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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맹과 충성으로 엮은 인생신화-'외팔영웅' 오하묵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21.05.17일 14:06



'외팔영웅' 오하묵

  오하묵, 그는 전 중국을 종횡하던 전투영웅이였다. 동북의 백산흑수로부터 해남도의 만천하기슭에 이르기까지, 소용돌이치는 압록강기슭으로부터 이국타향의 한강기슭에 이르까지 모두 그의 전투적 발자취가 남겨졌다. 그는 외팔영웅이였다.

  가렬처절한 조선전장에서 화선을 넘나들며 오른쪽 팔을 잃었다. 그는 또한 무명영웅이었다. 비록 몸은 잔폐였지만 의지만은 변하지 않아 줄곧 전간에서 땀흘리며 고향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는 역시 물욕이 없는 영웅이였다. 종래로 꽃다발이나 요란한 박수갈채에 매몰되지 않았다. 그의 소박한 정신풍모와 신념에 대한 추구는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안겨주었다. 영웅의 이름은 오하묵이다.

  오하묵은 1927년6월11일, 밀산현 양목향의 한 조선족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1세에 아버지를 따라 밀산현 귀인촌으로 왔다.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그도 다른집 아이들처럼 공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정형편을 잘 아는 그는 눈물을 머금고 지주집에 가 방목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아들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어머니는 아껴먹고 아껴쓰며 모은 돈으로 두해 겨울 그에게 서당공부를 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1941년, 14세의 오하묵은 일제의 강제징역에 끌려 계서적도탄광에서 석탄을 캐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제는 ‘인육채굴’ 즉 사람의 목숨으로 석탄을 바꾸는 야만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는바 총칼과 채찍으로 로동자들을 어두컴컴하고 습하며 숨이 콱콱 막히는 갱도로 몰아넣었다. 하루 13~14 시간의 고역으로 수만명의 갱부들이 지치고 기아와 온역에 시달려 목숨을 잃었다. 갱부들의 시체는 백골로 쌓여 죄악의 만인갱을 이루었다. 15~16세의 한창 자라는 소년으로 생기발랄하던 오하묵도 뼈만 앙상하게 남아 죽음의 변두리에서 헤매였다. 하지만 인성을 잃은 일본군경과 한간감독들은 그 래도 오하묵을 놓아주지 않았고 매일 강박적으로 갱도에 내려가 일하게 하였다.

  압박이 있는 곳에는 반항이 있는 법이다. 일제의 압박이 가심화됨에 따라 광부들의 반항과 투쟁도 더욱 격렬해졌는바 처음의 개별적인 군경이나 감독에 대한 징벌로부터 생산을 파괴하고 파업과 무장폭동을 조직하는 데로 발전하였다. 오하묵이 소속된 적도온천갱구 광산로동자들은 빈남포만 터치고 갱도에 들어가지 않거나 전기를 끊고 석탄차를 탈궤시키며 기차를 폭파시키는 등 방법으로 생산을 파괴하였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투항하였다. 오하묵도 3년간의 노역생활을 결속짓고 밀산현 복흥촌으로 돌아왔다. 죽은줄만 알았던 동생이 돌아온 것 을 보자 형님 오경욱과 동생들은 너무나 뜻밖이어서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 보기만 하다가 서로 부등켜 안고 눈물바다가 되였다. 더우기 오하묵의 가슴을 아프게 한것은 그간 어머니가 아들을 저승같은 탄광노역에 보내고 매일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가 긑내는 한많은 세상을 떠난것이었다.

  오하묵이 탄광에서 돌아온후 얼마 안되여 그는 마을에서 자기보다 10 세이상인 ‘남풍’이란 별명을 가진 청년을 사귀게 되였다. ‘남풍’은 사상이 비교적 활약적이고 정보래원이 넓었는데 경상적으로 마을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시국에 대해 담론하고 타고장에서 발생했거나 발생하고 있는 새로운 일들을 들려주었다.

  몇차례의 접촉을 통하여 오하묵은 ‘남풍’과 의기투합하게 되였다. 어느 날 저녁 ‘남풍’은 오하묵을 찾아와 “공산당이 령도하는 민주련군이 곧 동안시(밀산)에 진주하게 되는데 민주련군에는 많은 조선족관병들이 있으며 이는 우리 백성들의 군대 이니 이 군대를 찾아가지 않겠는가?”고 말했다. ‘남풍’의 말은 고민과 방황중에 있던 오하묵에게 한가닥의 불씨를 지펴주었다. 두사람은 즉시 약속을 다지고 함께 민주련군에 참가하기로 했다.

  1946년 4월25일, 목단강군구 3지대 경위퇀이 동안시에 진주하였다. 오하묵은 이 경위퇀에 가입하여 경위퇀 제3영 제5련전사로 되였다. 제3영 300여명 전사들은 해림, 목릉, 림구 등지에서 왔는데 전부 조선족이였으며 전퇀에서 전투력이 제일 강한 영이였다.

  1946년 4월27일, 원 동안지구에 진주했던 쏘련홍군들이 본국으로 철수했다. 그러자 동안지구에 웅크리고 있던 국민당토비두목 사문동은 자기들 이 재기할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밀산현 평양진(원계동현 평양진) 유지회 울안에서 동안지구토비두목회의를 열고 동안지구공성련합지휘부를 성립, 사문동이 총지휘를 맡고 계서를 공격하기로, 곽청전이 부총지휘를 맡고 동 안시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동시에 국민당중앙군 동안지구보안중대 보청분대의 유전창의 무리로 하여금 밀산 흥개에 진주하여 동안시에 대한 포위태세를 형성하여 동안시에 진주한 목단강군구 3지대 경위퇀과 계서에 진주한 목단강군구 3지대 사령부간의 련계를 끊기로 하였다. 5월13일, 토비 곽청전은 밀산 흑태에서 회의를 열고 동안시를 진공할 작전포치를 하였다.

