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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잡이가 키퍼 훈련도…고 뮐러의 위대한 직업정신

[인터넷료녕신문] | 발행시간: 2021.08.26일 09:00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서독 대표팀의 게르트 뮐러(오른쪽)가 오스트랄리아와의 경기에서 헤딩꼴을 넣고 있다.

21세기 축구에서 정통 스트라이커의 수자는 줄어들었다. 최전방 공격수는 꼴만 넣으면 되는 게 아니라 상대 공격을 차단하거나 그 속도를 지연시키는 1차 수비라인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격수로서 탈압박을 잘하는 능력 뿐만 아니라 수비수로서 압박도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더우기 최근에는 최전방 스트라이커라 하더라도 중원에서 공을 많이 받아내야 한다. 금지구역 부근에서 ‘섬’처럼 고립된 스트라이커는 전술적 측면에서 효용가치가 크지 않다.

지난 15일 별세한 독일의 전설적 스트라이커 게르트 뮐러(1945-2021)는 21세기 관점으로 보면 수비수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꼴잡이는 아니였다. 하지만 금지구역 안에서 꼴을 넣는 능력은 세계 최고수준이였다.

그의 기념비적인 득점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바이에른 뮨헨을 분데스리가의 최고 명문팀으로 이끌었던 뮐러는 리그 통산 득점이 365꼴로 력대 1위다. 월드컵에서도 통산 14꼴을 기록해 2006년 호나우두(브라질)가 이 기록을 갈아치울 때까지 32년간 력대 월드컵 득점왕의 자리를 차지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그의 경기당 득점이다. 그는 분데스리가 427경기에서 365꼴을 기록했다. 경기당 득점이 무려 0.85다. 서독 국가대표로 뛰면서 달성한 기록은 상상을 초월했다. 62경기에서 68꼴로 경기당 득점은 1.09였다. 매 경기 한꼴 이상을 넣은 셈이였다.

뮐러의 엄청난 기록은 모든 신체 부위로 꼴을 넣을 수 있는 능력 덕택이였다. 그는 발과 머리로만 득점하는 선수가 아니였다. 때로는 무릎으로 때로는 정강이로, 심지어 등으로도 꼴을 자주 넣었다.

서독 축구팬들은 엄청난 킬러 본능을 보여준 그를 ‘작고 뚱뚱한 뮐러’로 불렀다. 서독 축구선수로는 다소 작은 키와 통통한 체형 때문이였다. 호리호리한 장신선수들이 즐비한 서독 축구계에서 키 175센치메터의 뮐러는 특이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럽언론은 그를 ‘폭격기’로 불렀다. 2차세계대전 때 동부전선에서 급강하 폭격기로 악명을 떨쳤던 슈투카(Stuka)를 그의 꼴 폭풍과 련결시켜 보도했기 때문이였다. 슈투카는 엄청난 굉음을 내며 교전국 전함과 주요시설을 폭파시켜 2차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지역에서는 공포의 대상이였다.

그의 별명은 나치의 악령을 련상시킨다는 점에서 적절치 않다는 론난도 많았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를 선정, 한 템포 빠른 슛과 국가대항전에서 더욱 빛을 발했던 가공할 만한 득점력은 2차세계대전의 상처를 기억하고 있는 유럽 기성세대들에게 슈투카 폭격기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이미 1970년 메히꼬 월드컵에서 10꼴로 득점왕에 오른 뮐러는 4년 뒤 서독을 월드컵 정상으로 견인했다. 그의 축구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꼴은 자국에서 펼쳐진 1974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화란을 침몰시킨 결승꼴이였다.

‘화란이 전체 경기를 지배했지만 금지구역 안의 지배자는 뮐러였다.’는 말이 나왔다. 축구에서 승자는 경기를 지배하는 팀이 아니라 꼴을 많이 넣은 팀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주는 꼴이기도 했다. 2차세계대전 이후 오랜 기간 축구경기에서 국기를 흔드는 행동을 꺼렸던 서독 관중들도 뮐러의 결승꼴이 터져나왔을 때는 마음껏 국기를 흔들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뮐러는 1974년 월드컵 국가팀에 선발됐을 때 특별한 임무도 수행해야 했다.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비상대기 키퍼 역할이였다. 그는 서독 키퍼가 모두 부상당하게 되면 뛸 수 있게 준비해야 했다. 물론 그 같은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뮐러는 팀을 위해 자신의 보조적 임무까지 성실하게 수행했다. 그는 국가팀 훈련 때마다 키퍼로 변신해 충실히 련습을 했다. 얼마나 열심히 키퍼 련습을 했으면 그는 동독과 월드컵 조별리그 경기를 앞두고 손가락 부상을 당해 제 컨디션이 아니였다. 그의 부상은 서독이 동독에 0대1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주요원인중 하나로 지목될 정도였다.

뮐러는 1974년 월드컵 후 국가팀을 떠났다. 1979년에는 그의 축구인생을 바쳤던 친정팀 바이에른 뮨헨을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 이어 미국에서 선수 은퇴한 후 스테이크 가게를 열어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사업은 축구처럼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고 알콜중독에 빠졌다. 그는 선수시절 동료들의 도움으로 알콜중독에서 벗어나 바이에른 뮨헨에서 유소년 팀코치로 일했지만 불행하게도 알츠하이머병을 앓게 됐다.

뮐러가 위대한 축구선수로 평가받는 리유는 단순히 그의 꼴 기록 때문만은 아니다. 어쩌면 1974년 월드컵 때 주전 스트라이커였지만 혹시나 모를 비상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키퍼 련습마저 충실하게 했던 그의 투철한 직업정신은 독일사회의 표상이였다. 직업을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하는 ‘근면한 명장의 나라’ 독일에서 그를 높게 평가하는 리유이다.

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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