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아이들에게 전통놀이 가르치다 정식 채용된 황한규씨
"군인으로 30년·대기업 10년 퇴직 후 쓸모없어졌다 느껴…
아직 나도 필요한 사람이라니 보약 100개보다 더 좋아요"
"'나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보약 100개보다 좋아요. 아이들과 만나는 하루하루가 일주일을 힘 나게 합니다."
지난 5일 오후 1시 10분쯤 서울 마포구 창전동 창전유치원 근처에서 '황한규'란 이름표를 단 백발노인이 양손 가득 비석 치기 준비물을 들고 유치원을 향해 뛰었다. 군인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30년간 복무하고, 10년 동안 대기업 건설사에서 안전담당 업무를 맡았던 희수(喜壽·77세)의 황씨는 이날 '유치원 선생님'으로 출근했다.
황씨가 유치원 선생님이 된 건 작년 4월부터 참가한 노인 일자리 창출 프로그램이 계기가 됐다. 한 달에 두 번 두 시간씩 '전통놀이 교육 방법'을 배우고, 이를 인근 유치원 원아들에게 가르쳤다. 황씨는 올해도 이 프로그램에 참가했고, 지난 4월 시작된 프로그램은 지난달 29일 끝났다.
마지막이라 생각했던 수업에서 황씨는 유치원으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프로그램이 끝나도 유치원 '교사'로 계속 일해달라는 것이었다. 유치원이 황씨를 정식 고용한 것이다.
황씨가 '교사직'을 얻는 데는 아이들의 힘이 컸다. 아이들은 황씨가 오지 않는 날에도 "할아버지 선생님 언제 와요"라고 물었고, 컴퓨터·휴대전화 게임 대신 전통놀이를 찾았다. 이 유치원에 다니는 강모(5)군은 "얼마 전 할아버지 선생님이 준 제기를 집에 가져가 동생과 함께 놀았는데, 정말 재밌었다"고 했다. 문양자(48) 원장은 "아이들이 '할아버지 선생님 보고 싶다' '할아버지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놀이가 재밌다'는 얘기를 해 고용을 결심했다"며 "요즘 맞벌이 가정 아이들의 60%는 조부모와 생활해 아이들에게 할아버지 선생님이 친숙하다"고 했다.
이 날도 아이들은 황씨가 가져온 비석을 가지고, 일정 거리에서 돌을 던져 상대 비석을 쓰러뜨리는 비석 치기 게임을 했다. 준비물은 황씨가 근처 문방구·청계천 공구시장·전통놀이 박물관 등을 통해 직접 구입했다.
황씨는 대부분의 준비물을 직접 만든다. 전통놀이 재료를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동네를 돌며 폐우유곽을 모아 깨끗이 씻고 말린 후 딱지치기용 딱지를 만들었고, 한지를 찢어 엽전 대신 나사받이(나사를 끼울 때 밑에 끼우는 것)와 엮어 제기를 만들었다.
황씨가 수업을 통해 받는 돈은 한 타임(30분)에 1만원. 일주일에 두 타임씩 한 달 수업하면 8만원을 받는다. 그렇지만 황씨는 자신의 출근을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라 했다.
"퇴직하고 나니 꼭 내가 '쓸모없는 사람' 같았어요. 이 일은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용기를 줍니다. 이 아이들과 만나는 한 시간이 소중하고 행복합니다."
비석 치기를 끝낸 아이들은 30분이 지났는데도 "한 번 더 하자"며 황씨를 졸랐다. 황씨가 "다음 차례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다음번에 해요"라고 하자, 아이들은 "다음에 또 오는 거 맞죠?"라고 재차 물었다. 이마에 땀이 맺힌 황씨가 아이들을 양손으로 안은 채 다시 대답했다.
"이젠 할아버지 선생님이 매주 월요일마다 올 거예요. 다음번에는 땅따먹기 해요, 꼬마 친구들."
“옳지, 맞혔네! 참 잘했어요.”지난 5일 서울 마포구 창전동 창전유치원에서‘할아버지 선생님’황한규(77)씨가 비석 치기 놀이 도중 한 아이가 상대방의 비석을 맞히자 활짝 웃으며 칭찬하고 있다. 이 날 아이들은 황씨의 시범에 따라 편을 나눠 비석 치기 놀이를 했다. /채승우 기자
[남정미 기자]
조선일보