  격전의 서막이 서서히 열리였다. 경위퇀 퇀장 왕경곤은 한통의 긴급명령을 밀산에서 100여리 떨어진 반제하 제2영에 전달하려 했다. 하지만 반제하로 통하는 길은 이미 토비들에게 봉쇄되여 있어 어떻게 봉쇄선을 넘는가가 큰 난제로 되였다. 왕퇀장은 통신원을 물색하기 위해 작전참모를 찾으러 밖으로 나오다가 련병장에서 한창 훈련중인 전사들에게 눈길이 갔다. 대렬중에는 중등키에 어깨가 딱 벌어지고 동작이 민첩한 전사가 눈에 띄였 다. 왕퇀장은 천천히 발길을 멈추고 이 전사의 일거일동을 주시했다. 한식경 훈련이 거의 마무리 될 즈음, 왕퇀장은 이 전사의 옆으로 다가가서 묻기 시작했다.

  “이름은?”

  “오하묵입니다. 3영 5련 전사입니다.”

  “나이는?”

  “19세입니다.”

  “말탈줄 아는가?”

  “압니다.” 원래 오하묵은 지주집에서 방목할 때 말타기를 배웠던 것 이다.

  “어떻게 부대에 오게 되었는가?” 왕퇀장이 계속 물었다.

  “3년전에 저는 일본놈들에게 끌려 계서적도탄광에서 석탄을 캐며 비 인간적인 노역을 했습니다. 년로한 어머니는 저때문에 매일 눈물로 보내시 다가 제가 돌아오는 것도 보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8.15해방을 맞아 집에 돌아온후, 민주련군이 동안시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민주련군은 우리 가난한 백성들의 번신과 해방을 위해 싸우는 군대라는 말을 듣고 참군하게 되였습니다.”

  오하묵의 대답을 들은 왕퇀장은 연신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전퇀에 많은 조선족관병들이 있지만 오하묵처럼 한어에 류창한 사람은 보지 못했었다. 왕퇀장은 오하묵이 매우 령리하며 정찰병의 소질이 있다고 판단했다. 하여 곧바로 오하묵을 지휘부로 불러 임무를 교대했다.

  “이 편지를 반제하 2영 영장에게 전달하시오. 오늘 저녁 토비들의 구령은 “날다”, “새”요. 잘 기억하고 길에서 조심하시오.”

  오하묵은 편지를 잘 간직한후 병영에 돌아와 자기의 보총을 바치고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 입은후, 수류탄 2개를 휴대하고 몸을 날려 말에 올라 반제하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삼소통지경에 이르렀을때, 멀리서부터 초소가 설치돼 있는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오하묵은 자신이 이미 토비들의 봉쇄선에 진입했다는 것을 의식하고 냉정하게 서두르지 않고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갔다. 보초를 서던 두 토비는 오하묵을 발견하고 황망히 총을 꼬나 들며 “섯!”, “구령!”하고 소리쳤다. 오하묵은 이미 준비가 있었으므로 “새!” 하고 숙련하게 대답했다. 토비들은 그의 의젓한 기세에 눌렸는지 더 캐여 묻지 않고 지나가게 하였다.

  오하묵은 토비들의 봉쇄선을 순리롭게 통과한후 안전하게 왕퇀장의 편지를 2영 영장의 손에 전달했다. 오하묵은 2영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귀로에 올랐다. 본래는 낮의 초소를 피해 산길로 돌아오려 했으나 이미 어두워졌으므로 산길에 익숙하지 못해 더 큰 위험이 있을것 같아 원길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엇다.

  오하묵이 어둠을 더듬으며 삼소통 접경지역의 초소부근까지 왔을 때, 토비초병들은 말발굽소리를 듣고 서라고 소리쳤다. 놈들은 구령도 부르지 않고 직접 검사하려 들었다. 오하묵은 다른 방도가 없다는것을 감촉하고 과단하게 말에 채찍을 가해 초소를 향해 돌진하면서 동시에 수류탄 2개를 초소앞에 서있는 세개의 검은 그림자를 향해 던졌다. 굉음과 함께 놈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오하묵이 지혜롭고 용감하게 토비들의 초소를 넘은 사적은 전 경위퇀의 화제가 되였다.

  1946년5월15일 이른새벽, 토비 곽청전은 로준당, 기소무, 조본초 등 부대의 1700여명의 토비들을 긁어모아 동안시에 대한 총공격을 발동하였다. 토비들의 공성부대에는 7문의 박격포와 대량의 적탄통, 몇십대의 운수차를 가진 운수대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외 기병중대와 사복정찰 중대도 있었 다. 주공임무를 담당한 토비들은 모두 국민당이 진남(晋南) 중조산작전에서 일본군에 포로된 군관과 사병들이였으며 어떤 토비두목들은 국민당군관학 교 졸업생으로 실전능력이 강했는바 토비두목 곽청전은 바로 당년 국민당 군의 영장출신이였다.

  곽청전의 지휘소는 동안시 서교의 련주산주봉 막하산에 세워져 있었다. 이곳은 동안주위의 제고점으로 동안 전시를 내려다 볼수 있었다.

