이런 제목의 책이 잘 팔리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유는 ‘최고의 학생들’이라는 말에도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은연중에 학생들을 단일한 척도로 측정하여 비교하는데 익숙해져 왔다. 그냥 시험 점수만 비교해 보면 되는 것이다. 학생을 점수로 비교하는 것에 익숙해진 마인드에게 교사를 서로 비교하여 최고를 가려내는 일은 그다지 낯선 일이 아니다. 남들보다 많이 알고 더 숙달되었으며, 학생들을 잘 다루고 가르치는 스킬이 뛰어나며, 비법과도 같은 수업 기법들의 포트폴리오를 보유한 교사를 떠올리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한 마디로 시험 잘 치게 기존의 내용들을 잘 정리해서 알기 쉽게 만들어주는 교사들, 혹은 입시가 아무리 복잡하게 바뀌어도 너끈히 통과할 수 있게 요령을 잘 전해주는 교사들이다.

물론 이런 것들도 능력은 능력이다. 하지만 문제는 실제 배움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배움은 계획에 따라 정해진 학습량을 달성해 나가는 기계적인 과정이 아니다. 배움은 삶을 공유하는 것이며, 경험을 확장하는 것이다. 훌륭한 교사란 자신이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것을 효과적으로 쏙쏙 잘 전달해 주는 존재가 아니라 이런 삶의 공유와 경험의 확장과정에 함께 동참하여 학생과 더불어 성장해 나가는 존재다.

이것은 태도의 문제이지 기능과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기꺼이 배우고자 하는 태도, 배움을 즐기는 태도가 중요한 것이지, 기능과 능력은 그 다음이다. 물론 이렇게 배움의 태도를 갖춘 교사라면 평생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기에 남들보다 더 많이 알고, 더 능숙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좋은 교사의 결과이지, 좋은 교사의 조건이 아니다. 그러니 여기에는 “최고의”라는 말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만약 많은 것을 알고 있고, 훌륭한 기법들을 능숙하게 익힌 그런 교사들을 최고의 교사라고 부른다면(이 책에 따르면 그렇다), 우리나라는 최고의 교사가 더 필요한 상황도 아니다. 거기에 얽힌 에피소드도 있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에서는 그 나라 대졸자들 중 평균 수준에서 교사들이 충원된다. 그런데 핀란드 교육장관이 “우리나라는 상위 20% 중에서 교사들이 충원되고 있다. 그게 핀란드 교육의 강점이다”라고 자랑질을 했다. 그러자 같이 있는 우리나라 장관이 “20% 가지고 무슨. 우리 나라는 상위 5%는 되어야 교사가 된다.”라고 말해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사실 나도 저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실제로 수능 네 과목 등급 합계가 8등급 이내라야(평균 2등급 이내니 어림잡아 상위 11% 정도) 지방 교대라도 바라볼 수 있고(수도권 교대는 상위 4%도 장담 못한다고 하는게 대입가의 정설), 교대 졸업생들 중 1/3 정도만 교원임용고시에 합격할 수 있으니 정말 5% 이내다. 중등도 마찬가지라서 상위 3% 이내의 학생들이라 할 수 있는 서울대 졸업생들조차 교직 입직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최근 10년간 학교에 임용된 교사들은 저마다 최고의 학생들이었고, 그 최고의 학생들끼리 치루는 살인적인 임용고시를 돌파한 승자들이며, 최고라는 말에 너무 익숙하고, 최고를 가치관으로 삼아 평생 살아온 그런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여기서 다시 최고를 가리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미 우리나라 교사들은 최고 과잉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최고가 되라는 경쟁심이 아니라 옆과 주변을 바라볼 수 있는 넓은 품이다.

게다가 최근의 인지과학 역시 최고의 교사가 설 자리를 빼앗고 있다. 인지과학에 따르면 지식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들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창발 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바렐라는 심지어 ‘자아’라는 것 조차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서 창발된 것이라고 한다. 내가 있고, 여러 ‘나’들이 모여 우리가 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있고, 우리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나’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앎이란, 배움이란 ‘내 머리’ 속에서 일어나고 ‘내 머리’속에 심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관계망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리가 없으면 앎이 없고, 앎이 없으면 공부도 되지 않는다. 이게 바로 우리나라 교육에서 부족한 점이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공부를 고독하게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공부란 상대방을 이겨야 하는 경쟁에서 활용해야 할 무기이며 자원이기 때문에 절대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꼭꼭 싸매고 혼자 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최고의 교사는 특별한 행운이거나 아니면 돈을 주고 구입해야 할 희소한 자원이다. 학교에서 우연히 만나면 특별한 행운이며, 인터넷 강의 등을 통해 만난다면 희소한 자원이다. EBS의 주장은 후자에 가깝다. 즉, “우리는 최고의 교사라는 희소한 자원을 공중파 답게 무료로 제공하니, 너희들은 책이라도 사라!” 이렇게 들린다. 불행히도 이런 최고의 교사들을 만나지 못한 학생들은 경쟁에서 도태된다.

그리고 이들은 그리고 이들의 학부모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난 교사들이 최고가 아니었기 때문에 도태되었다고 주장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즉 최고의 교사들은 5% 외에는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입시 경쟁 속에서 패배한 95%가 자기들의 패배를 무능한 교사들에게 돌리기 위한 하나의 핑계다. “저런 선생님을 만났으니 얼마나 좋아!”하는 순간 최고의 교사는 일종의 로토 당첨금이 된다. 이는 고스란히 학교의 교사들에게 “질로 안되면 양으로라도 메우라!”는 요구가 되어 돌아온다. 최고의 교사들은 최고 칭호를 받지 못한 다른 교사들에게 무지무지한 초과노동의 압력을 행사하는 도구가 된다. 즉 이들은 북한 천리마 운동에서 볼 수 있었던 노동영웅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런 경쟁 속에서는 점수는 나올지언정 배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시험은 쳤을 지언정 아무것도 얻어가는 것이 없다. 그래서 졸업과 동시에 모든 것을 깡그리 잊어버린다. 생각하면 기막히지 않은가? 초, 중, 고 12년 동안 수학에 쏟아 부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그 엄청난 시간을 사용한 수학인데, 지금 써먹을 수 있는 수학은 얼마나 남아 있는가? 차라리 그 시간동안 악기나 운동을 배웠으면 아마 지금쯤 훌륭하게 써먹고 있을 것이다. 학교 공부가 이렇게 엄청난 시간 낭비로 전락한 것은 교사가 무능해서, 최고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앎”이 발생하는 조건, 즉 “우리”가 조성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훌륭한 교사는 바로 이런 배우는 ‘우리’를 잘 조성해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를 잘 조성해주는 사람은 실제 삶속에서 그런 경험을 많이 해 본 사람이다. 물론 이런 ‘우리’ 경험을 많이 해 본 사람이라면 경쟁을 통해 최고를 가린다는 발상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자신이 “최고의 교사들”이라는 기획프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면 그 취재를 거부했을 것이다. 최고가 되려는 마음가짐으로는 결코 교육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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