  효과적으로 토비들의 진공을 반격하기 위하여 아군은 경위퇀, 호림독립퇀, 동안공안대대로 조성된 련합작전지휘부를 성립하였는데 투입된 병력은 2000여명이 였다. 련합작전 지휘부는 북대영과 원일본신사 사이의 낡은 건물안에 세워졌으며 경위퇀 퇀장 왕경곤이 작전 총지휘를 담당하였다.

  곽청전, 로준당 두 무리의 토비들은 각각 동안시 서쪽과 서남방향으 로부터 진공해 들어왔다. 경위퇀은 2개 영의 병력으로 서쪽면을 방어하 였다. 놈들은 포화의 엄호하에 벌떼처럼 몰려들었는데 악을 쓰고 시가구 역으로 박근하였다. 경위퇀의 맹렬한 저격하에서도 토비들은 빈번히 경위 퇀의 진지로 돌격해왔다. 몇차례의 단병접전을 거쳐 정면으로 진공해오는 적들에게 많은 사상자를 내게 했다.

  곽청전의 사복부대는 한무리의 결사대였는데 흉악스럽고 완고하며 대다수는 진남중조산전역의 포로들이였다. 이 놈들은 포로된후 동안동산창고에서 몇년간 부역하였으므로 시구 북대영의 지형에 익숙했다. 격전중에서 사복대의 10여명 토비들은 낡은 건물의 엄호를 빌어 아군의 작전 지휘부 부근까지 살금살금 다가왔다. 하지만 교활한 토비들도 경각성 높은 경위퇀 전사들의 눈을 벗어나지 못했다. 놈들이 완전히 사격권안에 들어 서자 경위퇀전사들은 뛰쳐나오면서 맹렬한 사격을 퍼부었다. 놈들은 독안의 쥐가 되여 한놈도 도망가지 못했다.

  선제공격을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하여 작전지휘부에서는 먼저 서산 제고점에 설치한 적지휘부를 짓부시기로 결정하였다. 아군은 4문의 박격 포를 집중하여 동시에 발사하였다. 몇십발의 포탄은 모두 토비들의 작전 지휘부를 명중했다. 토비들은 대세가 기울어진것을 보고 앞다투어 도망치 기 시작했다. 오하묵과 전우들은 기타 련대와 배합하여 련주산 이서까지 추격했다. 일부 토비들은 차를 타고 흑태의 소굴로 도망했는데 작전은 오 후 4시까지 지속되였다.

  동안보위전에서 아군은 50여명의 토비들을 격살하고 80여명을 포로 하였으며 경기관총 2정, 보총 132자루를 로획하였다. 오하묵은 전퇀의 표창장려를 받았다.

  동안보위전이 결속된후, 경위퇀은 또 주동적으로 출격하여 흥개에 도 사리고 있는 유전창부대와 흑태의 곽청전부대를 포위토벌하였다. 유전창부대는 얼마 버텨내지도 못하고 전부 보청현으로 줄행랑을 놓았으나 흑태의 곽청전부대와의 교전은 상당히 격렬했다. 여기서도 토비 100여명을 소멸하였다. 오하묵은 격전중에서 제1영 영장 조귀련과 제3영 7련련장 박춘근이 용감히 적들과 싸우다가 희생되는 비장한 장면을 친히 목격했다.

  1946년5월24일, 경위퇀은 359려의 행동에 배합하여 동안성을 떠나 반제하, 영안을 거쳐 계서에 도착했다. 바로 이틀후, 밀산력사에서 지울수 없는 “5.26참안”이 일어났다. 6월21일, 오하묵은 경위퇀을 따라 목릉하남의 도로를 거쳐 밀산으로 향했다. 연도의 토비들은 이미 다 도망갔으므로 22일 부대는 총한방 쏘지 않고 밀산에 다시 진주했다.

  7월초, 경위퇀은 명령을 받고 호림에 들어가 휴식정비를 했다. 오하묵은 부대를 따라 보청북의 칠성포에서 출발하여 보청현성을 경과하고 완달산 남횡림자를 가로지르며 호림까지 300여리를 4일만에 도착했다. 부대는 산림과 초지를 지나고 소택지를 건너며 밤에는 산에서 로숙하였다. 비가 오면 그대로 ‘물에 빠진 닭신세’가 됐고 더욱 가증스러운것은 쇠파리, 모기 등 온갖 잡충들이 어데라없이 파고 들며 물어뜯었고 지니고 온 건 량은 습기에 곰팽이가 끼고 구더기가 생겨 매일 구더기낀 옥수수 가루떡을 먹지 않으면 안되였다.

  7월 중순, 정비를 마친 후 오하묵은 부대를 따라 동안에서 요하, 부금, 화천 일대로 도망간 토비들을 추격하였다. 8일간의 추격을 겨쳐 1400여 명의 잔여토비들을 소멸하였다.

  요하에서 오하묵은 퇀부의 명령을 받고 한개반의 전사들을 거느리고 한 산굴을 수색하였다. 그가 산굴 입구에 거의 다달았을 때, 한 수상한 자 가 주위를 흘끔흘끔 살피며 산아래로 달음질치는 것을 보았다. 의심스럽게 생각한 오하묵은 전사 몇을 불러 그자의 뒤를 쫓게 했다. 그자가 골짜기 에서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것을 보고 오하묵은 전사들과 함께 가파른 비탈 길로 앞질러 갔다. 오하묵은 탄광에서 고된 일에 단련된 몸이라 산에서는 제비처럼 몸이 가벼웠다. 그자가 산아래에 도착하여 뒤쫓는 사람이 있는가 자꾸 뒤를 돌아볼 때 오하묵은 갑자기 “서라! 쥐새끼처럼 어디로 내빼려 는가?”고 소리치자 그자는 놀라 땅에 풀썩 주저 않더니 한바퀴 뒹굴었다. 정신을 차린 그자는 어느새 권총을 꺼내들고 오하묵을 쏘려 했다. 오하묵은 정황이 위급하자 몸을 날려 그자를 치면서 그자의 총을 떨어뜨리고 한데 엉켜 싸웠다. 그때 뒤따르던 전사들이 도착하여 그자를 꽁꽁 묶어 퇀부로 끌고 갔다.

  심문결과 그자는 사문동부대의 련장이였다. 오하묵이 토비련장을 생포했다는 소식은 또 한차례 부대에서 퍼져나갔다.

  1946년9월, 토비숙청이 결속된 후 오하묵은 경위퇀과 함께 주력부대에 편입되여 전선으로 나갔으며 선후로 1947년 동북 추, 동계 공세에 참가 하였고 장춘을 포위하는 전역에도 참가했다. 료심전역에서는 심양에서 외곽포위 작전임무를 수행했으며 우군부대와 배합하여 심양을 공격탈환 하였다.

  1948년11월, 오하묵의 소속부대는 대군을 따라 산해관에 입관하였으며 평진지구에 진입하여 장가왕조를 뒤엎는 또 한차례의 중대전역을 시작하 였다.

  1949년 1월15일, 당고전역이 시작되자 오하묵은 명령에 따라 해탄참전투에 참가하였다. 해탄참의 대표성적인 건물은 홍루이며 홍루주위는 모두 크고 작은 또치카였다. 국민당군은 이런 유리한 지형과 견고한 시설에 의거하여 최후의 발악을 하였다. 국민당군은 한개 사단의 병력을 파견하여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오하묵의 소속영은 국민당군과 련속 20여 시간의 전투를 진행했음으로 희생이 매우 컸다. 허나 수장이 기타 부대로 이 영을 대체하려 할 때, 전영 지휘원과 전투원들은 모두 계속 남아 끝까 지 싸울것을 청원하였으며 완고한 적들을 소멸하기 전에는 절때 화선에서 물러서지 않을것을 결심했다. 수장은 그들의 강렬한 요구에 따라 이 진지 에 두개 영의 병력을 증가한 후, 홍루를 향해 맹공격을 시작했다. 국민당 군의 기관총, 화포 및 수류탄의 진공하에서 해방군 전사들은 한발작 한발 작 적들의 또치카로 접근했다. 앞의 전사가 쓰러지면 뒤의 전사가 이어 가면서 적들의 또치카는 하나하나 날아갔다. 홍루안에 숨어있던 적들은 전 연진지를 빼앗기자 뒤짚힌 벌집처럼 사처로 쏘다니다 대부분 해방군전사 들에게 소멸되였다. 그번 전투에서 오하묵은 적의 또치카 4개를 까부셔 2 등공을 세웠으며 경위련 련장으로 승진했다.

  4월, 오하묵은 부대를 따라 화중, 화남으로 진군했다. 1949년7월, 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은 호북성 의창, 사시지구에서 국민당군과 작전 하였다. 오하묵소속 제49군은 14일 오후에 기타 부대와 배합하여 사시, 강릉에 대한 포위를 완성하였다. 15일 아침, 사시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점 심쯤엔 강릉을 점령하였으며 국민당 수비군 제64사 일부를 섬멸하고 1700 여명을 포로하였다. 그번 전역은 남진하는 상서대문을 열어제낀 셈이였다. 1949년8월5일, 평화적으로 장사를 해방한 후 4야주력부대는 강서성 남부와 호북성 동북부 지구로 밀고 들어갔다.

  8월15일, 오하묵이 소속한 146사는 며칠간의 급행군을 거쳐 상향 지구의 청수평에 도착하였다. 청수평은 호남 쌍봉현 서부에 위치해 있으며 서쪽으로 소동현과 접하고 동으로는 인당진과 이웃하며 남쪽은 화문, 쇄석과 잇닿고 북은 삼당포진과 접한다. 자고로 역참요새로서 상중에서 상남으로 통하는 외통길목이였다.

  청수평에서 선두영 영장은 관병들이 상당히 피곤해하고 또 적정이 없으므로 유력한 부대를 파견하여 제고점을 공제하지 않고 부대가 산골짜 기로부터 큰길로 통과하다가 국민당 제46군 236사의 매복에 걸렸다. 전투가 시작되자 전위퇀은 즉시 주력을 풀어 선두영을 접응하였는데 쌍방은 치렬한 격전을 시작했다. 도강이래 이 호랑이부대는 아직 그렇다 할만한 싸움을 한번도 해보지 못했던지라 일찍부터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사장 왕규선은 공격명령을 하달하고 진세를 펴가며 맹렬한 공격을 했으나 이튿 날 날이 새도록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하루동안의 격전을 거쳐 국민당 장관 백숭희는 전세를 분석한후, 이 고립적 으로 깊숙이 들어온 아군을 완전히 먹어치울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하여 그는 부근의 제7군 171사, 172사를 재빨리 움직여 좌우로 포위 함으로써 일거에 해방군 제164사를 섬멸하려 들었다. 16일, 적군은 4대의 비행기와 20여문의 대구경화포의 지원하에 한차례 또 한차례의 공격을 가해왔다.

  8월17일, 날이 밝자 국민당군의 공세가 시작되였다. 146사 사장 왕규선은 포탄이 날아오는 소리를 들으며 이상한 감을 느꼈다. 반시간 사이에 진지에는 적어도 2000발의 포탄이 떨어졌으며 모두 중포탄이였다. 작전 경험이 풍부한 이 로전사는 포탄들이 여러 부동한 진지로부터 날아오며 모두 거리가 멀지 않다는것을 판단했다. 점심전으로 무선전도 끝내 수리되여 군부의 명령을 전달받을수 있었다. 146사는 군부의 명령대로 영풍 으로 철수할것을 결정했다. 하지만 그때 사장 왕규선은 매우 랭정했다. 그는 지금 적들이 위로는 비행기가 있고 땅에는 중형포가 있는 정황에서 대낮에 포위를 뚫고 나간다는 것은 자멸을 초래하는것이란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여 그는 과단성있게 어두울 때까지 견지한 후, 어둠을 타 철퇴할것을 결정했다. 또한 군부에서 즉시 145사를 영풍에 보내 자기들을 접응해줄것을 요구했다.

  적들은 이틀간 고전하였으나 전투를 결속짓지 못하자 시간을 끌수록 변수가 생길가봐 전부력량을 조직해 더욱 맹렬한 공격을 해대기 시작했다. 놈들은 부단히 한개 영 또는 한개 퇀씩 집중적으로 돌격해 왔는데 146사 는 결사적인 저항으로 적들의 37차에 달하는 공격을 막아냈다. 황혼이 가 까워올수록 전투는 점점 더 치렬해졌다. 관건적인 시각에 왕사장은 사급 간부가 퇀으로 내려가고 퇀급간부가 영으로, 영급간부가 련으로 다시 련급 간부가 반으로 내려가 마지막 한사람이 남을때까지 진지와 공존하라는 명 령을 내렸다.

  혈전은 옹근 10여시간이나 지속되였고 146사는 끝끝내 버텨냈다. 밤중 이 되자 146사는 145사의 접응하에 돌파구를 열고 포위를 뚫고 나갔다. 적 들도 련일 계속되는 고전으로 사상자가 많았고 또 야전에 익숙하지 못한데 다 아군의 접응이 있는것을 보고 더 추격하지 않았다. 146사가 영풍의 안전지대까지 철퇴하자 145사는 그들이 옹근 이틀넘게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즉시 가마를 걸고 밥을 지었다. 하지만 그들이 밥을 오하묵과 그의 전우들에게 가지고 갔을 때, 그들은 이미 그대로 맨땅에 곯 아떨어져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못했다.

  1949년9월3일, 오하묵은 항보전역에 참가했다. 전역은 추풍에 락엽 쓸듯 형양시경내의 국민당반동무장을 소멸하고 형양경내를 모두 해방하 였다.

  1949년10월14일, 광주가 해방된 후 오하묵은 부대를 따라 뢰주반도에 진주, 해남도 전역에 참가하였다.

  1950년3월5일, 해남도 상륙작전이 서막을 열었다. 19시30분 해방군 제40군118사352퇀의 한개 보강영의 790여명 전사들은 뢰주반도 등각루 에서 돛을 올렸다. 아군은 수비군 2개 련을 신속히 격파하고 접응하는 경 애종대 제1총대와 합류하였다.

  3월 10일13시, 해방군 제43군 128사 383퇀의 한개 보강영 1000여명 은 담강동남에서 출발하여 11일9시, 해남도 동북부의 적수항으로부터 동고일대에서 선후로 상륙했다.

  제1진 2개 영의 성공적인 상륙은 경애종대의 반포위토벌투쟁을 유력하게 지원했을 뿐만아니라 국민당군의 해안방어 허실도 더욱 잘 장악 할수 있었다. 해방군 도해작전 지휘부는 재차 2개 퇀을 투입하여 제2진 밀항상륙을 실시했다. 오하묵은 제2진 밀항부대를 따라 순리롭게 섬에 상륙하였으며 경애종대와 합류하였다.

  1950년 6월25일, 조선전쟁이 폭발했다. 숱한 전공을 세워 중대장으로 발탁된 오하묵의 소속 사단은 한강을 넘어 곧추 안동성에 도달했다.

  1950년 7월29일은 오하묵에게 있어서 잊혀지지 않는 날이다. 그날 오하묵의 중대는 중평동의 무명고지를 빼앗아 후속부대를 위해 장애를 제거하라는 임무를 맡았다.

  저녁어둠이 내리자 아군의 산야포와 류탄포들이 일제히 고지를 향해 불을 뿜었다. 고지는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으며 초연은 전사들로 하여금 숨을 쉴수 없게 하였다. 드디어 포화가 뜸해지더니 밤하늘에 갑자기 세발의 붉은 신호탄이 날아올랐다. 오하묵은 권총을 휘두르며 “동지들, 돌격!” 하고 소리쳤다. 전사들은 오하묵의 명령이 떨어지자 분분히 전호를 뛰여나와 맹호처럼 무명고지를 향해 돌격했다.

  한국군은 무명고지의 주체방어시설에 숨어 있었고 그 주위에는 여러 개의 작은 지면보루들이 있어 립체교차 화력망을 형성하고 잇었다. 기관총이 불을 뿜고 화포가 밀집하여 앞에서 돌격하던 전사들이 분분히 쓰러졌다. 첫번째의 돌격은 좌절되였다.

  오하묵의 중대는 제2차 돌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한국군은 인민군이 시탐사격을 하면 화력점을 은폐하며 응대하지 않았고 조명탄을 쏘아올려 진지앞은 대낮처럼 환했다. 1소대의 전사들이 돌격하자 한국군의 화력망이 일제히 사격을 가했으므로 돌격은 또다시 좌절되였다.

  오하묵은 먼저 적들의 지면보루 화력점을 까부실것을 결정하고 소대장과 부소대장을 불러 4개 조의 폭파소조를 뭇고 수뢰와 폭파통을 휴대하게 했다. 준비가 끝난 후, 오하묵은 먼저 명령을 내려 중, 경기관총들이 일제 히 적주요 지면보루를 행해 사격하게 함으로써 적들의 화력을 압제하게 했다. 그 틈을 타 1소대장은 폭파조를 거느리고 신속히 보루에 접근한 후 재빨리 묶은 수뢰와 폭파통을 적들의 보루에 던져 넣었다.

  무명고지를 점령한 후, 전세는 피동으로부터 주동으로 바뀌였다. 이튿날 날이 희붐히 밝자 한국군은 원병을 조직하여 더욱 맹렬한 포화와 기관총소사로 무명고지를 향해 덮쳐 들었다. 갑자기 포탄 한발이 아츠러운 소리를 내며 전연전호에서 지형을 관찰하던 오하묵과 멀지 않은 곳에 떨어 졌다. 거대한 충격파가 오하묵을 몇미터밖으로 밀어냈다. 잇따라 또 한발의 포탄이 그와 멀지 않은 곳에서 폭발했다.

  오하묵은 혼미상태에서 깨여났다. 그가 머리를 들어보니 1소대장의 몸체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는 몸을 일으켜 1소장을 구하려 했으나 금방 땅에 꼬꾸러졌다. 그의 오른쪽 팔은 포화에 뒤번져진 흙속에 박혔다. 팔을 빼내자 선혈이 물처럼 줄줄 흘러내렸다. 그의 오른손 손목이 고사기관총에 관통상을 입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상처를 싸맬 생각도 않고 비틀비틀 1소대장의 곁으로 다가가 고통스럽게 불렀다. “소대장, 소대장...”

  1소대장은 피를 너무 많이 흘리고 이미 희생되였던 것이였다. 포탄은 부단히 그의 신변에서 터졌으며 밀집하게 날아오는 기관총탄들은 눈앞에서 콩볶듯이 튕겨났다. 두 전사가 오하묵이 부상당한것을 보고 포복으로 건너 와 상처를 싸매주며 어떤가고 물었다.

  오하묵은 “나는 괜찮으니 반드시 고지를 지켜내야 한다” 고 힘겹게 말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탓으로 오하묵의 눈앞에는 모든것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힘을 주어 머리를 흔들었으나 의식은 점점 몽롱해졌고 천천히 혼미상태에 빠졌다.

  여러차례의 치렬한 줄다리기 전투를 거쳐 오하묵의 중대는 끝내 무명고지 를 지켜냈다.

  오하묵은 전선구호소에서 수술을 받았다. 오른팔 손목 관절이 분쇄성 골절이었으므로 혈관을 압박해 손바닥이 이미 괴사되였으므로 오른팔 앞 부분을 절단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틀후에야 오하묵은 천천히 깨여났다. 그는 자기가 아직 살아있는지 아리숭했다. 그의 눈에 비치는것들이 자기의 의문을 풀어주려할 때, 그는 어딘가 잘못된 감을 느꼈다. 그는 자기의 오른팔이 두꺼운 붕대에 감겨져 있으며 밖으로 피가 스며나온것을 보았던것이다.

  오하묵은 조급하게 일어나 앉으며 의사와 호사들에게 소리질렀다. “내 손은? 당신들은 내손을 어떻게 했는가? 내손을 내놓으라...” 의사들과 호사 들은 그저 묵묵히 머리를 돌릴뿐 이었다.

  중상을 입고도 여러 전투에 참전했던 오하묵은 끝내 지탱하지 못하고 진지에 쓰러졌다. 의사들이 붕대를 벗기고 상처를 처치할 때, 모두 크게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상처는 이미 엄중히 부패하여 구더기가 버글거렸고 오른팔은 부어서 허벅 다리보다 더 굵었는데 오른팔 팔뚝부분이 수시로 괴사될 가능성이 있었 으며 제때에 처치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급할수도 있었다. 의사의 건의하에 부대에서는 즉시 오하묵을 국내로 호송하여 단동병원에 입원시켰다.

  1952년 7월, 단동료양지에서 상처를 치료한 후 오하묵은 자기가 다시는 전선에 나갈수 없다는것을 알고 매일 우울하게 보냈다. 다만 전선에서 승리의 소식이 전해올 때면 더없이 기뻐했다. 령도에서는 그의 이런 모양 을 보고 그를 부대의 후근부에 보내 사업하게 하려 했다. 하지만 오하묵은 자기는 이미 불구의 몸이므로 부대를 따라 다닌다는것은 부대에 부담을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고향에 돌려보내 줄것을 요구했다.

  얼마후 령도에서는 오하묵의 퇴역신청을 비준했다. 그해 오하묵은 25 세였다.

  1952년 가을, 오하묵은 퇴역하여 밀산현 련주산향 해방촌으로 왔다. 촌당지부에서는 오하묵의 실제정황에 비추어 그에게 촌의 청년사업을 맡게 했다. 청년사업은 오하묵에게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사업이였다. 당시는 바야흐로 대생산고조가 일어나는 시기였는데 오하묵은 심사숙고를 거쳐 당지 부에 부분적인 토지와 생산자료를 통합하여 청년돌격대를 무어 청년전을 다룰것을 제출했다.

  당지부의 지지를 얻은 오하묵은 당시의 촌단지부서기 맹채운과 함께 40여명의 청년들을 조직하여 50헥타르의 수전을 시험적으로 다루기로 했 다. 우선 먼저 그는 청년들을 조직하여 “원정”적비를 하여 대량의 농가비료를 만들어 비료래원이 부족한 문제를 해결했다. 잇따라 도랑을 까시고 논판을 고르며 외지에서 우량벼종자를 사다가 합리밀식했다. 이런 일들은 당시의 가정식농사로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이였으며 아직 기초가 박약 했던 초급사도 쉽게 해낼수 없는 일이였다.

  비록 오하묵은 신체가 잔폐여서 생활상에서 많은 불편을 겪어야 했지만 매일 제일 첫사람으로 논에 나가고 정상적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생산 로동에 참가하였다. 봄철에 도랑을 가시고 논두렁을 쌓고 논을 고르는 등 일을 할 때, 그는 자체로 자루가 긴 삽을 만들어 삽자루를 오른팔에 비끌 어 매고 일했는데 삽질이 다른 사람들보다 못지 않았다. 여름 기음철에는 오로지 왼손 하나로 풀을 뽑아야 했지만 남들에게 지지 않았다. 가을걷이를 할 때에는 또 자체로 20여센티미터 길이가 되는 소가죽 팔소매를 만들 고 그속에 솜을 채워 오른쪽팔굽치까지 씌운후 낫자루를 소가죽 팔소매에 매고는 가을했다. 이렇게 그는 하루 최고 1무 면적을 가을했는데 당시 하루에 1무 면적을 해내는 돌격대원이 몇명 안되였다.

  이렇게 며칠간 일하고 나니 그의 팔꿈치는 다슬어 퉁기가 치고 퉁퉁 부어올라 다치기만 해도 가슴을 찌르는듯 아파났다. 이를 본 대원들이 모두 그더러 휴식하라고 권고했지만 그는 오히려 “탄우가 빛발치는 전쟁터에 서 죽음도 두렵지 않았는데 요까짓 곤난을 무서워 하겠는가?”고 하면서 일터를 떠나지 않았다.

  1955년4월, 조직에서는 오하묵에게 해방촌 당지부 부서기직무를 맡겼다. 구당위서기는 그에게 “당신은 전투영웅이요. 조직과 마을사람들은 모두 당신이 중임을 떠메고 고향마을을 잘 건설하기를 희망하오. 그러니 기대를 어기지 말고 새로운 공훈을 세우기 바라오.”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의 마음은 후더워나기 시작했다. 촌당지부는 당이 군중과 련계하 는 교량과 뉴대라는것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진정과 순박한 정감으로 이 중 임을 짊어졌다.

  1955년, 농촌합작화운동이 바야흐로 고조에 진입하고 있었다. 해방촌의 초급사도 조직형식상에서 순리롭게 고급사로 진입했다. 하지만 실제 실시과정에서 여러가지 모순이 한데 엉켜 그에게 많은 난제를 제기했다. 례하면 경작구의 조정, 가축과 농기구의 배합, 사양관리 및 사용 등등 문제 에서 공평, 공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당지부와 오하묵의 노력하에서 많은 까다로운 문제들이 비교적 순리롭게 해결되였다. 특히 분배문제에서 토지와 로동력을 각각 절반씩의 비례로 하여 분배한것이다. 토지가 많고 로동력이 적거나 로동력은 많으나 토지가 적은 농호에 대해서도 모두 합리 하게 돌보아 수입상의 차이가 너무 크지 않게 하여 사원들의 로동적극성을 불러 일으킬수 있었다. 1955년, 해방촌의 농업생산은 대풍수를 안아 왔는바 사람들은 처음으로 합작사의 우월성을 느낄수 있었다.

  그는 마을의 100여호 촌민들의 크고 작은 생활에까지도 모두 신경을 기울였다. 1956년 춘절이 금방 지났을 때, 3조 촌민 김룡호의 집에 불이 났다. 소식을 들은 오하묵은 집에서 하던 일을 뿌리치고 곧추 김룡호네 집으로 달려가 뒤처리를 해주었다. 그는 울고 있는 김룡호를 보고 “남자 대장부가 울기는 왜 우는가? 집이 불탔으면 새로 지으면 되지 않는가?” 고 위로하면서 그길로 김룡호네 집에 이불 두채를 가져왔고 또 향 해당부문과 련계하여 구제금을 신청해 주었다. 저녁에는 또 촌간부회의를 열고 김룡호 네 새집을 지을 일을 연구토론 하였다. 한달후 김룡호네는 두칸짜리 새집 에 이사할수 있었다.

  여름철에 들어서면서 련속 며칠간 비가 내리자 마을 동쪽의 저와지대 에 있던 2호의 농호가 물에 잠겨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되였다. 오하묵은 비를 무릅쓰고 그곳에 달려가 한면으로는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철거하게 하고 한면으로는 가족들을 위안하였다. 그는 밤도와 회의 를 열고 구제방안을 연구했으며 당원간부들을 동원하여 돈과 물자를 내놓 고 의무로동을 하여 집수리를 해주었다.

  그는 경상적으로 촌의 당원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우리는 당원간부 로서 우리의 일언일행은 당의 형상을 대표한다. 군중들에게 곤난이 있을 때 우리는 절대 수수방관해서는 안된다.”

  1957년9월, 오하묵은 민정부에서 소집한 전국군렬속, 복원잔페군인 적극분자대표대회에 참가하여 모택동, 류소기, 주은래 등 당과 국가의 지도 자들의 접견을 받았으며 국무원에서는 그에게 “외팔영웅”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수여하였다.

  이는 당과 인민이 오하묵에 수여한 최고의 영예였다. 하지만 그는 영예와 박수갈채앞에서 매우 담담했다. 그는 영예와 박수갈채는 자기에 대한 하나의 고무격려이며 자기의 사명과 책임을 명심할것을 재확인시킬 뿐이라 고 생각했다.

  1958년, 일부 농촌에서는 “허풍”이 불기 시작하여 무당수확고를 터무니 없이 높여 상급에 회보했다. 오하묵은 이에 대해 매우 반감을 가졌다. 그는 “하나면 하나고 둘이면 둘이지 위를 속이고 자기를 속이는 일을 할수 없다”고 하면서 실사구시의 원칙을 견지했다.

  오하묵은 생활중에서 종래로 정부에 자신의 공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정부에 부담을 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 대한 요구가 매우 엄격 했는바 집사람들에게 “넘어서는 안되는 규정”을 제정해 놓고 “국가의 리익 을 탐하지 않고 촌의 리익을 탐하지 않으며 남의 리익을 탐하지 않기”를 요구했다.

  어느해 그의 안해가 난산으로 촌민들에 의해 병원에 가게 되였다. 당시 그는 수매량을 바치는 일을 맡아하고 있었는데 수매량은 시간성 요구가 있었으므로 그는 안해가 해산한 3일후에야 병원에 도착했다.

  비록 평소에는 일이 바빠 돌보지 못했지만 딸애의 성장을 몹시 관심했다. 딸이 학교에 다닌 후, 그는 기꺼이 학교의 과외보도원으로 되였으며 학부모회의를 할 때면 일이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짜내 참가하였고 돌아온 후면 딸애와 교류하였다. 그는 경상적으로 딸애에게 자기의 고난했던 동년을 이야기하였고 해방을 맞은 희열과 토비숙청, 해방전쟁, 항미원조 등 가렬처절했던 전쟁년대의 전기적 이야기들을 해주어 딸애가 어려서부터 인생의 도리를 배우도록 가르쳤다.

  1974년 딸이 고중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자 직업선택문제에 부디쳤다. 하지만 오하묵의 태도는 아주 명확했다. 즉 호구를 따라 농촌에 돌아와 농업에 종사하는것이다. 처음에 딸은 아버지한테 원망이 적지 않았다. 그것은 당시의 정책으로나 아버지의 특수한 신분으로나 자기에게 도시의 “철밥통” 쯤은 어렵지 않게 해결해 줄수 있었 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하묵은 자기의 특수한 신분으로 특수대우를 받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1985년, 해당부문에서는 국무원의 해당규정에 따라 반평생 농촌에서 농사하며 살아온 오하묵에게 리직휴양 수속을 밟아주어 만년에 생활보장이 있게 하였다.

  1990년 후, 오하묵은 선후로 관심병, 페기종 등 병을 앓았는데 매달 의료비가 적지 않았다. 해당규정에 따라 그의 진료비와 입원치료비 등은 모두 실제비용대로 정산받을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부근의 약국에 가서 자기 돈으로 약을 사먹으며 왠만하면 병원에 가지 않았다. “국가의 돈도 돈인데 국가에서 나에게 주는 생활비로 약을 사먹는것도 국가의 돈을 쓰는것이 아닌가?” 이것이 그의 생각이였다.

  1995년봄, 오하묵은 련속 며칠 혼미상태에 빠져 생활도 자립할수 없을 정도가 되자 가족들에 의해 향위생원에 보내왔다. 향위생원의 왕원장은 오하묵과 한마을에서 살았기에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왕원장은 오하묵의 병을 보고 나서 “참 고집불통이야. 좀 더 늦게 왔더면 명도 보전하기 어렵단말이요!” 오하묵은 그래도 희죽이 웃으며 “뭐 그렇게 까지야 엄중할 걸? 약이나 몇알 먹으면 일없겠지.” 이 말에 왕원장은 기가 막히기도 하고 가슴 아프기도 하여 직접 전화로 향민정조리를 불러 오하묵의 병세를 이야 기하며 빨리 구급차를 보내 시인민병원으로 보낼것을 요구했다. 그렇게 치료를 제때에 한덕에 오하묵은 위험한 고비를 넘길수 있었다.

  1995년 5월의 어느날, 당시 시민정국의 맹고군부국장이 고희가 넘은 세분 로인을 모시고 오하묵이 새로 이사한 집으로 찾아왔다. 세 로인이 그의 집문앞에 와 차에서 내리자 뜰에서 터밭을 가꾸던 오하묵은 한눈에 손님들을 알아 보았다. 그는 허둥지둥 달려 나와 힘있는 외팔로 세 로전우를 부둥켜안으며 아이들처럼 눈물범벅이 되였다. 이 세 로전우가 바로 항일련군 로전사이며 원 쏘련홍군 안동주재 경비구 부사령 리동광, 원목단강군구 제3지대 경위퇀 퇀장 이며 밀산해방의 공신인 왕경곤, 원 목단강군구 경위퇀 제3영 패장 김우천이였다. 50년전, 밀산을 해방하는 간고한 토비 숙청투쟁중에서 왕경곤과 김우천 역시 오하묵처럼 모두 한쪽 손과 팔을 잃었던것이다. 50년후 리동광의 노력하에 이렇게 로전우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였으니 어찌 감회가 깊지 않겠는가?

  1999년 9월, 오하묵은 또 한차례 북경에 가 국경 50주년경축 기념 활동에 참가하여 강택민, 주용기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으며 “혁명공신”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2004년 9월1일, “회팔영웅” 오하묵은 페암으로 77세의 장려한 인생을 마쳤다. 하지만 그는 영원히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있었다.

  /맹고군 저 피금련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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